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세상은 예상치 못한 사건의 연속이라 했던가?
그날부터, 남자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 집에 빌붙었다.
해가 뜨면 함께 해변으로 나갔고 해가 질 즈음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자는.
“어제 새벽에 비바람이 불어서 왼쪽 지붕에 구멍이 났어요. 사다리 줄 테니까 올라가서 수리 좀 해 줘요.”
“할 줄 모르는데.”
“모른다고요?”
“안 해 봤어. 아니, 음. 정확히는 너무 오래전에 해 봐서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넉살 좋고 뻔뻔하기만 하지, 생각보다 훨씬 더 쓸모가 전혀 없었다.
어이가 없네. 키는 190cm를 넘는 거구 주제에 곱게 자란 공주님처럼 굴어?
“……빗물 받는 양동이는 왜 자꾸 이딴 작고 아기자기한 캔으로 바꿔 두는 거예요? 물이 넘쳐서 방 안이 더러워지잖아요.”
“그게 예쁘잖아.”
집안일과 청소도 내가 하고.
“오늘은 아저씨가 바닥에서 자요.”
“나이를 먹었더니 몸이 찌뿌둥해. 아가씨가 내려가.”
꾸역꾸역 남의 침대에서 자려고 하고!
“그만 자고 일어나. 내가 군화나 군인 인식표 좀 찾아보라고 했잖아요? 찾아봤어요?”
“응. 꿈에서.”
해변 탐색은 도와주지도 않고!
“그 생선 대가리 좀 떼서 줘요.”
“대가리를 떼라고? 너무 야만스러운 거 아니야? 난 그런 거 뗄 줄 모르는데.”
심지어 요리도 내가 해? 이 최악의 요리 솜씨로 외간 남자까지 먹여 살려야 한다고?
생선의 목을 자르던 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억울함을 못 이기고 남자에게 따졌다.
“대체 언제까지 따라다닐 거예요?”
토마토 스튜 캔에 출처 모를 풀꽃을 담던 루가 싱긋 웃었다.
“몰라.”
“왜 따라다니는 건데요?”
“좋아서?”
“왜 좋은데요?”
“그냥 좀 귀엽네.”
이 사람이 말하는 건 다 농담 같고 가짜 같다.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서 식칼을 든 채 천천히 흔들었다.
“나 좋아하지 마요. 다치기 싫으면.”
그는 두렵다는 듯 어깨를 떨며 넉살 좋게 답했다.
“아쉽군. 한집에서 잔 지 사흘이 흐른 만큼 마음을 더 열어 줄 줄 알았는데.”
“그딴 식으로 표현하지도 말고요.”
그래도 친구가 생겨서 좋은 점도 하나 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고요한 밤이 되면, 우리는 좁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었다.
내실은 없는 대화였지만 남자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지겹도록 길었던 밤이 순식간에 지나가서 좋았다.
“아저씨.”
“응.”
“퀸 섬에서 찾는 물건이 있다고 했잖아요. 뭘 찾는 거예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말하고 싶지 않은 건가. 억지로 캐물을 마음은 없었다.
사실, 사람과 이렇게 살 부대끼며 생활하는 일 자체가 내게는 몹시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모르는 수상한 데다 쓸모없는 이 남자를 쉽게 내치지 못하는 거겠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 외로웠던 것일까?
나는 퀸 섬에서 보름이 훌쩍 넘게 혼자 지냈다.
하늘에서 검은 불꽃이 폭격처럼 떨어진 후. 죽지 않고 운 좋게 살아남은 주민들은 하루아침에 난민이 되어 육지로 올라갔다.
퀸 섬에 남아 있는 건 불탄 땅, 듬성듬성 자란 풀떼기들, 폐허가 된 마을과 돌로 덮인 주민들의 무덤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
“나는 동생을 찾고 있어요.”
남자의 몸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동생의 함선이 이 근방에서 가라앉았거든요. 가장 가까운 섬이 이곳 퀸 섬인 만큼 여기저기 헤집어 보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아하. 그래서 그렇게 해변을 돌아다녔던 거구나? 상냥한 누나네. 요리는 조금 못해도.”
“요리는 원래 동생 담당이었어요. 부족한 건 어쩔 수 없어요.”
