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95)

76화

루 없이 웨더우즈로 돌아온 첫날.

나는 하녀장에게 혼났다.

“또 어떤 위험한 일에 휘말렸던 거죠? 얌전히 편지만 전달하다 하루 푹 쉬고 돌아오라 했건만. 이번에는 다쳐 오기까지 했군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루 씨가 우리를 배신했어. 앞으로는 하녀장이 요리를 해야 한다.”

“……그건 좀 심각한 사안 같군요. 자세히 말해 보세요.”

자세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내 과거를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실 관계를 적당히 조합해 그럴싸한 거짓말을 만들었다.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이 우리 가문의 달걀을 노린단 사실을 알게 되었어. 루 씨는 공작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야.”

“뭐라고요? 더 자세히 말해 보세요.”

더 자세히는 좀…….

대충 말리콥스의 조언으로 알아냈다고 퉁쳤다.

내 말은 몰라도 말리콥스의 말은 신뢰하는지, 하녀장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웨더우즈가 위험해지겠군요.”

“그렇지.”

“……웨스트윈트리에서 듣고 왔겠지만, 웨더우즈 가문은 전 주인님의 절친한 친우셨던 말리콥스 님의 도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알아.”

“며칠 전 ‘알’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말이에요. 말리콥스 님께 제가 모르는 웨더우즈의 진실을 여쭈었었어요. 그분이 답하시기를 ‘알’은 후계자가 아닌 전 주인님의 유품이며,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위장시킨 거라더군요. 후계자라는 유언 자체가 거짓이었던 거죠.”

역시 그랬던 건가.

“저 기괴한 알을 보호해야 하는 명백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게 주어진 임무가 그것이라면 불만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데이지 양도 부디 잘 부탁드려요.”

나는 엄지를 펴며 긍정했다.

“물론.”

웨더우즈에서 보내는 늦여름의 밤.

침대에 홀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면, 루와 퀸 섬에서 보낸 시간이 안개처럼 흐릿하게 떠오르곤 했다.

곰곰이 대조해 보면 14년 전의 루와 지금의 루는 많은 점이 다르면서 똑같았다.

‘그때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공주님이었는데 지금은 요리는 기본에 외곽에서 식재료까지 공수해 오고…….’

다만 어딘가 싸늘하게 웃는 모양새는 그대로였다. 뻔뻔한 점도. 대단한 마법사인 점도.

‘처음 만났을 때는 사람이 더 부드럽고 장난스러웠었나? 장난기야 여전하지만 지금은 예민하고 까칠한 것 같은데.’

혹시 지금이 2차 사춘기 시기인가. 179세쯤 되면 사춘기를 두 번 겪을 만하지.

‘만나서 빨리 한 소리 하고 싶다…….’

그를 생각하면 새벽이 그래도 조금은 빨리 지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루는 내가 죽었을 때 정말 절벽에 묻어 주려 했을까?

루 없이 웨더우즈로 돌아온 둘째 날.

나는 루의 저택을 불법 점거했다.

간단한 점심 후 주어진 휴식 시간. 저택에 소리 없이 침입한 나를 가장 먼저 반긴 이는.

“후후. 어서 오쇼. 이리 앉아서 기다리면 차를 내오겠소.”

하녀복을 걸친 산적…… 아니, 베리드 렛의 일원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나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받고 말았다.

턱을 전부 덮고도 남는 구불구불한 수염.

수염 가운데 앙증맞은 리본.

우락부락한 어깨 근육과 다리 근육.

터질 듯 부푼 형태의 하녀복까지!

난데없이 공격적인 자태에 자칫하면 정신이 혼미해질 뻔했으나, 뒤늦게 등장한 집사 암살자에 의해 힘겹게 이성을 되찾았다.

“너 지금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집사 암살자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요구대로 하녀로 전직시켰다만.”

“하녀는 저렇게 웃지 않아.”

“그게 의문이었던 건가? 나도 안다. 하지만 내가 가르친 게 아니야. 그보다 베리드 렛의 정보를 얻었다.”

산적 하녀에게서 얻어 낸 정보일 게 분명했다.

“음.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미드윈트리를 다시 떠나야 하거든. 집 나간 네 주인님을 데려와야 해서 내가 아주 바빠.”

“그런가? 중요한 일이군. 알겠다.”

“진과의 일은 잘 처리했어?”

“그 여자는 아는 게 아무도 없다. 집사로서의 소양도 완전히 꽝이었지. 배울 게 많아 보였어.”

고개를 끄덕이는 나와 눈을 맞추며, 집사 암살자가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쪽이 알지 못할 주인님의 비밀 정보를 습득했다.”

왜일까. 별로 기대가 안 되네. 나는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뭔데?”

“주인님은…… 검사다.”

그러냐.

