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누군가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미친 듯이 숨을 들이켤 동안, 나는 이미 집에 도착해 있었다.
그 먼 거리를 이렇게 단숨에 도착하다니? 중간에 잠시 기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낙뢰에 노릇노릇 구워질 뻔했어. 그렇지?”
남을 꾸역꾸역 살려 내고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저런 말이다.
이 남자와 나의 인연은 아주 단단히 꼬인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를 집에 들인 첫날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죄다 엇나갈 수가 없다.
나는 토마토 스튜 캔에 담긴 빗물을 한참 삼킨 후에야 힘겹게 대꾸할 수 있었다.
“미안한데 고맙다는 말이 안 나와요.”
“그래?”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남자는 내 옆에 앉아 슬슬 웃기만 했다.
“그럼 지금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뭐야?”
“왜 나를 살렸어요?”
“바다에 빠져서.”
남의 이야기를 뱉듯 가볍기만 한 어조에, 목구멍 위로 화가 울컥 치밀었다.
“놔뒀어야죠. 난 다시 올라올 생각 없었다고요!”
“아, 이런. 그랬어? 내가 눈치가 없었네. 미안해.”
거짓말. 미안한데 그렇게 즐겁게 웃는다고?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왔다.
“왜 죽으려 해. 이렇게 젊고 귀여운데. 요리는 좀 못하지만 생선 대가리는 잘 자르고. 지붕 수리도 잘하고. 할 줄 아는 게 많잖아?”
어째서일까.
코끝이 시큰해져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침묵하자 남자가 내 턱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왜 죽으려 했냐고.”
그 순간만은 화가 나기라도 한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동생이 불쌍해요. 너무 불쌍해서 따라가려고 했어요.”
“어딜 따라가? 살아 있다며?”
“그건 내 머저리 같은 바람이었어요. 사실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희망을 못 놓아서…….”
그래서 이 섬에 남았는데.
안데르트만 돌아온다면 이런 폐허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었는데.
조금 느린 답이 들려왔다.
“나랑 같이 육지로 갈래?”
남자는 자신의 입으로 뱉어 놓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순간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층 더 짙어진 미소로 내게 제안했다.
“나랑 이 섬을 나가서 올라가자. 그게 좋겠어. 비가 지긋지긋하게 쏟아지는 낡은 섬을 떠나는 거야.”
그럴까.
이 섬을 떠날까? 이 섬을 떠난다면.
“그럼 복수할 수 있을까요?”
“……아. 복수. 중요하지.”
남자의 시선이 노란 안광을 뿌리며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 아가씨는 복수를 생각하는구나. 누구나 선택할 수 있지만, 누구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길이지. 고통스럽거든.”
“…….”
“내가 도와줄까?”
“네.”
만족스럽게 웃은 남자가 내 등을 토닥였다.
“알겠어. 일어나, 아가씨. 동생에게 작별 인사는 남기고 떠나야지. 그게 도리야.”
받아들인다고?
‘이렇게 바로?’
무슨 사기꾼도 아니고 말이야. 물론 이 남자는 처음부터 사기꾼 같았지만…….
나는 집을 나서려는 그를 따라서 엉겁결에 따라 일어서다가 물었다.
“아저씨가 날 왜 도와줘요?”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으니까.”
물론 조금도 납득되지 않는 답이었다.
“내가요? 왜요? 난 아저씨 별로 안 좋은데.”
“뒤에 덧붙인 말은 좀 충격인걸? 하지만 상관없어. 나는 아가씨처럼 간절한 사람이 좋아. 절벽에 내몰린 사람처럼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절망하지만 다시 일어서는, 그런 사람. 그래서 지금껏 지켜봐 온 거지.”
“그럼 아저씨는 내가 헛짓거리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 세상에 헛짓거리라는 건 없어.”
단호한 부정과 함께 남자는 빗속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앞서 걸었다.
대단한 현답도 아니었는데 나는 마치 기다려온 답을 얻어 낸 양 홀린 듯 그 뒤를 따라갔다.
절벽 끝에 도착한 우리는 안데르트의 돌무덤을 쌓았다.
땅에 묻히나 물고기 밥이 되나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건 똑같으니까.
사실 절벽 아래에서 본 목 없는 시체가 안데르트의 시체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안데르트가 아니라 해도 희생자에게 부디 이 돌무덤의 존재가 위로가 되었으면 했다.
“담담하네.”
그런가.
사실 담담하지 않다. 그냥 그러기 위해 노력할 뿐.
“머릿속으로 종종 상상했거든요. 동생이 죽으면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지. 어떤 식으로 복수해야 할지.”
“멋진 계획을 짰구나.”
“멋지기는요. 한심한 거지.”
“좋아, 파트너. 그렇다면 우리의 첫 번째 계획은 뭐지?”
나는 여유 넘치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내가, 안데르트가 되는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는 듯 남자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안데르트가 돼서 그 애의 원수를 죽이는 거죠.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동생도 하늘에서 편히 눈감을 수 있겠죠. 이게 내가 생각해 낸 최고의 복수예요. 그러려면 육지의 마법사부터 찾아가야겠죠?”
남자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선 조소하듯 웃었다.
“어디의 누굴 찾아가? 내가 네 마법사인데.”
“……아저씨가요? 마법사라고요?”
거짓말일까? 버려진 섬에서 헤매다 내 집에 기생하던 남자가 마법사라니 딱히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응. 그런데 우리 아가씨가 아주 어려운 주문을 하네. 타인의 삶을 사는 거, 보통 마법사들은 시도도 하지 못할 수준 높은 마법인데.”
