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의문이 한데 묶여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했다.
[이번에야말로 죽은 줄 알았다.]
깊게 안심한 목소리가 내 몸을 우그러뜨릴 기세로 꽈악 안고 떨어진다.
순간, 지금 당장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극심한 통증이 오른팔을 강타했다.
“윽.”
아찔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몸을 확인했다.
넝마처럼 찢긴 제복이 검게 굳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른팔은 나무토막과 함께 붕대로 둘둘 감겨 임시로 처치된 상태다.
감긴 붕대가 워낙 두꺼워 팔의 형태를 확인하기 힘들었다. 기억에 의하면 치료가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뭉개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 그래.
‘이곳은 전쟁터였지.’
그리고 연합군은 오늘 새벽, 메피스토 군대를 상대로 대패했다.
우리는 전선에서 밀리고 밀리다가 흩어진 후 각자도생으로 도망쳤다.
그 후 나는 극비 임무를 치르던 검성의 기사단과 운 좋게 마주쳐서 급히 팔을 치료할 수 있었다.
이후 꼬박 일주일을 걸어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자리한 거점에 도착했다.
돌이켜 보니 전사 취급받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너, 그 팔은…….]
뒤늦게 내 상태를 인지한 라파엘로가 이를 악물었다.
“안심해, 죽지는 않았어. 오른팔은 걸레짝이 됐지만.”
[끔찍하군. 상태는? 절단해야 하는 건가?]
“끔찍한 소리 할래? 날아간 손가락뼈들은 잘 찾아서 주워 왔어. 군부 마법사만 있으면 붙일 수 있을 거야.”
[……운이 맞아떨어졌군. 보충 부대가 오늘 저녁 중으로 도착할 예정이다.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 건 <자애초> 덕분인가?]
“그래, 한계 이상으로 복용해서 약 효과가 떨어지는 순간 정신이 나가 버릴 예정이니까 마법사들을 한시 빨리 대령하라고.”
말없이 얼굴만 바라보던 라파엘로가 나를 이끌고 지휘관 초소로 향했다.
[안데르트!]
[이 자식, 살아 돌아왔구나!]
내 얼굴을 알아본 군인들이 여럿 달려드는 통에 조금 곤욕을 치렀지만, 나쁘지 않았다.
초소에 들어간 나는 라파엘로가 차려 준 단출한 음식물로 배를 채우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속속들이 찾아오는 이들의 인사만 열 번을 받았던 것 같다. 한데 찾아와야 할 얼굴이 하나 보이지 않는다.
“나타샤는?”
[울다 지쳐서 잠들었다.]
“……나타샤가?”
[산사태가 덮쳐서 마법사 스물이 산 채로 매장됐다. 나타샤도 거의 쓸려 갈 뻔했지만 운 좋게 살았지. 자책하더군.]
나타샤는 강하다.
나는 그녀의 정신력이 나보다도 더 견고하고 단단하다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울다 지칠 정도이니, 이번 퇴각이 얼마나 뼈아팠는지 다시 한번 실감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파엘로의 보좌관인 드셰로가 들어왔다. 내 귀환을 환영해 준 그는 라파엘로에게 무언가 속삭인 후 다시 자리를 비웠다.
라파엘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보충 부대 투입이 늦어진대?”
[……지나오는 길에 부상자가 원체 많아, 발목 잡히는 중이라더군. 재촉했으니 금방 도착할 거다.]
“됐어. 다른 사람들 목숨은 목숨이 아닌가. 치료 못 받으면 죽는 거지, 뭐. 전쟁에서 죽는 게 내 운명이었던 거야.”
‘진짜’ 안데르트도 그랬으니까.
형제가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나는 붕대 감긴 오른팔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주변의 기이한 침묵을 인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로가 의자에 기댄 채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딴 소리 지껄이면 재밌나 보지?]
“……흠. 미안. 방금 말은 취소.”
[가만 보면 너는 전쟁터에서 죽고 싶어 안달 난 녀석 같다.]
“그건 아니야. 세상에 어느 누가 전쟁터에서 죽고 싶겠어?”
[아니면 멀리 떠나 버리거나.]
제 관자놀이를 꾸욱 누른 라파엘로가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내 얼굴로 고정된 예의 그 싸늘한 눈초리는 거두지 않은 채.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야. 함께한 시간이 벌써 8년인데……. 너는 전쟁이 끝나면 정이고 뭐고 미련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으니.]
“미안.”
[먼 곳으로 떠날 건가?]
“미안하다고.”
[어디로 갈 예정이지? 서대륙의 사막 지역? 북대륙의 연합교국?]
“어이, 내가 언제 사라지겠다고 했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아예 떠나 버렸으면 좋겠냐.”