“그것도 아주 훌륭한 검사다. 뛰어난 마법사인데 검사이기까지 한 무인은 몹시 드물어. 내 생각에 주인님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거물일 듯하다.”

그러겠지.

로궤의 칼레파니까.

나는 쓸 만한 정보를 가져왔으니 당장 빚을 청산해 달라는 집사 암살자의 요구를 깡그리 무시했다.

‘한집에서 지내면서 루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다니까.’

다른 말로는, 루가 그만큼 자신에 대해 잘 숨겨 왔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루 없이 웨더우즈로 돌아온 셋째 날.

이틀간의 길고 길었던 고심 끝에 나는 새로운 계획을 수립했다.

“루 씨를 데리고 와야겠어, 하녀장.”

묽은 감자 수프를 퍼마시던 하녀장과 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데리고 오다니. 어디로 떠났는지 알고 있는 건가요?”

“응. 북대륙연합교국으로 갔어. 그러니까 여행 자금 좀 줘.”

자금이라는 단어에 하녀장의 표정이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제 발로 떠난 이를 굳이 끌고 와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요리사는 새로 구하면 됩니다. 돈이 조금 들겠지만요.”

“안 돼. 음식 따위야 적당히 주워 먹으면 되지만, 돈을 아무리 퍼부어도 루 씨 수준의 마법사는 절대 못 구할 거야. 그가 없으면 웨더우즈 가문을 지키기 힘들어.”

“당신이 있잖아요.”

지금 잡일꾼 하녀에게 저택 경비까지 맡기겠다는 것인가? 끔찍한 심보 같으니라고!

“하녀장은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만, 루는 웨더우즈를 감시하던 암살자들도 찾아냈어. 난 그 정도로 섬세하지 못하거든.”

하녀장이 조금 놀란 눈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런 일이 있었나요?”

“루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전 후계자이자 뛰어난 검사인 진이 가장 잘 알걸? 그렇지, 진?”

진은 갑작스러운 지목에 조금 놀라다가도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공작님께서 웨더우즈 가문을 노리는 게 사실이라면…….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루 님의 전력이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잠깐만요. 왜 다들 우리가 버클리그레이튼 가문과 물리적인 전쟁을 치를 거라 생각하는 거죠?”

“실제로 그가 계속 사람을 보내고 있으니까.”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하녀장이 관자놀이를 꾸욱 문지르며 손을 내저었다.

“……이건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할 문제 같네요. 일단 다들 식사부터 끝내죠. 오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요.”

그날 일과가 전부 끝난 저녁 시각.

진이 내 침실을 찾아왔다.

“선배님.”

나는 한층 더 집사다워진 그녀를 훑어보다가 만족스럽게 훈련 상황을 확인했다.

“내가 내 준 숙제는?”

일주일 동안 밤에 아무 생각 없이 잠들 것. 검은 잡지도 말 것.

하루도 빠짐없이 지키고 있었는지 진의 표정은 자못 기세등등했다.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선배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 무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늦은 시간 찾아오게 됐습니다.”

“뭔데?”

“저도 북대륙연합교국에 데려가 주십시오.”

안 돼, 너까지 데려가면 하녀장이 길길이 날뛸 거야.

……라는 말과 함께 거절해야 하는데. 내 입술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왜?”

진은 평소답지 않게 조금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연합교국에는 제국과 전혀 다른 식의 검술을 구사하는 검사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선배님의 뒤를 따라가서 견문을 넓히고 싶습니다.”

또 그놈의 검 때문이야?

나는 내 정신세계까지 침범해 가르침을 운운하던 진의 낯짝을 떠올렸다.

[제가 신뢰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끝끝내는 선배님처럼 이겨 낼 수 있도록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거머리 같은 놈.

앞뒤 꽉 막히고 자신의 목표만 바라보는 꼴이 안데르트와 더없이 상극이다.

안데르트도 한 고집 했지. 둘이 같은 가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몰라.

[제가 신뢰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끝끝내는 선배님처럼 이겨 낼 수 있도록 가르침을 내려 주십시오.]

그만해.

[제가 신뢰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끝끝내는 선배님처럼 이겨 낼 수 있도록…….]

그만하라니까…….

[제가 신뢰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빌어먹을. 알았어, 알았다고! 가르쳐 주면 되잖아!

“그러지 뭐.”

얼떨떨한 눈의 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왜. 너무 쿨해서 놀랐어?”

“예.”

“나도 놀랐어.”

내가 이런 쓸데없는 문제를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은.

하지만 가르침이란 게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른다. 고민할 게 늘어 버렸네. 일단 진이 원하는 대로 북대륙을 구경시켜 주면 무엇이든 얻게 되겠지.

루 없이 웨더우즈로 돌아온 넷째 날.

하녀장에게 북대륙으로 진을 데려가겠다고 선전포고했다.

“안 됩니다.”

물론 바로 거절당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