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195)

77화

“왜?”

“지금 왜 안 되냐고 물었나요?”

이후 그녀는 장장 20분 동안 ‘진을 데려가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일장 연설을 펼쳤다.

내로라하는 검사인 진이 파랗게 죽은 얼굴로 눈만 껌뻑일 정도이니, 가히 펜 로타 제국 최고의 잔소리꾼이라 할 수 있었다.

“……요약하면 한마디로 웨더우즈 저택의 일손이 없어지니 안 된다는 뜻이잖아?”

“그게 가장 중요합니다.”

“일꾼은 걱정하지 마, 하녀장. 우리의 빈자리를 채워 줄 뛰어난 대체 자원을 데려왔으니까.”

위풍당당하게 정원 의자에서 일어서자, 화단에 물을 뿌리던 하녀장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대체 자원이라니, 무슨…….”

대답 대신 저택의 현관문을 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둔 비밀 인력.

내가 준비한 웨더우즈의 대체 일손은.

“여어, 안녕하신가?”

바로 산적 하녀다.

산적 하녀.

그 비범한 자태에, 하녀장이 손에 쥐고 있던 물뿌리개가 힘없이 추락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저 표정.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어때? 하녀장이 그토록 바라 온 완벽한 하녀를 만난 기분이.”

“거 참 X팔린 소릴 다 하쇼.”

나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는 산적 하녀 옆에 서서 그…… 아니, 그녀…… 아니, 그의 장점을 여실히 소개했다.

“이 튼실한 근육. 장담하는데 맨몸으로 마차도 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민첩성. 감자 깎는 데 최적화되어 있지. 세 번째로 지구력. 30분 동안 쉬지 않고 기름걸레질을 할 수 있어.”

“별일 아니여.”

하녀장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리고 마지막. 요즘 웨더우즈 저택의 보안 상태가 흉흉하잖아? 이런 용모의 하녀가 떡 버티고 있으면 그 누구도 쉽게 발을 딛지 못할 거야. 추가로.”

나는 정원 테이블에 딱 붙은 채 1시간 내내 제작하고 있던 나무 팻말을 들었다.

『하녀 조심』

“문에 주의 문구를 달아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철저함까지! 덤으로 하인 한 명도 더 붙여 주겠다. 그럼 나와 진의 두 배로 쓸 만해.”

이들에게 나와 진 몫의 일거리를 충분히 맡길 수 있다, 이 말이야.

‘물론 전부 루 씨의 인력이지만.’

어쩌겠는가? 이 일꾼들의 주인인 루 씨는 집을 비웠고, 덕분에 일꾼들은 길바닥에 내쫓길 형편이다.

내가 몸소 북대륙으로 올라가 주인을 데려올 예정인 만큼 일꾼들도 일손을 보탤 의무가 있었다.

“잘 부탁드리겠구만.”

“추가로 우리 조직원들에게 부탁해서 정기적으로 이 근방을 순찰하라 해 놓을 테니까. 걱정 금물.”

그리고 나는 하녀장의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하녀.

‘하녀장은 노예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튼튼한 노예를.

“……하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겠네요.”

저것 봐. 내 말 맞지?

“하지만! 여행 자금은 안 돼요. 일전에 귀족회 지원금에서 구멍이 많이 났어요. 돈은 당신들이 알아서 구하도록 하세요. 대신 살인, 협박, 납치는 절대 금지인 줄 알고!”

“우우. 쪼잔해.”

“모두 해산! 거기 산……적 하녀 씨는 잠깐 날 따라오세요.”

“후후, 가세.”

좋아. 이것으로 큰 산은 하나 넘었다.

‘남은 건 여행 자금인데.’

……역시 협박과 납치밖에 없나?

식재료를 빼 오기 위해 루의 저택으로 향하려던 순간. 이제 막 문을 밀고 들어가려던 내 발목을 붙잡는 이가 있었으니.

“이봐, 검귀.”

내 동생이자 어깨에 칼빵을 남긴 적수.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자이자 가로쉬인 남자.

“나한테 시간 좀 내 봐.”

바로, 안데르트의 방문이었다.

* * *

안데르트가 찾아왔다.

‘역시 꿈이 아니었어.’

저 싸가지 스튜 말아먹은 목소리와 어투는 내가 아는 한 안데르트밖에 없다.

뼈에 각인되었기에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조금 새삼스러웠다.

‘가까이에서 보니 내가 기억하던 얼굴과 많이 다르네.’

어째서 그가 가로쉬로서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뒤집어 쓰고 있던 안데르트의 껍질과 실제 안데르트의 모습은 이목구비의 조화만 조금 유사했을 뿐, 인상 전반을 지배하는 눈빛과 그 눈빛을 기반으로 한 분위기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더 싸가지 없어졌어.’

장하다, 이 녀석아.

장의사라도 된 양 검은색 긴 챙 모자를 눌러쓴 동생을 처음 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단출했다.

재회의 기쁨?

아니.

“개자식.”

“……뭐?”

난 동생 새끼의 멱살을 잡고 14년의 한을 분출했다.

“너 때문에 내가 그 텅 빈 섬에서 조개처럼 구르고…… 목숨까지 걸고!”

“뭐라는 거야?”

