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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65/195)

65화

강한 악력이 내 얼굴을 잡아끌자, 차디찬 냇물이 머리로 쏟아졌다.

장막 너머로 쏟아지는 은하수가 시야에 들어찼다. 그 한가운데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오른쪽 이마에서 복면 아래로까지 길게 떨어지는 상흔.

짙은 눈썹.

매서운 눈매.

그 아래는 검은 복면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결코 유순한 인상이 아닐 게 자명했다.

“……여자?”

무엇보다 남자의 눈.

가라앉은 듯하지만 형형한 그 연둣빛 눈.

“겁이 없다 싶었더니. 계집이어서 그랬나?”

그리고 조소 섞인 목소리.

모두 어디선가 경험해 본 것처럼 익숙하다. 그리고 불쾌했다.

‘어째서?’

평소 쉬이 느끼기 힘든 불쾌감이 방아쇠처럼 작용해 내 뇌리를 후려쳤다.

오랫동안 심연에 숨겨 놓았던 본능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불쾌한 것을 베어라.

하지만 나는 본능에 따르는 검귀가 아니다.

‘진정해.’

하지만 일단 살아야겠으니 오른손으로 귀에 매달린 진주를 잡아당겼다.

파지지직.

강력한 전류가 폭포를 타고 퍼져 사방을 울렸다. 왼손으로 검을 받아 들자 차가워서 더 만족스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아 왔다.

아, 그래. 이거지.

이게 검이야.

쏴아아아악!

폭포를 베었다.

뚝, 잘린 수면 틈으로 남자의 크게 뜨인 눈동자가 확대된다. 물러설 마음은 없다. 나는 그대로 남자에게 돌진했다.

캉! 끼기기긱…….

맞받아치는 남자의 검은 훌륭했다.

훌륭한 솜씨다. 훌륭한 자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아는 그는 뛰어난 검사니까.

한참 동안 뒤로 밀려나던 남자가 냇물 바닥에 두 발을 박고 선 후 가까스로 멈춰 섰다.

“너 누구냐?”

복면 위의 눈이 흥미로운 호선을 그렸다.

“여자. 왼손잡이. 유연함. 능숙함.”

“…….”

“너 같은 검사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놀랍군. 어디서 나타난 거냐?”

어째서일까? 나는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다.

이자와 검성이 연관되어 있을지,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훔쳐 간 장본인일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하나.

“네 얼굴.”

“뭐?”

“네 얼굴을 확인해야겠어. 복면 벗어.”

“별 개소리를 다 듣네.”

못 벗겠다면 벗게 만들면 된다.

검에 마를 실었다. 날에서 선뜩이는 흑색 빛이 터져 나와 수평으로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폭포 위 바위까지 솟아오른 후였다.

“흑색 검기?”

그의 의문은 연달아 터진 검기의 파공음에 가려졌다.

사방에서 물과 흙이 솟았다. 밤하늘을 수놓는 격렬한 굉음에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죽여.

검이 속삭였다.

낯선 공명.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여야 할 텐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나는 이 목소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 왔다. 마귀를 베고 메피스토의 군대를 학살해 올 때부터…….

-죽여.

몸에 활기가 돌았다. 마치 4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물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인영이 검을 휘둘렀다.

가까스로 막아 내던 내 팔이 균형을 잃고 살짝 기울어졌다. 남자는 아까와 달리 왼손으로 검을 잡고 있었다.

그는 양손잡이 검사다. 그는 왼손으로 검을 휘두를 줄 안다.

“겁도 없이 황제의 금고에 기어들어 온 목적이 뭐지?”

-베어 버려.

“누구의 사주냐.”

남자의 목소리는 내 뇌리를 헤집으며 전혀 기껍지 않은 환청을 끌어냈다.

“무슨 소리야? 전쟁이 끝나면 이 지긋지긋한 섬을 벗어나야지.”

-죽여.

“거지로 살 순 없잖아. 뭐로 먹고살지는 누나가 잘 생각해 봐. 나야 정 할 일이 없으면 군인으로라도 먹고살 수 있겠지만, 누나는 아니잖아.”

-베어 버려.

아, 시끄러워.

환청을 거둬 내기 위해 검기를 터트렸다.

쏘아진 검기를 맞고 기울어진 나무에 불이 붙었다. 머릿속에 가득 찬 열기를 입 밖으로 뱉어 내며 남자에게 물었다.

“나는 널 알아. 오래전에 죽었어. 그렇지?”

네가 살아 있을 리가 없어.

상대의 눈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미친년이었나?”

이 남자는 가짜다.

-죽여.

진짜일 수가 없어.

-죽여.

“어째 검을 든 여자 중에는 제정신이 없어. 너도 검귀냐?”

