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4/195)

64화

[우우, 못된 안데르트!]

[황녀 전하를 차다니! 복에 겨운 녀석!]

주위에 모여 있던 이들이 어찌 그리 매정하냐며 날 몰아세웠다.

부상자로 가득한 낡은 펍에서 누구는 울고, 누구는 웃는다. 혼란의 도가니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 간극이야말로 우리가 전쟁을 버텨 내는 방식이었다.

슬퍼만 해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잃은 것이 아닌 남은 것들을 돌아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전쟁도 끝이 나겠지.

나타샤가 술에 취한 날은 귀하다며, 군인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펍에 모여 소소한 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다.

[안데르트, 주인장이 사진 찍자는데?]

나는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오른팔을 매만지며 멀거니 창밖을 바라봤다. 달이 떠 있었다.

“갑자기? 술고래 인증 사진을 남기자는 것도 아니고.”

[기사에 쓴대. 사기 증진용이라니까 그 엉망진창이 된 머리 좀 어떻게 해 봐라, 쯧.]

“이 꼴로 기사에 나면 이제는 어디 가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겠군.”

끌려가다시피 바 앞에 섰다.

한참 결혼 타령하던 나타샤도 그 순간만큼은 밝은 웃음을 띠며 내 옆에 섰다.

[이 도시 좋은 것 같아. 사람들도 좋고. 네가 다시 돌아와서 좋고…….]

“술에 취하면 원래 다 좋아 보이지.”

[매정한 안데르트. 이 매정한 놈. 우리 전쟁이 끝나면 이곳에 다시 돌아오자. 함께 꼭. 그럴 수 있지? 그치…….]

언제 도착한 건지, 술 한 잔을 단번에 삼킨 라파엘로가 내 반대편에 섰다.

[보충 부대가 도착했다, 안데르트. 사진 찍고 바로 나와.]

“그래.”

아, 다행이다. 외팔 검사로 살아가야 할 줄 알았는데.

펍의 주인과 군인들은 이런저런 논의를 하다가 8명씩 차례로 사진을 찍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한 손에는 술잔을 든 채. 사진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기겠군.

[안데르트 님! 잔을 더 높게 들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나는 주인의 요구에 맞춰 손을 더 높이.

[들지 마.]

더 높이, 들려 했으나 라파엘로에 의해 막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잔상처가 가득한 커다란 손이 내 왼팔을 붙잡고 있었다.

[들지 마, 안데르트. 거기서 더 손을 뻗지 마.]

단지 사진 한 장을 찍으려는 것뿐인데. 그의 붉은 눈은 등골이 시큰할 정도로 사나웠다.

왜 그러냐고, 무엇이 문제냐고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귀가 닫히고 시야가 어두워진다. 펍과 사람들이 녹아내렸다. 모든 감각이 수면 속에 잠겼다.

점멸하는 세상 속에서, 오직 라파엘로의 목소리만이 느리게 울려 퍼졌다.

[절대로. 손을 뻗지 마.]

다시 눈을 떴을 때.

더러운 책장을 향해 뻗어 있는 나의 왼쪽 손이 가장 먼저 보였다.

중지에서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쯤 떨어진 위쪽에 초록색 낡은 책이 한 권 튀어나와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손을 뻗었더라면 무리 없이 닿을 거리였다.

“절대로. 손을 뻗지 마.”

나는 라파엘로의 경고를 되새기며 천천히 걸음을 물렸다.

흐릿했던 정신이 단번에 맑아진다. 좁았던 시야가 빠르게 팽창하면서 내가 선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인식됐다.

‘이곳은 웨스트윈트리의 황실 보고.’

그리고 나는 아마…….

“정신 마법 트랩에 걸렸던 건가.”

아아, 그래서 옛일이 떠올랐던 거였어.

나는 숨을 고른 후 주위를 살폈다.

이전과 달리 마냥 어둡지만은 않다. 주위로 책상, 의자 따위의 가구가 널브러진 게 보였다.

‘트랩에 걸린 상태에서 여기까지 걸어왔구나.’

내가 걸린 트랩의 구조는 특이했다.

역린이나 출구와는 전혀 무관하게, 과거의 기억 일부를 끌어 올려서 추억에 젖게 하는 목적으로 보였다.

추억에 흠뻑 빠진 타깃은 자연스럽게 육체의 통제권을 잃을 테고. 트랩이 끄는 방향으로 끌려가다가 이 초록색 책을 누르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르는 순간.

덫이 발생하면서 그대로 사망했겠지.

“……피 냄새.”

아니나 다를까, 내가 멀찍이 떨어진 책장 코앞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찌꺼기와 자국이 크게 번져 있었다.

반죽처럼 뭉그러트리고 주기적으로 시체를 치우는 방식인 듯했다.

‘메피스토의 군대가 개발한 트랩을 수호용으로 개조했나 보네.’

