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많다고? 아까는 척진 사람 없다 그랬잖아.”
“떠오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저, 저도 모르게 거짓말했어요. 죄송해요.”
깜찍한 거짓말이었구나.
뭐, 말리콥스도 쓰러진 상태이니 많이 불안했겠지. 하녀의 심정을 이해해 주는 건 하녀뿐이므로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서 누가 떠올랐어?”
창가에 앉은 루 쪽을 힐긋 훔쳐본 레냐가 순순히 대답했다.
“주로 보물 사냥꾼인데……. 귀, 귀족들도 조금 있고요. 대단한 거래는 아니고, 정보를 조금 팔았을 뿐이에요. 설계도나 지도요.”
그래, 그냥 설계도도 아니고 황실의 보고 설계도 같은 물건 말이지.
“하지만 그동안은 거래처들이 보호해 줘서 주인님이 위협받을 일은 없었는데…….”
“검성, 아니, 길드 <클론>과도 거래한 적 있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나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 재차 물었다.
“디안 케트의 유물과 관련된 정보를 판 적은?”
“아니요. 요청이 들어온 적은 있지만…… 전부 거절했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한 레냐를 뒤로하고 나는 복잡해진 머릿속을 천천히 정리했다.
<클론>의 암살자가 말리콥스를 납치하기 위해 잠입했다.
<클론>은 검성이 결성한 암약 조직이다. 그러니, 말리콥스의 납치는 검성의 뜻이나 진배없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디안 케트의 유물.’
처음에는 검성이 얀센 전시관에 전시된 유물을 훔쳐 가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었다.
단순히 더 나은 때를 노리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검성은 황실의 보고를 수호하는 자.
따라서 얀센 전시관에 전시된 유물이 가짜임을 알고 있었을 테다.
‘황실의 물건에 손댈 수는 없으니. 일단 지키고 있다가 가장 나중에 훔쳐 갈 의도였겠지.’
심지어 레냐의 증언에 따르면 <클론>은 그간 말리콥스를 보호해 오지 않았던가?
한데 이토록 갑작스레 태도를 바꿨다는 뜻은…….
“레냐. 버드나무 숲 금고 말이야. 버클리그레이튼의 기사가 정기적으로 출입해?”
“네? 네. 보고 내부에는 보안 설계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버클리그레이튼의 기사가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어요.”
“그 날짜가 어제였거나 오늘이야?”
머리를 굴리던 레냐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였어요. 정확히는 오늘 새벽쯤이요.”
검성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대략적으로나마 그 윤곽이 나타났다.
“레냐. 이들은 <클론>의 암살자야.”
“크, <클론>이라고요? 그럴 리 없어요. <클론>은 우리를 보호해 주…….”
“이제는 아니야. <클론>은 검성이 숨겨 둔 사냥개들이거든. 그리고 검성은 디안 케트의 유물을 모으고 있지.”
“……네?”
“디안 케트의 일기장은 몇 시간 내로 도난당할 거고. 아, 어쩌면 이미 벌써 검성의 집에 도착했을지도 모르겠네?”
“…….”
“도난 죄를 말리콥스 할아버지에게 덮어씌우려 했을 거야. 물론 이 몸이 있어서 실패했지만.”
말리콥스는 기밀 설계도를 파는 정보 상인이다.
따라서 황실 금고의 보물이 도둑질당했을 때 용의자로 의심받기 적절했다.
<클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만큼,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함께 묶여서 이용당하다가 버려질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도난당한 일기장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결론 나겠지.
레냐는 그 인과관계를 단번에 파악했다.
“그런 야비한……!”
거친 호흡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레냐가 이 악문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대뜸. 내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박았다.
“데, 데이지 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보, 보고에 디안 케트 님의 유물을 남아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만약 남아 있다면…… 데이지 님이 회수해 주세요!”
갑자기?
“디, 디안 케트 님의 유물은 그런 식으로 떠돌아다녀야 할 물건이 아니에요. 그 물건이 어떤 물건인데…… 주, 주인님도 항상 돌려받는 순간만을 고대해 오셨단 말이에요…….”
