82화
“루야.”
“……예?”
“루가 수작 부리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세레니예 가문이 존재하지도 않은 자작 부인을 빌미로 우리를 데려갈 수 없어.”
“그 말은 루 님이 세레니예 백작님이라는 뜻인가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 않을까? 루는 백작님이 아니라 칼레파니까.
‘칼레파쯤 되면 북대륙 한 나라의 고위 귀족 정도는 손쉽게 통제할 수 있다, 이건가.’
최종 목적지에만 도달할 수 있다면 방향이 조금 틀어져도 상관없다.
첫 번째 목표는 로궤와 연결된 높으신 분을 만나는 것.
세레니예 백작도 귀족은 귀족이니 잘 이용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세레니예 성까지는 대략 30분 정도 걸립니다. 그럼, 편안한 여행 되시기를.”
우리는 마차 두 대를 나눠 타 세레니예로 향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낯익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구조물은 메피스토의 군대가 숨어들어 있던 신전과 비슷한 형태였는데, 훨씬 깔끔하고 관리도 잘된 상태였다.
‘외국 여행이라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힐끔 고개를 돌리니 진과 안데르트도 창밖에 시선을 빼앗긴 채였다.
그 고요한 풍경에, 문득 당면한 이 순간이 꿈처럼 느껴졌다.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살아 돌아오고, 검에 미친 제자가 생기고……. 모두 마도 전쟁 시절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그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지.
어쩌면 내게 조금은 과분한 현실일지도.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땅을 밟고 내려선 나는 순수한 탄성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넓어?’
이렇게 넓은 성이 이토록 완벽하게 관리된 경우는 황성밖에 보지 못했다.
북대륙 특유의 돔 형상 지붕이 이국적인 멋과 전통적인 멋을 더하고 있었으며, 외관의 색도 상앗빛이어서 그런지 눈이 부실 정도로 고풍스러웠다.
“짐은 하인들이 옮길 겁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백작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흥미로운 눈으로 운하를 지나치던 예거시가 몬에게 물었다.
“몬 씨. 세레니예 백작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레니예가 아스트로사의 역사 깊은 명가라는 사실은 저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데 말이죠.”
몬이 그가 걷는 방향으로 스윽 고개를 돌렸지만, 대답은 다른 방향에서 들려왔다.
“미남.”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돌아갔다.
세레니예 본성을 가로질러 후원과 정원을 잇는 거대한 운하 위에 작은 나무배가 떠 있었다.
“그리고 능력 있지.”
태양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빛 차양 막 아래. 흰 피부의 신사가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기껏해야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수려한 청년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 보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세레니예에 온 것을 환영하네, 젊은 친구들. 내가 바로 세레니예 백작이자 북부 최고의 미남, 알펜 세레니예일세. 예상보다 숫자가 많군그래.”
남자의 찬란한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내 머릿속에 불신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이 남자. 설마 루 본인은 아니겠지?
강렬한 첫인상이 무색하게, 세레니예 백작은 나중을 기약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한눈에 봐도 제멋대로인 성격이란 것을 알겠어.’
일이 쉽지는 않겠는걸.
휘황찬란한 본성으로 발을 디딘 우리는 곧장 계단을 따라 올라야 했다.
“먼저 침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각자 앞의 하인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여기서 내 불신의 불씨가 한층 크게 타오를 일이 있었으니.
“나만 1층?”
모두가 2층 구석탱이 동쪽 침실로 안내받을 동안, 나만 1층으로 안내받은 것이었다.
1층은 보통 주인 부부 전용 침실만 존재하기 마련이다. 아스트로사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텐데.
“나만 1층?”
못 들은 척 앞서 걷는 몬의 귓가에 내 의문을 못 박아 주자, 어깨를 부르르 떤 몬이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백작님의 명이셨습니다. 1층에도 충분히 멋진 방이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그럼 백작님과 제일 먼 방으로 해 줘.”
“죄송합니다. 1층의 침실은 백작님의 침실과 그 건너편 여분의 침실뿐입니다.”
“백작님이랑 마주 보고 자기 싫은데.”
“죄송합니다.”
나는 결국 세레니예 백작의 침실 맞은편 방에 갇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왜? 백작이 설마 루한테서 날 감시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건가?’
그리고 갇히기 무섭게 우르르 내려온 팀원들에게 이끌려 응접실로 강제 이동했다.
응접실 테이블에는 한눈에 봐도 달콤해 보이는 훌륭한 다과들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백작님이 무척 젊으시더군요. 정원에서 뵙고 정말 깜짝 놀랐지 뭡니까?”
마음 편히 시시덕거리던 예거시가 민망하게, 세레니예 백작은 우리가 응접실에 모인 그 즉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그 정도로 놀랐나?”
화들짝 놀란 예거시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백작님.”
“내 나이 고작 열둘에 부모님을 잃었지. 불우한 사고였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이젠 두 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군.”
“그러셨군요. 어릴 적부터 가주 일을 맡으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능숙하게 식은땀을 훔친 예거시는 나를 힐끗 바라보며 새로운 주제의 운을 뗐다.
“그럼 웨더우즈 자작 부인은…… 백작님과 남매 관계인 걸까요? 나이대를 생각하니 그쪽에 가까워 보입니다만.”
그 얘기는 하지 마.
“웨더우즈 자작 부인?”