[그럼 안 떠날 건가?]
기가 막힌 기분으로 라파엘로를 쳐다봤다.
내 파트너는 다 좋은데 가끔 이상한 부분에서 집착한단 말이지.
전쟁 후.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잘 모르겠다. 어차피 나는 운 좋게 살아남더라도 너와 친구로 남지 못할 텐데.
[안 떠난다고는 말 못 하는군.]
“그런 먼 계획까지 어떻게 일일이 세워. 당장 내일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미지수인데.”
[너만 그렇게 말한다.]
“…….”
[너만 그런 식으로 말해, 안데르트. 모두가 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며, 종전 후의 평화로운 새 삶을 꿈꾸는데. 오직 너만 남 일처럼 굴지. 꼭 어디 가서 코 박고 죽어 버릴 것 처…….]
“아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징한 녀석. 난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내려갈 거야. 죽은 가족의 무덤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을 게 뻔해. 비석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으니까, 일단 비석부터 제작해야겠지.”
나는 말라비틀어진 잡초로 무성해 있을 안데르트의 무덤을 떠올렸다.
무덤 아래에 잠든 건 죽은 동생의 시체가 아닌 유품들이었다.
퀸 섬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동생의 시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이가 있다고 했나?]
“그래. 살아 있었다면 너랑 나이가 같았을 거야. 나보다 세 살 위였거든.”
[안타깝게 됐군. 살아 있었다면 전쟁 영웅을 남편으로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잠을 못 자서 돌아 버렸나.
“졸았냐? 남매라니까 그러네.”
라파엘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뻔뻔한 낯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날 말하는 거다.]
“뭐? 너? 너랑 내 누나? 미쳤냐? 내 형제가 왜 너랑 결혼을 해?”
머릿속으로 본래의 몸을 되찾은 나와 라파엘로의 결혼식이 그려졌다.
허. 다가올 리 없는 미래였지만 괜히 팔뚝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럼?]
“그럼이고 자시고 내 누나가 왜 너랑 하냐고?”
[나는 너랑 사돈이 되어도 좋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는 나로 눈에 안 차나 보지?]
지금 이게 눈에 차고 자시고 할 사안인가.
“내 누나……의 눈에는 안 찰 수도 있지.”
[뭐가? 내 얼굴이? 아니면 지위? 부?]
진심으로 궁금하니 마음 편히 답을 내려 달라는 얼굴이다.
이게 웬 자부심인가 싶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라파엘로의 위상을 떠올려 보면 마냥 우습게 여길 수도 없는 태도였다.
하기야, 승전하고 귀환하면 결혼 시장에 내다 팔릴 싱싱한 횟감이 될 몸이시니까.
라파엘로의 성격을 생각하면 미래는 뻔하다.
중앙 귀족들에게 휘둘리며 정략결혼 당하느니 믿을 만한 아군과 맺어지는 쪽을 선택할 것이었다.
이 자식. 나를 너무 신뢰하는 거 아니야? 괜히 미안하게.
[안데르트으! 어디 있어? 어디 있어!]
그때, 밖에서 애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어투는 낯선데 목소리는 낯설지 않다.
막사를 나가 사람들이 한데 모여 시끌시끌한 장소로 이동했다.
내 얼굴을 알아본 비명의 주인이 비틀비틀 뛰며 안겨 들었다.
“나타샤.”
[안데르트. 나 어떡해?]
“…….”
[어떡해? 나 어떡해? 다 뒈졌어. 내 눈앞에서 다 뒈졌다고. 전부 다 뒈졌어! 성인도 안 된 꼬맹이들까지, 전부! 다아!]
“…….”
[그러니까 너는 가면 안 돼, 안데르트.]
울다 지쳐 잔다더니. 잠이 아니라 술에 취해 있었던 건가.
술에 취할 대로 취한 나타샤는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성한 팔로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안 가.”
[너는 가지 마. 절대. 절대로 안 돼. 너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이번에야말로 너 진짜로 죽은 줄 알았어. 너라면 언젠가 멀리 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일 줄 알았다구…….]
일주일간 안 보였던 게 꽤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라파엘로도 나타샤도 비슷한 소리를 하는 걸 보면.
흐윽. 소리 내 꺼이꺼이 울던 나타샤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올리며 내게 매달렸다.
[나랑 결혼하자.]
또 이러네.
“싫어.”
[잘해 줄게……. 진짜 잘해 줄게. 떠나고 싶지 않아질 만큼 잘해 줄게.]
“잘해 줄 사람을 찾는 거면 라파엘로와 결혼하면 되겠네. 마침 그쪽도 신부를 찾는 모양이던데.”
[너 제정신……. 우, 우웨에에엑.]
“토할 정도로 싫은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