황당한 눈으로 날 훑던 그는 이내 곧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래된 검귀는 검이 없어도 미칠 수 있는 건가? 새롭네. 근데 이제 좀 놓지?”

안데르트가 띠거운 목소리로 내 손을 떨쳐 내려던 때였다.

스릉. 낮게 우는 쇠붙이 소리와 함께 익숙한 은발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웨더우즈 가문의 집사이자 내 가르침을 받는 첫 제자. 진이었다.

“미친개. 선배님께 무슨 일로 찾아온 겁니까?”

……미친개? 안데르트의 별칭인가? 이해 완료.

공격적이기 그지없는 얼굴과 태도에 안데르트의 표정 역시 싸늘하게 굳었다.

“배알도 없는 놈. 그 꼴은 또 뭐냐? 버클리그레이튼에서 도망쳐 나와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고 들었는데. 웨더우즈 부인의 하인이 됐나 보지? 못 본 사이 사내자식이 다 됐군.”

“당신이 알 바 아닙니다. 햇빛 알레르기 때문에 검은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은 꼴이야말로 참 미친개답군요. 용건이 있으시다면 곱게 밝힌 후 꺼지십시오.”

“개는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주인 지키느라 아주 바빠 보이셔서 말이지. 하인이 아니라 개로 고용된 거냐? 응?”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둘이 되게 즐거워 보이네.

‘하긴 굳이 따지자면 저 둘은 이복형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게 되면 진도 내 이복형제가 되는 건가? 우와 그건 너무 싫은걸.

나는 기쁨의 대화를 나누는 두 형제를 놔두고 저택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마침 웨더우즈 저택에 우체부가 도착했다. 내 얼굴을 알아본 소년이 가방을 뒤적이며 편지 한 장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데이지 씨! 웨더우즈 자작님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어디서 온 거야?”

“음…… 파뉼라의 예거시 씨로부터 도착한 편지네요. 자작님께 전해 주세요. 그럼 전 이만!”

예거시? 누구였더라?

‘아, 맞아. 귀족회에서 만났던 신문사 차남.’

잊지 않고 편지를 보냈네.

반가운 마음으로 편지를 뜯자, 원숭이를 본 개처럼 안데르트의 얼굴에 대고 왈왈 짖던 진이 깜짝 놀라 나를 돌아봤다.

“선배님? 자작님의 편지를 그렇게 함부로 뜯으면…….”

“돼.”

『친애하는 친구, 웨더우즈 자작에게.

날이 눈에 띄게 더워지는 한여름에 너에게 편지를…….』

인사가 길다. 생략하고 본문부터 확인했다.

『……그래서 이번에 북대륙연합교국 소속 국가 중 한 곳인 아스트로사 왕국으로 떠나게 됐어.

물론 아스트로사 왕국이라고 하니, 바로 네 아리따운 부인이 떠올랐지! 제아무리 고향이라 한들 머나먼 국가이니 소식만 겨우 오고 갈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번 기회에 내가 자작 부인을 아스트로사 왕국으로 짧게 모셔다드리면 어떨까 해.

너도 함께 간다면 최고겠지만 한 가문의 수장이니만큼…….』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진.”

“예?”

“찾았다. 우리 돈줄.”

“……돈줄 말입니까?”

그래, 우리를 로궤로 데려다줄 귀중한 돈줄 말이야.

의아한 눈을 한 진의 뒤에서 챙 모자 장의사가 신경질을 부렸다.

“그래서 시간은 언제 내는 건데? 이 빌어먹을 검귀들아.”

나는 손님이랍시고 찾아온 동생과 멀뚱멀뚱 선 진을 데리고 루의 저택으로 들어갔다(하녀장에게 식재료뿐만 아니라 잡화도 수거해 오겠다고 거짓말 쳤다).

진은 귀족회에서 만난 예거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편지를 짧게 보여 주자, 어떤 기회를 잡아야 하는지 곧장 이해하면서도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그런데 예거시 님이 저희의 동행을 허락해 주실까요?”

“응. 그는 웨더우즈 자작 부인이 북대륙 출신인 걸 알고 있어. 자작 부인 대리 자격으로 가게 되었다고 적당히 거짓말 치면 돼.”

“제 말은, 이렇게 저희 마음대로 결정해도 되냐는 겁니다. 자작 부인의 허락을 받아야 할 텐데요.”

……아, 맞아.

‘얘 내가 웨더우즈 자작인 거 모르지.’

귀찮게 됐네. 진은 무데뽀면서도 은근 신중한 성격이라 일일이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나중에 피곤해질 수도 있었다.

대충 허락받을 수 있다고 둘러대야 하나? 하지만 하루 이틀 함께 지내다 나갈 인물도 아닌데.

어쩐다.

“……진. 검성과 나눈 맹세, 혹시 웨더우즈 가문의 기밀을 누설하는 맹세야? 혹은 그것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던가.”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진이 단호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영혼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검성께서는 그런 비열한 맹세를 제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 그럼 귀 좀 줘 봐.”

나는 진의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웨더우즈 자작이야.”

“예?”

“자작 부인은 루였고.”

“……예?”

“대충 그렇게 알고 있어.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면 나 화낸다. 명심해.”

“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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