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95)

81화

아스트로사 왕국을 향하는 길은 고되었다.

일단 이 빌어먹을 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도시와 한 개의 왕국을 추가로 거쳐야만 했는데, 비행장을 거칠 때마다 기장이 바뀌고 정제석을 새로 채우는 탓에 시간이 지연됐다.

아스트로사 도착까지 예정되는 시간은 대략 45시간.

“이틀 차 점심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다행히 식사는 기내에서 따로 줬다.

개밥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루가 간절히 보고 싶어지는 그런 밥.

게다가 소형 비행선 특유의 이착륙 소음은 어찌나 끔찍하던지. 고막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 외 화장실 문제.

잠자리 문제.

객실 진상 손님 문제.

문제의 문제 등등.

마도 전쟁에서의 경험으로 웬만한 불편함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매번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 아스트로사에 가는 거?”

내 질문에 예거시가 능숙하게 귀마개를 빼며 대답했다.

“많이 고되죠? 하하. 어쩔 수 없어요. 북대륙의 왕국들은 연합교국인이 아니면 입국 허가도 거의 안 내려 줄뿐더러, 그런 의미에서 손님이 없으니 가려는 비행선도, 기장도 없거든요. 이 비행길도 아버지가 투자해서 겨우 만든 겁니다. 언젠가 더 편해지길 바랄 뿐이죠.”

“아스트로사에는 얼마나 자주 가?”

“계절마다 한 번씩은 가는 것 같네요.”

너 진짜 북대륙에 진심이구나.

예거시의 열정에 감탄하는 와중에도 비행선은 계속 날았고, 밤하늘을 건너 저 멀리 만년설이 보이는 땅에 도착했다.

생에 첫 아스트로사 왕국 방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도착하기 무섭게 입국을 거부당했다.

“예? 그럴 수가! 대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이미 보름 전에 새로운 동행인의 입국 허락을 확인받았습니다. 여기 확인서도 있다고요!”

예거시의 흥분을 가라앉힌 통역사가 다시금 출입국 관리인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입국 절차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죠?”

진의 질문에는 제 몸통만 한 짐 가방을 한 아름 멘 드셰로가 대신 대답했다.

“북대륙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입국 허가가 내려지고 반나절도 안 되어서 말이 번복되기도 하지요.”

“왜 이렇게 폐쇄적인 걸까요?”

“50년 전 성회교 선교사들의 밀입국이 극성이었는데, 그중 일부가 마약을 뿌려서 로궤를 무너뜨리려 했다가 걸렸습니다. 이후 제국민에 대한 이미지가 땅에 처박혔죠.”

그런 일이 있었구나.

우리 셋이 시원한 바람이 부는 비행장 한가운데 오도카니 서 있는 동안(안데르트는 예거시의 부탁을 무시하고 비행장을 쏘다니고 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예거시가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저를 제외한 분들의 입국이 거절되어서 잠시 대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 참. 이래서 아스트로사는……!”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드셰로 님? 하하. 조금만 기다리시면 다 해결됩니다.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에요.”

퀭한 눈으로 고개를 내저은 예거시가 저 혼자 비행장을 나서는 금발 머리 청년을 가리켰다.

“저 통역사 친구가 아스트로사인입니다. 여기서 1시간 거리에 아스트로사의 수도가 있는데, 우리 회사 쪽 사람들과 각종 행정 문제를 대신 처리해 주시는 분이 수도에 계시거든요. 그분께 따로 요청 드릴 예정입니다.”

수도에 가는 데까지만 1시간? 그럼 최소 2~3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잖아. 기다리다 죽겠네.

‘루가 사는 나라는 발 들이미는 일부터가 문제구나.’

짐을 내려놓고 땅에 주저앉았다.

아스트로사는 시원하다. 북쪽이라 그런지 같은 여름이어도 후덥지근한 느낌이 없었고 불어오는 바람이 불쾌하지도 않았다.

이런 공기라면 잠깐 잘 수는 있겠어.

“예거시 군의 뒤를 봐주시는 분이 있는 것 같은데.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벨보아 자작님이십니다. 그분 귀에 들어가면 금방 입국 허락이 내려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엔 돌아가도 된다던 드셰로도 막상 아스트로사에 도착하자 이런저런 흥미가 생긴 것 같다.

그는 예거시를 벗겨 먹을 기세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캐물었다.

나도 그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집중이 흐트러졌다.

이야기가 지루해서는 아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내 귀에 소통 불가 외국어가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착각이 아니야.’