우리를 스윽 훑던 세레니예 백작이 내게서 눈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주 새삼스러운 어조로 답했다.
“아, 그 여자는 내 딸이지.”
조금 놀랐다.
그 여자라니. 굉장히 정 없는 표현이지 않은가.
“……따님이요?”
“아이를 일찍 낳았거든. 올해 내 나이가…… 아마 서른다섯쯤 되니까, 그 여자는 열다섯에 낳았겠어. 아! 걱정 말게, 예거시 군. 당시 내 아내는 스물이 넘는 나이였거든. 출산하는 데 전혀 지장 없었지.”
“그렇다면 기뻐하십시오, 백작님. 여기 웨더우즈 부인의 하녀인 데이지 양이 따님의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자. 어서 전달하세요, 데이지 양.”
그 얘기 좀 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뭐라 반응할 길이 없어 뚱하니 서 있기만 하자 예거시의 눈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슬쩍 다가온 그가 내게 속삭였다.
“데이지 양? 편지는…….”
있겠냐?
모두의 시선을 계속 받고 있기에도 부담스러워서, 적당한 변명을 찾아 거절했다.
“나중에 전달.”
물끄러미 날 쳐다보고 있던 세레니예 백작이 짧은 은발을 쓸어 넘기며 웃었다.
“데이지 양. 윗사람에게는 말을 높여야 한다네.”
그에게 한 말은 아니었지만, 얌전히 요구에 따랐다.
“나중에 전달할게요.”
“좋아, 기대하지.”
시원하게 웃은 그는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만나서 정말 반갑지만, 우리 친구들에게는 여독을 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군. 오늘은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편히 쉬게. 도시나 성을 둘러보고 싶다면 마음껏 돌아다녀도 좋아. 길만 잃지 않는다면 말일세.”
세레니예 백작이 사라진 후,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휴식을 만끽하기로 했다.
예거시와 진 그리고 드셰로는 성을 둘러보기로 했으며, 안데르트는 뭘 할지 모르겠고 나는 일단 침실로 돌아와 새로운 대책을 강구했다.
세레니예 백작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지금이라도 가짜 편지를 적어 놔야 하나.’
하지만 나는 하녀에 불과하잖아.
모리안 세레니예의 정체가 가짜든 진짜든 알 게 뭐람.
‘나는 주인의 명에 따라 머나먼 이국을 찾아온 하녀라고. 일이 잘못되면 피해자인 척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며 몬에게서 편지지와 펜을 받아 책상 앞에 앉았지만.
이내 곧 세레니예 가문의 종이로 편지를 위조하는 건 멍청한 짓이란 걸 깨닫고 낮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뜬 건 창밖으로 보슬보슬한 빗방울이 떨어지는 늦은 밤 시간대였다.
멍하니 시계를 돌아봤을 때, 시침은 숫자 9를 막 지나치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언제 차려 놨는지 모를 간단한 식사가 정갈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언제 잤지. 너무 먼 길을 와서 그런가 오랜만에 푹 잤네.’
잠결에 과일 주스를 마시는데, 은식기 아래에 꽂힌 작은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데이지 양.
깊은 잠에 드신 것 같아, 쪽지를 대신 남깁니다.
백작님께서 데이지 양을 만나고자 하십니다. 이 쪽지를 확인하시면 백작님의 집무실로 가 주십시오.
만약 집무실이 비었다면 서재에, 서재가 비었다면 뒤뜰에, 뒤뜰이 비었다면 중정에, 중정이 비었다면 운하에 배가 떠 있지는 않은지 확인…….』
그냥 대놓고 성 전체를 뒤져 보라고 해라.
결국 편지 작성은 포기한 채 입에 빵을 구겨 넣고 성을 돌아다녔다.
투둑투둑.
비 내리는 세레니예 성은 운치가 있었다.
나는 세레니예 백작의 침실부터 서재까지 쉬지 않고 뒤지다가 후원으로까지 발을 딛게 됐다.
남자는 그곳에 있었다. 중정.
육각 지붕 아래에 앉아서 물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모습이 소름 끼치게 정적이었다. 죽은 건가 싶을 정도로.
‘……음.’
하필 날씨도 우중충하고 시야도 어두워서 그가 앉아 있는 광경은 유독 더 기묘한 기운을 풍겼다.
나는 유령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렇게 중정 내부로 들어서기 직전.
“우리 데이지 양은 기척을 죽이는 데 아주 뛰어난 재주가 있는가 보군.”
남자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웃었다.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 맞았다. 한시름 놨어.
‘그렇다고 내 기척을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이 남자도 역시 예사 인물은 아니다.
세레니예 백작은 팔을 뒤로 걸친 채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턱짓했다.
“아스트로사는 어떤가?”
무난한 질문이었고 나도 무난하게 대답했다.
“멋진 나라 같아요.”
“그래? 내 성에 도착한 후 7시간 내내 잠만 잔 것으로 아는데. 꿈속에서 좋은 인상이 박힌 모양이야.”
비꼬는 건가.
“자, 이제 내 딸의 편지를 주게. 사랑스러운 모리안이 무슨 소식을 적어 놨을지 궁금하군.”
내 앞으로 내민 커다란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참 예쁜 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이런 손을 가지기 힘든데.
이렇게 예쁜 손을 가진 남자는 내가 아는 남자 중 한 명밖에 없었다.
세레니예 백작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내 손이 그렇게 마음에 드나? 실컷 구경하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