“얼마나 어려운데요?”
“너희 나라 황실 마법사도 못 해.”
그렇게 어려워? 남자는 내가 절망에 빠지기 직전에 선수 쳐서 말을 바꿨다.
“걱정하지 마. 나는 천재거든. 못 하는 게 없어. 아가씨가 마법사 하나는 참 잘 골랐단 말이야. 운이 미치도록 좋았다고 해야 하나.”
그러시구나.
“참 대단하시네요.”
“한 가지 묻지.”
“그러세요.”
“너는 네 복수를 위해 무엇이든 바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무엇이든 바쳐야 하나요?’라고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곧 그 답이 그렇다든 아니다든, 내가 내릴 결론은 하나라는 걸 깨달았다.
“네.”
남자는 예상한 답이라는 눈빛을 품으면서도 재차 물었다.
“그 끝이 죽음이라 해도?”
“난 이미 죽었어요. 아저씨가 살려서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앞바다 바닥에 가라앉아 몸이 퉁퉁 붓고 떠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걸요.”
“……그래, 그럼 나는 아가씨를 두 번 죽이는 셈이 되겠군.”
잠시간 말이 없던 그는 무거운 눈으로 돌무덤을 바라보다가, 이내 곧 얕은 미소와 함께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네 모습을 안데르트로 바꿀 거야.”
“정말요? 가능한 거 맞죠?”
“보통 변신 마법은 고난도의 마법이라 오랫동안 유지하기 힘들어. 당장 네가 선 땅의 지하로 내려가기만 해도, 금세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지.”
“그건…….”
“물론 나는 네가 그따위 요소들로부터 방해받지 않고 일평생을 안데르트로서 살아가게 할 수 있어. 천재니까.”
그러시구나.
“참 대단하시네요.”
“다만 강력한 힘에게는 늘 그렇듯, 내 마법에도 대가가 필요해.”
“뭐죠?”
“네 수명.”
“…….”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기억.”
수명? 마법사들은 마를 통해 마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아는데. 예상 밖의 대가이지 않은가?
“……아저씨 사기꾼 아니죠?”
“사기꾼?”
내 의심을 조롱하듯 비죽이 웃은 그가 내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 순간.
화아아악.
바늘처럼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천지를 울리며 떨어지던 빗줄기는 새하얀 꽃잎으로 부상했다.
젖은 땅이 희게 물들기 시작한다. 눈에 들어오는 온 세상이 꽃 천지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맙소사.
흔들리는 꽃잎 속에서 남자가 내 귀에 속삭였다.
“어때? 아직도 사기꾼 같아?”
나는 쿵, 쿵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당신처럼 대단한 마법사가 왜 이런 불타 버린 섬에 있는 거예요?”
“말했잖아. 심장을 찾는다고.”
“그럼 아저씨와 내가 만난 게 정말 우연에 불과하다고요?”
“왜. 우연 같지가 않아?”
“우연 같지 않아요.”
정말 우연 같지 않아.
“내 앞에 아저씨가 나타난 건 운명이나 마찬가지예요. 적어도 나한테는 그래요.”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추락하는 꽃잎을 맞으며 묵묵히 나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 손을 뻗어 내 코끝에 달린 꽃잎을 털어 내 줄 뿐이었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켠 후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어차피 죽을 몸이었는데 수명 그까짓 거 못 걸 것도 없죠. 걸게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일생을 걸어도 상관없어요.”
“아가씨는 젊어서 그런가 선택에 망설임이 없네.”
“그런데 기억은 왜 걸어야 하는 거예요?”
“이 마법은 누구도 기억해서는 안 되거든.”
나는 남자의 말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명을 대가로 대단한 마법을 부린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가 조금 신경 쓰였다.
“아저씨는 괜찮은 거죠? 내 수명이 깎이는 거요.”
“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보통은 자기 자신을 걱정하지 않나? 아가씨는 역시 조금 특이해.”
‘그래서 더 귀여워 보이는 건가.’ 작게 중얼거린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쓸어내렸다.
“사실 조금 놀랐어. 나도 아가씨랑 비슷한 생각을 가졌었거든. 한창때에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목숨도 걸 수 있었지……. 이룰 수만 있다면.”
그 말은 결국엔 실패했다는 뜻인 걸까?
그렇다면 이 마법은 남자가 내게 보이는 최고의 호의나 다름없겠다. 나는 머리에 닿은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나는 복수에 성공할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일이 끝나면 우리 다시 만나요. 그리고 나를 동생의 무덤 옆에 묻어 주세요.”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내 손등을 끌어 깊게 입 맞춘 남자가 내게 답했다.
“그런 날이 오기를 빌지.”
섬을 집어삼키고 있던 먹구름이 걷힌다.
어두운 하늘 틈새로 갈라져 나온 햇빛이 절벽에 닿았다.
신의 안배처럼 찬란한 그 빛은 남자의 얼굴을 강하게 비췄고, 나는 한 폭의 신기루 같은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제야 나는 남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나는 그를 안다.
루.
남자는 루였다.
맙소사, 그래! 네가 바로 루였어!
말도 안 돼. 내가 이 기억을 잊고 있었다고? 그것도 무려 14년 동안?
아. 약속이나 한 듯 전신을 지배하던 수마가 빠져나가며 내 이성이 현실로 돌아왔다.
하녀 데이지가 눈을 뜬 것이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천지가 떠나가라 외쳤다.
“루! 이 사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