-베어 버려.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겨드랑이 아래의 빈틈이 보였다. 찌르기 위해 팔을 휘둘렀지만 닿기 직전에 몸이 멈춘다.

안 돼. 절대 베지 못한다.

멈칫하던 찰나의 순간을 읽어 낸 남자가 역으로 내 왼쪽 어깨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 순간.

‘아.’

머릿속이 마법처럼 맑아졌다.

머리와 몸을 지배하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사라지고, 더없이 선명한 통증만이 남았다.

내 어깨를 쑤셔 박은 공격이 검의 공명을 멈춘 것이다.

덕분에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안심해, 죽지는 않았어. 오른팔은 걸레짝이 됐지만.”

“끔찍하군. 상태는? 절단해야 하는 건가?”

“설마. 마귀 때문에 날아간 손가락뼈들은 잘 찾아서 주워 왔다고. 군부 마법사만 있으면 붙일 수 있을 거야.”

트랩 속에서 봤던 과거.

과거 속의 그 팔은 마귀가 망가뜨린 게 아니다.

내가 망가뜨렸다.

이유는 단 하나. 완전히 놓아 버릴 뻔한 이성을 되찾기 위해서.

‘……맞아, 정신을 놓고 검을 휘두르는 건 이런 느낌이었지. 마치 서서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

검과 깊이 동화될수록, 더 강렬한 고통만이 내 이성을 되찾아 주었다.

빌어먹을 검.

왼팔에 힘이 쭈욱 빠지면서, 새하얀 검신이 손아귀를 벗어나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턱 아래에 차가운 검날이 닿았다. 검 끝으로 내 턱을 들어 올린 남자가 탐색하듯 내 얼굴을 살폈다.

“이름이 뭐냐.”

그와 마주하는 기분이 이상하다 못해 물 위를 걷듯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검귀 상태에서 벗어나, 더 맑은 정신으로 상대하면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착각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가짜가 아니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오히려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남자는 진짜라고.

“……네 검에서는 공명이 들리지 않아.”

“뭐?”

굳은살로 부르튼 남자의 왼손을 바라봤다.

오른손도 비슷했는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두 쪽 다 열심히 수련한 흔적이었다.

“고요하고 침착하지. 훌륭한 검사의 표본이나 다름없어. 네 그 더러운 성정과 정반대의 검을 다스렸으니, 보통 뛰어난 수준이 아니구나.”

“아까부터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열심히 지껄여?”

작게 웃음이 나왔다. 거친 말투는 여전했다.

나는 이성이 돌아온 김에 그의 현재 신분을 가늠해 보았다.

보고에서 나온 이유를 물었던 걸 봐선, 일단 남자가 검성의 사람임은 자명해 보였다.

하지만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기사 중 한 명이라기에는 그 실력이 말도 안 되게 뛰어나다.

아마 진보다도 더 뛰어날 것이다. 저 나이에 저 정도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지닌 검사라면…….

“아, 그래. 네가 가로쉬인가? 검성의 가르침을 잘 받았어.”

눈을 감은 채 가볍게 목 운동을 한 남자가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죽일 순 없으니 일단 패서라도 재워 주마. 여자를 때리는 건 꺼림칙하지만. 얌전히 처맞고 잠들어.”

뭐라는 거야, 이 머저리야.

“무르네. 검귀에 남자 여자를 따져? 덩치만 컸지 아직 애 같아. 언제 클래?”

“닥쳐.”

남자가 주먹에 추진력을 싣기 위해 어깨를 크게 돌렸다.

어깨에 큰 상처를 입은 내가 얌전히 맞아 줄 거라 여긴 것일까? 어리숙한 모습에 웃음이 절로 터졌다.

그러나 웃음이 흘러나오는 와중에도 의문은 여전했다.

너,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안데르트.”

내 동생.

“어째서 나를 기억하지 못해?”

“……지금 누구를 부르는 거냐?”

남자의 주먹이 미약하게 풀렸다.

나는 그 순간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검날을 발끝으로 튕겨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왼손이 아닌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잡아, 횡으로 그어 냈다.

“큭!”

짧은 침음성과 함께 남자가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복면이 멀끔하게 잘린 흔적만 남기고 바람에 휘날려 멀어졌다.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입술과 턱이 드러나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긴 상흔이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해일처럼 밀려들어 온 갖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울컥한 심정에 숨이 막혀 버릴 듯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남자는 죽은 줄 알았던 내 동생, 안데르트였다.

‘살아 있었어.’

안데르트가 살아 있다.

이제는 가로쉬라는 이름을 가진 채로.

‘어떻게?’

아니, 이제 그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안데르트가 살아 있다.

비록 나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가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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