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첫 번째 맹세의 흔적.
그 흔적은 어디서 누구와 새긴 흔적이었을까?
의문을 가진 순간. 14년간 켜켜이 쌓아 올린 깊고 어두운 심해에 갇혀 있던 과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 * *
제국 남부 군도.
그 군도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 퀸.
그날도 나는 바닷가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푸하!”
젠장. 오늘도 허탕이네.
흠뻑 젖은 옷을 대충 짠 후 해변을 가로질러 바위로 올라왔다. 던져두었던 가방을 열고 그 안에 접어 두었던 퀸 섬 지도를 펼쳤다.
‘해변, 왼쪽 바위 틈새, 그 아래…….’
빼먹은 장소가 없는지 쭈욱 확인한 후 펜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이곳, 랜드 해변에 커다란 엑스 표시를 남겼다.
‘이제까지 다섯 곳은 허탕이었으니까 이제 남은 곳은 일곱 곳 정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이미 반쯤 붉어져 있었다.
섬의 밤은 빠르다. 더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가방을 챙긴 후 먼지를 털며 이동하던 나는, 침엽수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뒤통수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또 있네, 저 남자.’
오늘로 벌써 세 번째 마주치는 얼굴이었다.
첫 번째는 서쪽 해변에서, 두 번째는 서북쪽 해변에서, 그리고 지금은 서북북 쪽 해변, 랜드 해변에서.
바보가 아닌 이상 순수한 우연으로 치부하기 힘든 인연이었다.
‘퀸 섬 주민은 아닌 것 같은데.’
입고 있는 옷도 좀 이상해 보이고. 왜 자꾸 나를 따라다니는 거지?
‘그냥 바다를 떠다니다 들어온 미친놈인가.’
세상이 미쳐 가는데, 사람도 미칠 만하지.
어쩐지 남자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다음 날도 나는 바다를 헤엄쳤다.
“푸하!”
투둑투둑.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에 얇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구름 상태와 공기의 흐름을 봐선 금세 굵어질 빗줄기였다.
‘하필 이런 이른 시간대에.’
돌아가야 하나.
새롭게 찾아온 해변은 서쪽 해변들에 비해 배로 넓어서, 이 근방을 전부 확인하는 데 최소 2~3일은 소용될 예정이었다.
한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버리면 수색이 밀릴 수밖에 없고, 그렇게 계속 밀리고 밀리게 되면…….
“아, 아니야. 우울한 생각은 여기까지.”
오기로 탐색을 이어 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더 큰일 난다.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또 그 남자가 보였다.
이상한 옷에 이상한 머리를 한 그 남자.
여느 때처럼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한나절을 허탕 칠 예정이어서 그랬을까? 내 걸음은 자연스럽게 남자 쪽으로 향했다.
투둑투둑, 작은 빗방울이 번져 가는 바위 위에 도착해 남자 옆에 털썩 주저앉고서 물었다.
“아저씨. 누군데 날 자꾸 쫓아다녀요?”
남자는 내가 말을 걸었단 사실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씰룩이다가, 입꼬리에 다소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쳤다.
“오늘은 내가 먼저 왔는데?”
“그럼 어제까지는 날 쫓아다녔다는 거 인정하는 거예요?”
“…….”
“인정하냐고요.”
“…….”
불리하니까 입 닫는 거 봐.
두 눈을 얇게 뜬 채 내 얼굴을 살피던 그가 조금 더 짙은 웃음을 지었다.
“신기해서.”
신기?
“사람 처음 봐요?”
“사람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이 섬의 유일한 거주민과 마주쳤으니 신기할 만하지?”
지극히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화법 때문일까? 내 눈에는 남자가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 이런 멀쩡한 남자가 불에 타 버려진 섬에 온 거지?
무엇이 목적일까.
아니, 목적이 있는 게 맞나? 종일 나만 구경하고 있는데?
‘수상해.’
나는 그 이상 대화를 잇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걸음을 잇는 동안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서, 시야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을 때.
“오래 걷네. 그 먼 해변들까지 잘도 총총 돌아다녔어.”
뭐야, 언제 쫓아왔어?
나는 뻔뻔한 낯짝으로 내 뒤에 바짝 선 남자를 노려봤다.
“볼일 있어요? 없으면 가세요.”
남자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집 안에 쑤욱 발을 들이밀었다.
“차갑기는. 먼저 아는 척한 건 아가씨잖아? 그 말은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뜻 아닌가?”
“아닌데요.”
“그럼 지금 해 보는 건 어때?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귀중한 기회를 주지.”
“싫은…….”
콰광!
그때였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 낙뢰를 맞은 나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퀸 섬에서는 꽤 흔히 보이는 풍경이었다.
만약 이 쓸데없이 키 큰 남자가 걷다가 낙뢰라도 맞는다면…….
그건 좀 죄책감이 클 것 같은데.
‘이 남자를 들여도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거절하면 이 남자는 비를 온전히 맞을 수밖에 없고, 지독한 감기에라도 걸린다면…….
“……들어와요.”
남자를 끌어당긴 즉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장 고철 상자 안에 보관해 두었던 나무로 벽난로 불을 붙였다. 따뜻한 온기가 퍼지자 빗물의 불쾌한 습기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었다.
너저분한 집 안을 크게 둘러본 남자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낭만적인 집이야. 자연의 숨결이 느껴져.”
“걱정 마요. 이 정도 비바람에는 쓰러지지 않으니까.”
“그래?”
