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95)

75화

이후 저택 곳곳을 뒤지며 한참 동안 루를 찾았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사방을 살펴도 루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홀로 증발해 버린 것만 같았다.

“데, 데이지 님! 뭐 하시는 거예요! 안정을 취하셔야죠!”

레냐한테 혼쭐이나 당하고.

“혹시 루 씨 봤어?”

“네? 카, 칼레파는…….”

전혀 모르는 눈치라 응접실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말리콥스에게 묻기로 했다.

“할아버지. 루 씨는요? 집에서 안 보여요. 식재료라도 사러 나간 거예요?”

아니면 설마 날 버리고 먼저 웨더우즈로 돌아간 거야? 루가 그렇게 매정하지는 않겠지만 루라면 어쩐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그분은 떠났다.”

진짜 떠났구나!

“간절하다면 떠올려.”

그딴 소리를 지껄여 놓고 선수 쳐 튀었다고? 무슨 생각이지? 역시 그냥 놀리려는 생각?

“언제 웨더우즈로 간 거예요?”

“아니, 웨더우즈가 아니라 로궤로 떠나셨다.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 테지.”

……로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쉽게 납득되지 않는 주장이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에는 앞뒤 상황이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

나는 허겁지겁 달려온 레냐가 준 약물을 삼킨 후 말리콥스 건너편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왜 로궤로 돌아간 거예요? 그곳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그건 나도 알 수 없다네. 그분께 감히 연유를 여쭐 수는 없으니까.”

소심한 할아범 같으니라고.

“그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건 어떻게 확신하는데요?”

“자네를 내게 맡긴 후 웨더우즈까지 잘 부탁한다고 당부까지 하셨으니까. 저택에 들어온 암살자도 데려가신 걸 보면 로궤로 향하는 길에 잡일꾼으로 부릴 생각이시겠지. 돌아오시지 않을 거다. 그런 분위기였고, 틀림없어.”

로궤의 신도인 말리콥스가 저토록 확신할 정도면…….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왜지?’

이토록 갑자기 떠난 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아니면 단순히 그가 제멋대로여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여기저기 돌아다닌 통에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한숨 돌리는 동안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하기로 했다.

‘루는…… 과거의 내게 안데르트의 삶을 주었던 마법사.’

다만 ‘지금 이 순간을 잊는다’는 맹세로 인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놀랍게도 나는 지난 14년 동안 이 맹세에 대한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루와의 맹세가 강력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면 왜 갑자기 맹세의 효과가 깨진 걸까?’

나는 팔 안쪽을 확인했다.

루와 나눈 맹세의 흔적은 여전히 선명했다.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마법사가 아닌 나는 이런 예외적인 상황을 자의 해석할 능력이 부족했다.

하지만 말리콥스라면 알지도 몰라.

“할아버지. 혹시 경우에 따라서 맹세가 고장…… 그러니까, 오래전에 나눈 맹세가 안 먹힐 수도 있나요?”

“본인 이야기인 겐가?”

어떻게 알았대?

“음, 맞아요.”

“보통은 그럴 일이 없다. 맹세는 모든 마법 위에 존재하는 최상위 마법이니까. 절대적이란 뜻이지. 하지만 데이지 양의 경우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고 보네. 영혼이 깨진 상태니까.”

깜짝 놀랐다. 내 영혼이 깨져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우스운 건 당사자인 나보다 레냐가 더 화들짝 놀랐다는 점이었다.

“주, 주, 주인님! 그 이야기를 그렇게 가, 갑자기 하시는 건…….”

“괜찮단다, 레냐. 표정을 보니 데이지 양도 이미 아는 사실 같구나. 그렇지?”

뭐야, 레냐도 알아? 언제 소문 난 건데?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말은, 내 영혼이 깨졌기 때문에 맹세를 나눠도 효과가 덜하다는 뜻인가요?”

잠시 말을 아끼던 말리콥스는 이내 곧 무언가 다짐한 듯 나를 돌아봤다.

“이건 조금 긴 이야기가 되겠어. 레냐? 데이지 양을 위해 따뜻한 차와 요깃거리를 내와 주렴.”

“네, 네.”

말리콥스가 새 차를 내오면서까지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다채롭고 또 놀라웠다.

두 번째 심신일체의 의미.

깨진 영혼으로 인해 치유되지 못한 육체.

로궤라는 단체가 추구하던 경지와, 메피스토의 군대가 바라 온 목적까지.

하지만 그가 남긴 이야기 중 이 부분만은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메피스토의 군대에 붙잡혀 생체 실험을 당한 적 없는데. 내 영혼이 깨진 과정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어.’

내 영혼이 깨진 연유. 그 연유에 대해서는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그 순간부터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 죽음.

나는 죽었다가 되살아났다.

메피스토와의 싸움에서 공멸했으며, 죽음이 바로 내 영혼이 깨진 근원이다.

돌이켜 보면 당시 내가 무리하면서까지 메피스토 성에 숨어들어 간 것은 일종의 본능이었던 것 같다.

‘내 수명을 대가로 변신 마법이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10년이면 수명이 전부 닳고도 남았지.’

수명이 완전히 닳기 전에 어떻게든 복수를 완성하기.

다분히 나다운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깨진 영혼이 다시 붙은 건 그다음의 일이야. 죽은 나를 되살린 미지의 힘. 그 힘의 정체를 알아야 해.’