비행장을 지나치는 이들은 분명 제국인이 아닌 아스트로사인들이다.

아스트로사인은 북대륙어를 사용해야 하는데, 아니, 분명 사용하고 있는데도, 내 귀에는 완벽하게 해석되어 들렸다.

마치 북대륙어가 내 모국어인 것처럼.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북대륙어를 배운 적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설마 내가 미쳤나?’

아니면 영혼이 깨져서 외국어 알아듣는 능력이 생긴 거야?

‘그럴 리 없지. 아무래도 마법 같은데…… 루가 내게 마법을 걸고 간 건가.’

아니면.

나는 귀 쪽을 더듬었다. 루가 놓고 간 마도구 귀걸이가 느껴진다.

검으로써의 기능만 있는 줄 알았는데 번역 기능도 있었던 걸까. 역시 그럴 확률이 높겠지.

‘뭐 하자는 거야, 대체.’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나셨어, 그래. 북대륙으로 안 쫓아왔으면 엄청 실망했을 게 눈에 훤했다.

그때였다.

통역사와 말다툼하던 출입국 관리인 서넛이 다급하게 뛰어오는 게 보였다.

우리 앞에서 멈춰 선 그들은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귀빈 여러분. 저희 대처가 미숙했습니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급격한 태도 변화.

예거시의 뒤를 봐준다는 벨보아 자작이 벌써 온 것일까?

고개를 들자 출입국 관리인들의 뒤편으로 키 큰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한 스리피스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는 근사한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신사였다.

그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자 출입국 관리인들이 부리나케 사라졌다.

예거시는 피로가 다 사라진 눈으로 남자를 맞이했다.

“하하! 하마터면 이 비행장에서 날을 새울 뻔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빨리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벨보아 자작님께서 보내신 분 맞으시지요? 제가 예거시 파뉼라입니다.”

예거시는 자연스럽게 제국어를 입에 담았고, 남자도 자연스럽게 제국어로 대답했다.

“벨보아 자작님은 좋은 분이시죠. 하지만 전 벨보아 가문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어디서 오신 겁니까?”

싱긋 웃은 남자는 중절모를 벗으며 세련된 몸짓으로 고개를 숙였다.

“신사 숙녀 여러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세레니예 백작님의 수행인인 몬이라고 합니다. 백작님의 명을 받아, 여러분을 세레니예로 모시기 위해 마중 나왔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눈치를 보니 예거시와 남자는 서로 아예 모르는 관계인 듯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세레니예 백작가. 어쩐지 낯익은 이름인데.’

세레니예, 세레니예…….

“오, 이런. 세레니예라니? 웨더우즈 자작 부인의 친정 아닙니까? 이런 인연이라니요!”

잠깐.

‘웨더우즈 자작 부인? 모리안 세레니예? 그 세레니예였어?’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데이지 양도 몰랐던 사실입니까? 보아하니 자작 부인께서 데이지 양이 많이 걱정되어 세레니예 가문에 미리 언질을 주신 모양이군요.”

알았겠냐?

애초 자작 부인은 존재하지도 않은데! 거짓말로 꾸민 신분의 실제 관련인이 마중 나오리라고 누가 알겠냐고!

‘위기다.’

속된 말로는 재수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위기였다.

어떻게 마중 나온 거지? 루가 세레니예 가문을 몰래 사칭한 것 아니었어? 의문의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의문 끝에 나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

“하하하! 데이지 양도 깜짝 놀란 것 같네요. 몬 씨, 그럼 저는 일단 벨보아 자작님께 인사를 드린 후 세레니예로 찾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 쪽에서 벨보아 자작님께 연락드릴 예정이니, 세레니예에서 편히 쉬신 후 이동하셔도 될 듯합니다.”

“하지만…….”

“세레니예 백작님을 뵙는 건 아스트로사 국왕 폐하를 뵙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지요. 예거시 파뉼라 씨가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하하. 그럼…… 그렇게 할까요?”

부와 명예에 약한 녀석 같으니라고.

예거시는 몬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 세레니예행을 택했다.

“그럼 다섯 분, 저를 따라오십시오.”

나는 곱게 쫓아가는 예거시를 말리려다 말았다.

문득 몬이라는 남자가 우리를 마중 나온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계획된 것처럼.

계획이라. 설마 이거.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선배님? 저번에는 자작 부인이 루 님이라고…….”

가능한 일이냐고?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가능한 수가 딱 한 경우 존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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