등을 숙인 남자가 빗물을 받아 내고 있던 양동이 두 개를 한 번에 집어 문밖으로 쏟아 냈다. 힘 좋네.
“고마워요.”
“별말씀을.”
쏟아지는 빗물에 퀴퀴한 먼지, 가려 둔 천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벽 구멍.
이 집은 사실 우리 집이 아니다.
우리 집은 터만 남긴 채 완벽하게 타 버려서, 동네에서 그나마 멀쩡한 상태의 건물을 빌려 숙식하고 있었다.
불에 전소된 동네를 뒤져 쓸 만한 천과 생활 물품들을 챙겨 오고, 오늘 같은 날을 대비해서 항시 마른 장작을 구비해 둔다.
주식은 해산물. 아직까지는 살 만했다.
나는 검게 탄 냄비에 식수를 부으며 물었다.
“아저씨, 혹시 이 섬에 갇힌 거예요? 타고 온 배가 고장 나기라도 했어요?”
흥미로운 눈으로 집 안 곳곳을 뒤지던 남자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갇힌 건가? 찾는 물건이 있기는 해.”
“혹시 그쪽이 찾는다는 게 나라거나 그런 건 아니죠?”
“아, 그 나이대 아가씨들의 상상력이 유독 풍부하기는 하지.”
“그럼 왜 날 따라다닌 건데요?”
“그냥. 혼자는 심심하잖아.”
어처구니없는 답이었다. 간절하게 찾는 물건은 아닌가 보다.
“어느 면에서는 똑같네요. 저도 찾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이런 폐허에 홀로 남아, 다 죽어 가는 섬을 떠나지 못하는 건가?”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어깨만 으쓱였다.
오늘은 특식이다.
무려 검게 탄 잿더미 사이에서 발견한 토마토 캔 수프. 나는 데운 수프를 이 빠진 컵에 담아서 건넸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어도, 손님은 손님이니까.
“드세요.”
남자는 사양하지 않고 컵을 받았다. 이 사람 사전에는 사양이 없나 봐.
“흠. 훌륭한 대접이야. 고마워, 잘 먹을게.”
망설임 없이 수프를 들이켠 남자는 한동안 조용해졌다.
마치 굳은 것처럼. 컵의 바닥만 바라보며.
“……별로예요?”
상했나.
불 속에 여러 번 구르고 땡볕에 장시간 노출되기는 했는데.
“속 좀 비워 내고 와도 될까?”
“정말 상한 거예요? 잠깐만요, 게워 낼 양동이를…….”
“농담.”
그러고선 두 번째 입에 컵을 비워 버렸다. 열받는 놈.
나는 벽난로를 사이에 두고 빨랫줄을 길게 연결했다.
“옷은 이쪽에 걸어 두세요. 계속 입고 있으면 잘 안 마르기도 하고, 최악의 상황엔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요. 여긴 약 같은 것도 없으니 조심해야 해요.”
“지금 남녀 단둘이 있는 방에 갇힌 상황에서 나보고 옷을 벗으라고?”
“괜찮아요. 저도 벗을 거예요.”
“성희롱이야.”
뭐라는 거야? 뻔뻔하게 쳐들어와서 밥까지 얻어먹은 자식이.
하지만 성희롱까지 운운하는데 억지로 벗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두 번째 고철 상자를 열어서 검게 그을린 넉넉한 실내복을 던졌다.
“감기 걸리니까 벗어요. 벗고 그 옷 걸치고 있으세요.”
“첫 만남에 너무 적극적이라서 당혹스러워, 아가씨. 나한테 한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흔한 일이기는 한데.”
“자꾸 열받게 하면 내쫓을 거예요. 알겠어요?”
현관문을 활짝 연 채 협박하자 남자가 걸치고 있던 의복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난 그의 편의를 고려해서 집 밖으로 나가 빗물에 식기를 닦았다. 피곤했다.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 남자는 내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이불로 몸을 돌돌 만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무시하고 벽난로 앞에 서서 옷을 벗으려는 시늉을 하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벽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작지만 대충 맞긴 하네. 이것도 주워 온 옷인가?”
“그건 내 동생 옷이에요.”
“동생 키가 꽤 컸나 봐.”
“맞아요. 이 섬에서 제일 컸죠. 어릴 때는 날 땅꼬마라고 놀렸어요. 쥐어박으면 질질 짜는 주제에.”
“그래? 형제가 나란히 호기롭군. 그 동생도 이 섬에 있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마른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아, 건조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이제 살 것 같네.
밤은 이미 새벽처럼 어두웠고 몸은 언제나처럼 노곤했다.
습한 바닥에서 잠들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아, 남자를 벽 쪽으로 밀어 내고 침대의 반쪽을 차지해 누웠다.
남자가 큰 덩치를 쭈그린 채로 중얼거렸다.
“처음 본 남자를 벗긴 것으로 모자라 한 침대에서 재우기까지 해? 손님 접대가 영 별로야.”
“미안하지만 지금은 농담에 대꾸할 기운이 없어요. 오늘만 재워 주는 거니까 명심하세요.”
“상냥하셔라.”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여서 그럴까.
기분이 이상했다.
거친 빗소리를 배경 삼아 어렴풋이 잠들었을 때. 침대가 작게 삐걱이며 흔들리는 소음이 났다.
남자가 내려갔는지 침대의 기울기가 작아졌다. 그의 인기척이 낡은 목제 의자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더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은 동생을 찾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