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저 화려한 보석들을 귀에 꽂은 루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만으로 눈이 부셔서 상상을 멈추기로 했다.
루가 보석 틈에서 고른 물건은 새하얀 진주 한 알과, 그 아래로 더 작은 크기의 청록색 진주가 매달린 디자인의 귀걸이였다.
루가 영롱한 녹빛의 진주를 잡아당기자 새하얀 스파크가 튀었다.
파지직.
‘깜짝이야.’
이윽고 뽑아낸 방향 그대로 기다란 백색의 검신이 뽑혔다.
작은 귀걸이에서 빼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우아하고 예리한 외형의 장검이.
쉬이익. 루는 오른손으로 검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렸다.
아주 짧은 움직임이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두 번 검을 사용해 본 솜씨가 아니야.’
심지어 익숙하다. 루는 검의 손잡이와 날의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한 후 다시 진주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게 내밀었다.
“써.”
“……내가 써도 되는 거야?”
“그래.”
빌려준다니 고맙지만, 선뜻 받아 들기 어려웠다. 너무 귀한 보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선 루가 내 뒤에 섰다.
그는 별말 없이 나의 오른쪽 귀에 마도구를 걸어 주었다. 아니, 뚫었다.
“……아!”
귓불에 느껴지는 이 홧홧한 통증.
본능적으로 거울 앞에 달려가 귀를 확인했다. 마도구가 박힌 귓불 근처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아아, 맞아. 이 몸은 귀걸이를 착용한 적이 없지.’
깜빡 잊고 있었네.
“아팠어?”
이상할 정도로 다정한 물음이었다.
“조금.”
“귀엽네.”
전혀 귀여움을 느끼지 않는 무표정으로 귀엽다고 말하는 건 신종 괴롭힘인가?
질색하며 노려보자, 루는 두 개의 마도구를 추가로 내게 빌려주었다.
하나는 어둠 속에서 길을 밝혀 줄 발광 반지. 나머지 하나는.
“덫 해체기. 사용 횟수는 두 번. 소모성 마도구니까 사용한 후 버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먼지로 변해서 흔적도 안 남아.”
“……이거 엄청 비싼 물건 아니야?”
내 오른쪽 검지에 직접 반지를 끼워 준 루가 피식 웃었다.
“데이지 파거라는 하녀가 평생 몸 바쳐 일해도 못 갚지.”
못 들은 척 시전.
이젠 못 들은 척을 못 본 척하는 경지까지 오른 루가 겨울용 머플러로 꽁꽁 싸맨 내 하관을 턱짓했다.
“그러고 가려고?”
“응, 이게 최선이야. 얼굴을 바꿔 봤자 지하로 내려가면 풀릴 테니까.”
대지는 마법 유지력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이다.
특히 변신 마법 같은 고등 마법은 그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아서, 지하로 내려가면 마법이 금세 풀리고 만다.
시전자와 함께 내려가지 않는 이상 유지시킬 방책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루와 함께 내려갈 수는 없으니까.’
루에게는 출입구 망을 보도록 할 셈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최선의 수였다.
“레냐 씨. 눈 아래를 가릴 만한 복면도 부탁해.”
이제 출발이다.
* * *
‘……간지러워.’
나는 복면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턱을 긁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세탁하지 않았으면 피부에 닿자마자 가려운 것일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꿉꿉한 냄새를 참으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 봤다.
“시원하다.”
이곳은 웨스트윈트리의 서부 끝자락.
울창한 여름 버드나무 숲 안쪽의, 은하수가 굽이굽이 흐르는 냇가.
나는 검을 오른쪽 허리춤에 찬 상태로 천천히 몸을 풀었다.
이렇게 검으로 줘 패겠다고 마음먹고 몸을 푸는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으으음!”
좋아. 몸 풀기 끝.
나는 지하에 처박혀 있는 황실의 보고로 내려가기 전. 진주 검을 뽑아 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 검을 찼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꽤 기대했는데. 아쉽네.’
기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다.
공명이란 검과 주인의 자아가 혼연일체를 이룰 때 나타나는 현상.
마도 전쟁 이후 검이라는 도구에 그 어떤 애정도, 집착도 느끼지 못하는 내가 검과 공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이마를 긁느라 살짝 올라가 있던 피에로 가면을 제대로 착용했다.
“루 씨, 거기서 잘 엄호해. 누가 들어오려고 하면 막아 줘.”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이 터졌다.
루는 검은색 잠옷 가운을 걸친 그대로 버드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다.
두꺼운 가지에 앉아 나무에 등을 기댄 모습이 마치 제집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듯 편안하다.