과연 검성이 지키는 보고답다.

언뜻 보면 대단한 점이 없는 트랩이지만, 그래서 더욱 허를 찌르는 트랩이기도 했다.

추억에 빠진 채 고작 몇 걸음 이동하면 죽음이 기다린다니.

고난을 넘어오느라 지친 침입자를 처리하기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기억 속의 라파엘로는 내가 이 어둡고 음산한 보고에 갇혀 썩어 가길 바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라파엘로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고맙다, 라파엘로.’

덤으로 나타샤도.

“역시 답은 근성이야.”

근성은 정신 트랩조차 이긴다.

이후 나는 설계도 구조를 되새기며 벽을 따라 걸었다.

덫 마법이 걸린 철창 안에는 각양각색의, 너무 각양각색이라 전혀 보물로 느껴지지 않는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찮게는 잘나신 귀족 나리가 죽은 듯이 잠들어 생을 마감했다는 나무 의자부터(왜 보물인지는 모르겠다), 건국 황제의 애첩이 즐겨 사용했다는 정원 의자.(마찬가지다)

“이건 고대 성회전……에서 사용하던 발톱깎이.”

대단한 물건이네, 그래.

난해한 보물들을 지나치면 탄성이 절로 나오는 유명한 보물도 등장했다.

“레레리아 측정기.”

이게 여기 있었구나.

레레리아 측정기는 측정 타깃의 전투력을 측정할 수 있는 마도구다.

정확도가 상당하다는데, 남은 물건은 이것 하나뿐이라 보물로 취급된다.

훔쳐 갈까?

‘……참자.’

전투력 측정해서 뭐 하냐. 내가 진처럼 수련에 미친 것도 아니고.

“…….”

나는 루의 덫 해체기를 이용해 철창에 둘러진 마(魔)감지기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튼튼한 철장을 구부리고 들어가, 측정기를 훔쳐 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재밌을 것 같잖아.’

이제 남은 덫 해체기 사용 횟수는 한 번.

열성적으로 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 봐, 남은 보석은 설렁설렁 확인했다.

‘로궤교의 물건도 꽤 되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작고 아담한 철창.

내 목적지이기도 한 이 자리에 보관된 물건이 바로.

“음?”

디안 케트의 일기장!

이 있어야 하는데 왜 아무것도 없담.

철창에 얼굴을 들이밀고 샅샅이 살폈다. 역시 아무것도 없다.

‘분명 이 자리인데.’

디안 케트의 일기장에만 투명 마법을 걸었을 리는 없고.

“역시 검성이 먼저 손을 댄 건가.”

그렇다면 더는 둘러볼 필요도 없겠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남은 철창을 둘러보지 않고 곧장 절벽을 내려갔다.

설계도에 따르면 이 금고는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위층으로는 절대 올라가지 않았다.

‘이런 공간은 여러모로 오래 머물면 위험해.’

철창을 둘러보면서 느낀 게, 설계도에 기록된 보물의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었다.

어쩌면 침입자가 들어올 때마다 보물의 위치가 매번 바뀌는 구조일 수도 있었다. 지도 자체가 덫인 것이다.

‘일기장이 2층에 보관되어 있을 수 있지만…….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더 위험해질 거야.’

금고란 보통 침입자를 더 깊은 곳으로 끌어들여서, 더 확실히 짓이기려 들려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지도에 표기되어 있던 출구 방향을 따라 이동하며 다음 계획을 세웠다. 사실 다음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일단 디안 케트의 일기장은 검성에게 넘기는 쪽이 낫겠어.’

그리고 나는 검성이 훔친 일기장을 다시 훔친다.

차선책을 찾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번 계획은 실패였다.

불빛이 닿지 않는 기둥 뒤편 틈새로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를 10분.

그리고 바위틈으로 몸을 욱여넣으며 좁디좁은 틈새로 나아가기를 20분.

쏴아아아.

드디어 폭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 새벽의 태양빛을 받아, 별이 녹아내린 폭포로 걸음을 옮겼다.

저 물의 장막을 걷고 나가면 조용한 버드나무 숲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

스르릉.

쏟아지는 물을 가르고 검날이 튀어나왔다.

횡으로 눕힌 날은 내 왼쪽 귀밑과 턱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정지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내 아래턱을 찌르고 들어와 바위에 박아 버렸을 움직임이었다.

‘숫자는.’

쏴아아아.

폭포 소리에 가려 인기척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상대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오른쪽 귀를 건드렸다. 루의 마도구가 만져진다.

그 순간.

“읏.”

폭포수 너머에서 새까만 손이 뻗어 나와 내 얼굴을 그러쥐었다.

강한 악력이 내 얼굴을 잡아끌자, 차디찬 냇물이 머리로 쏟아졌다.

장막 너머로 쏟아지는 은하수가 시야에 들어찼다.

그 한가운데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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