“살고 싶다고 말해 봐.”

“연극배우? 따지자면 데이지 양은 그들보다 더 간절해야 하지 않나.”

루가 넌지시 던진 말의 의미를 뒤늦게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살기를 바란다.

나를 자극시켜 14년 전의 기억을 깨운 것도 그 목적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리 여기자 루가 나를 떠난 데 더욱 깊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는 사실 떠난 게 아니라…….’

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닐까?

신비로운 땅, 로궤.

그곳으로 오라며.

“……그러고 보니, 디안 케트의 일기장은 어디 있어요?”

“칼레파 님이 챙겨 가셨다네. 안심이지.”

안심이긴 뭐가 안심이야?

개고생해서 빼 오니까 애먼 자식이 챙겨 가? 이렇게 되면 일기장을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로궤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쁜 놈. 도둑놈 자식.

“그리고 웨더우즈 하녀장에게는 데이지 양의 상태를 일러뒀다네. 내 일을 돕다가 많이 다쳤다고 전했으니, 하루 더 쉬고 가게.”

“주인님. 고작 하, 하루로 괜찮을까요? 데이지 님은 심한 상처를 입으셨는데…….”

“칼레파께서 고쳐 주시지 않았더냐? 하루면 충분해. 신의 권능이지. 신의 권능이야.”

고쳤다고?

‘어? 그러고 보니 어깨가 거의 다 나았잖아.’

치료 마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하루 만에 관통 상처를 완치시키는 건 불가능할 텐데.

‘……설마 본인 수명을 사용한 건 아니겠지?’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답답하기만 하다.

그날 나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느라 꼬박 밤을 새웠다.

루가 내 옆자리를 비웠기 때문이 아니야.

절대 아니고말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친 즉시 귀가 준비를 했다.

웨더우즈 저택에 보관된 디안 케트의 눈알에 관해서는 당장 묻지 않기로 했다. 하녀장과 나눈 맹세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말리콥스는 짐을 챙기는 내 옆에서 아닌 척 알짱거리면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그래서 하녀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는 겐가?”

“없는데요.”

“크흠. 흠. 이곳이 더는 안전하지 않은 만큼, 데이지 양을 웨더우즈로 돌려보낸 즉시 우리도 미드윈트리 이주를 준비할 예정이네. 웨더우즈 저택과 가까운 곳에 정착하겠지.”

그건 그렇다. 검성 계획을 틀어 버리다 못해 일기장을 빼앗아 오기까지 했으니.

누구누구가 다시 훔쳐 가 버렸지만.

‘그런데 로궤까지는 또 어떻게 간담.’

직접 찾아가야 일기장을 돌려받을 수 있을 텐데.

“데이지 양만 괜찮다면 레냐와 함께 내 일을 배우게 하고 싶은데. 하녀 일은 고된 데다 임금도 짤 게야. 내 밑에서 더 희소성 있고 미래지향적인 일을 배우는 건…….”

“할아버지. 로궤는 여기서 많이 멀어요?”

“하나도 안 듣고 있었군.”

하아. 짧게 한숨을 쉰 말리콥스가 등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아쉬운 마음은 이해하네만, 칼레파를 다시 만나는 건 포기하게. 그분은 원래 그런 분이야. 지나가는 인연으로 여기게나.”

싫은데.

나는 속세를 떨친 성인처럼 구는 말리콥스를 붙잡고 로궤의 정보를 수십 가지 뜯어냈다.

황실의 금고로 쳐들어간 일 때문일까? 말리콥스는 내게 아주아주 친절했다. 하긴 그런 개고생을 했는데 양심이 있어야지.

말리콥스와 나중을 기약하고 저택을 나가려는데, 날 배웅하러 나온 레냐가 웬 짐을 한 아름 챙기고 나왔다.

“뭐가 이렇게 많아?”

“주, 주인님께서 챙겨 주시는 물건들이에요! 이건 귀중품을 보관해 두는 상자고요. 여기 자물쇠도 있어요. 이 가방에는 집안일로 거칠어진 피부를 보호해 주는 화장품이랑 오일이 있고, 여기에는 손수건이랑…….”

이 정도로 친절하다고? 뭐 켕기는 거라도 있나?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 일단 다 받아 놨다. 땡잡았네.

“아, 그리고 이건…….”

레냐는 마지막으로 주머니 안에 보관해 둔 편지를 한 장 건넸다.

“주인님이 데이지 님이 궁금해할지도 모를 부분을 편지에 정리해 두셨대요. 위, 위험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다 읽은 후에는 꼭 불에 태워서 처분하셔야 해요. 아시겠죠?”

위험한 정보?

‘이건 좀 흥미로운걸.’

두 번 땡잡았네.

“응. 고마워.”

“나중에 봐요. 건강하시고요! 모, 몸에 좋은 음식 꼭 챙겨 드세요!”

나는 레냐의 활기찬 작별 인사를 뒤로하고 마차에 올랐다.

목적지는 웨스트윈트리 역사.

‘……둘이서 왔는데 돌아가는 건 나뿐이라니.’

혼자는 익숙하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왠지 조금 아쉬운걸.

루 그리고 가로쉬.

가벼운 마음으로 방문한 웨스트윈트리인데, 예상치 못한 문제들만 떠안고 돌아가게 됐다.

역시 하녀의 삶은 만만치 않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