“아, 물론이지. 믿어 줄게. 걱정할 것 없어.”
“오늘은 해안가를 돌아다니는 김에 아저씨가 찾는 물건도 찾아볼게요.”
남자는 내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게 픽, 웃었다.
“역시 상냥하다니까. ……좋아, 다정한 아가씨를 상대로 입을 다물 수만은 없지. 지금부터 말할 내용은 비밀이니까 어디 가서 함부로 밝히면 안 돼.”
그러고는 귀에 주렁주렁 매달린 귀걸이 중 하나를 똑, 떼더니 내게 내밀었다.
“내가 찾는 건 이런 물건이야.”
연한 크림색의 작은 구슬. 고운 때깔.
진주였다.
“안타깝지만, 우리 섬에는 진주 같은 거 안 나요. 그런 큰 조개도 잘 없고.”
“진주처럼 보여? 달라. 그냥 조금 비슷한 색과 형태의 결정석일 뿐이지.”
“그럼 모조품인 거예요?”
자그마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심장.”
……심장이라고?
진주처럼 작고 고운 이 구슬이?
‘뭐, 심장처럼 중요하고 귀하다 그런 뜻인 건가.’
가지고 있기 미안한 기분이라 재빨리 돌려주었다.
“심장을 잃어버리면 안 되죠. 가능한 빨리 찾아내면 좋겠네요.”
남자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진주를, 아니 심장을 다시 귀에 걸었다.
다음 날은 남자가 처음으로 탐색을 도운 날이었다.
“아저씨! 이것 봐요!”
수일 만에 첫 수확이 있었다.
북부 해안가에서 바닷물에 전, 너덜너덜한 군화 한쪽을 발견한 것이다. 휴가라도 즐기듯 해안을 느긋하게 걷던 남자가 내게 물었다.
“그냥 평범한 군화처럼 보이는데. 뭔가 특별한 표식이라도?”
“평범한 군화라뇨? 이렇게 큰 군화 봤어요? 말했잖아요, 제 동생은 아저씨처럼 키가 엄청 크다고요. 이 정도 군화가 아니면 발이 절대 안 들어갈 거예요. 이 근방에서 숨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내 동생은 군인이다. 그 아이가 탄 함선은 퀸 섬과 함께 불타 가라앉았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우리 남매는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데르트의 무덤도 만들지 않았다.
그 애가 언젠가 돌아올 거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군화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가 수평선 어딘가를 응시하며 입술을 뗐다.
“네 동생이 살아 있다고 생각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 그렇지. 당연한 일이고말고. 신이 난 건 알겠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왜요?”
“비가 크게 내릴 것 같아.”
말하기 무섭게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바람이…….”
그의 말마따나 비가 크게 내릴 것 같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군화를 가슴에 안은 채 귀가했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비가 세차게 내렸다.
‘안 되는데. 분명 그 해안가 근방에 안데르트가 있을 거야.’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일 테니 한시 빨리 찾아야만 한다.
“아저씨! 나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나는 벽난로에 마른 장작을 쑤셔 넣기 바쁜 남자를 뒤로한 채 집을 뛰쳐나왔다.
한참 만에 도착한 해안가에는 어제까지만 해도 안 보였던 물건이 떠올라 있다.
군화.
나는 황급히 달려가 해변에 널브러진 군화를 확인했다. 어제 발견했던 왼발 군화와 똑같은 크기였고 심지어 오른쪽 군화였다.
‘역시 이 근방에 있는 거야.’
안데르트가 이 근방에 있어.
살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해.
흥이 잔뜩 오른 채 해안가를 탐색하다가 절벽 위까지 올랐다. 높은 곳에 오르면 아래가 더 잘 보이기 때문이다.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 틈으로 반짝이는 무언가 보였다.
목걸이였다.
저건 어쩌면…….
‘군용 인식표?’
형태를 확신한 순간 망설이지 않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촤아아악!
날카로운 파도가 창살이 되어 내 살갗을 찔렀다. 그사이 한층 높아진 파도가 격렬히 흔들리며 함께 쏟아졌다.
물살을 가로질러 헤엄쳐 한참 만에 손에 쥔 인식표에는 익숙한 이름이 정갈하게 각인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