커다란 발에 달랑달랑 매달린 분홍색 실내화가 참으로 앙증맞아 보였다.
‘안 춥나.’
황실의 보고가 위치한 장소는 꽤 깊은 숲속이었다.
숲이 나무로 빽빽하지 않고, 보름달과 은하수가 워낙 밝아 시야를 분간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환절기 저녁 수준의 찬 공기가 솜털을 쭈뼛 서게 했다.
가지 아래에서 느긋하게 다리를 흔들던 루가 능청스레 속삭였다.
“우리 데이지 양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니 이거 어쩐다.”
“만약을 대비해서야, 만약을. 좋은 무기를 가져왔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아쉽잖아.”
“나를 도구 취급하는 건 데이지 양이 처음인데.”
“그 말도 이제 지겨워.”
“벌써 권태가 오다니.”
시답잖은 대화를 이으며 폭포 앞에 섰다.
설계도에 의하면 이 폭포 너머, 상당히 번거로운 지형을 거치고 나서야만 황실 금고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최고의 수는 금고에서 나올 때도 이 폭포로 나오는 건데.’
솔직히 가능할지 모르겠다.
출입 가능한 경로만 10개가 넘는데, 반 이상이 덫이라 아마 고생 좀 할 것 같았다.
“데이지 양. 지능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를 웨더우즈 자작이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보고에 갇혀 아사할 확률이 높아.”
“루 씨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주 잘 알겠네.”
가볍게 손을 흔드는 루를 뒤로하고 폭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쏴아아아.
물의 장막을 거두면 드러나는 좁은 바위의 틈새. 대충 봐도 숨을 쉴 수 있으면 다행으로 보인다.
복면 따위가 존재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음 좋아.”
괜한 고집 부리다가 질식사로 죽을 수는 없지. 나는 복면을 강으로 내던진 후, 바위 안쪽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40분.
호흡을 고르며 바위틈에서 길을 골랐다.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고, 대체로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었다.
중간에 방향을 잘못 틀어서 두 배의 시간이 소요됐다.
20분.
동굴수를 통해 이동했다.
꼬박 15분 넘게 잠수했으며, 중간중간 숨이 막혀 정신을 잃을 뻔했다.
천장이 워낙 낮아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손에 꼽았다. 말 그대로 어둠 속을 헤엄치는 기분.
루가 빌려 준 발광 마도구가 없었다면 폐소공포증에 걸렸을 것이다.
물이 뒤지게 차서 동사하는 줄.
그리고 마지막 10분.
동굴수에서 벗어나 입구로 향하는 절벽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
“후우.”
나는 절벽을 탔다. 과연. 황실의 보고다운 난관이다.
하지만 나는 입사 세 달 차 하녀.
맨손으로 절벽을 오르는 일쯤 별것 아니다.
‘두 번은 못 와.’
나는 보물 사냥꾼이 될 성향이 아니다.
도둑질로 인생 피느니 하녀로서 살겠다……. 오늘도 나는 하녀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되새긴다.
그렇게 중간중간 진주 검을 벽에 박고, 튼튼한 검날 위에 앉아 쉬다가 다시 암벽을 등반하기를 30분.
“후우우.”
드디어 평지가 나를 맞이했다.
대단할 것 없는 평지다.
그러나 설계도에 따르면 이 평지 깊숙한 곳 사방에 철창이 자리하고, 철창 내부마다 갖가지 보석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신전 못지않게 길고 너른 통로를 걸었다.
또옥, 또옥. 지하수 떨어지는 소리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제외하곤 오직 내 발소리만이 세상에 울렸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던가.
10분?
30분?
1시간?
아, 그래. 확실히 2시간은 넘겼던 것 같다.
그즈음 나는 내가 환각 덫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설계도에 없던 덫이다. 나름 주의 깊게 살피고 걸었다 생각했는데…….
그때.
아주 갑작스럽게도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 돌렸다. 커다란 손이 시야에 스쳐 나간다.
반사적으로 거리를 넓히고 손의 주인과 눈이 마주친 찰나의 순간.
심장이 바닥에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라파엘로?”
라파엘로.
그가 거기에 서 있었다.
땀과 피로 이마 위에 덕지덕지 엉긴 채 굳은 금발. 경직된 입술. 너른 어깨와 두꺼운 팔 근육. 그리고, 안도하는 붉은 눈동자.
[하아, 제기랄. 너. 너, 안데르트…….]
그가 나를 껴안았다. 익숙한 체향이 몸을 감싸자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라파엘로가 왜 갑자기 이 자리에? 어째서, 마도 연합군의 제복을 걸치고?
대체 어떻게…… 4년 전의 그 얼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