뭐, 애초 그럴 계획이기는 했는데.
“만약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영원히 기절하게 되실지 몰라요! 하늘에서도 디, 디안 케트 님을 뵐 면목이 없다며 무척이나 괴로워하실 거예요!”
디안 케트 님을 뵐 면목?
‘오호라.’
지금이 바로 할아범과 디안 케트의 관계를 파헤칠 때다.
“음. 있잖아, 레냐. 내 귀에는 말리콥스 할아버지와 디안 케트가 마치 아는 사이처럼 들리거든.”
“예? 다, 당연하죠. 디안 케트 님은 우리 로궤의 칼레파셨는걸요.”
뭐?
“디안 케트의 다섯 가지 유물은 그, 그분이 아끼신 제자에게 남긴, 일종의 유품이에요. 일기장의 주인은 비록 수년 전 눈을 감았지만…….”
“디안 케트가 로궤의 칼레파였다고?”
이거 뒤통수가 조금, 아니, 아주 얼얼한데?
“네? 아, 네…….”
레냐는 불안한 눈으로 루를 훔쳐봤다.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초조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레냐의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며 물었다.
“레냐. 유물이 제자에게 남긴 유품이란 말은, 전 웨더우즈 자작이 디안 케트의 제자였다는 거야?”
“모르……셨어요? 저, 저는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알겠냐? 세 달 전에 입사한 하녀가 알겠냐고?
확신컨대 나뿐만이 아니라 하녀장조차 모를 것이다.
하녀장은 자신이 따르던 주인의 정체가 마도구였단 사실을 알고서 기절할 뻔했으니까!
“레냐, 그러면.”
나는 흥분된 심정을 가라앉히며 그녀에게 물었다.
“디안 케트의 다른 제자들은 누구야?”
“아. 다른 제자분들은…….”
“그만.”
루가 저지하자 레냐의 안색이 파랗게 죽었다.
칼레파 자식. 이럴 때나 권력을 휘두르고.
디안 케트의 다른 제자들이 누구인지만 알면 남은 세 개의 유물을 찾는 데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이런 기회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만둘 것 없어. 레냐. 계속 말해.”
“하, 하지만 데이지 님이 여쭈신 부분은 쉽게 말씀드리지 못할 사안이라서요.”
“비밀이라고?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 잘 봐, 레냐. 나는 네 주인님의 평생 바람을 들어줄 은인이야. 은인에게 그런 것도 못 말해 줘? 그 정도로 대단한 비밀인 거야?”
“저, 정말 말해으읍……. 읍? 으읍! 으으읍!”
열릴락 말락 아슬아슬했던 레냐의 입술이 접착제라도 바른 양 꽈악 다물렸다.
루의 마법이었다.
“뭐 하자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자, 루는 아무렇지 않은 투로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 봬도 내 명색이 로궤의 칼레파라. 교 내 기밀이 드러나는 데 두고 볼 수만은 없지.”
남의 어처구니를 가출시키는 소리다. 그동안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으면서 기다렸다는 듯 끼어드는 꼴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냥 좀 알려 주면 덧나?”
턱을 살살 쓸던 루가 다소 진중해진 낯으로 물었다.
“궁금해?”
“응.”
그는 즐겁다는 얼굴로 싱긋 웃었다.
“궁금하면 500금.”
이 사기꾼이 미쳤나.
“500금을 어디서 구해? 그 거금이 땅 파면 나오는 줄 알아? 하녀로 100년을 일해도 못 벌 돈인데!”
“저런, 안타깝네. 100년을 일해도 500금을 못 벌다니.”
진심으로 불쌍하다는 얼굴이라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주시하며 루가 말했다.
“현재 시각 새벽 1시.”
“…….”
“여름 새벽은 시간이 빠르게 흐르지. 해가 뜬 후 움직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금 당장 나서는 게 좋을 거야.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회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라. 안 그래?”
능구렁이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지만. 루의 말은 사실이었다.
검성에게 선수를 빼앗겼든 말든, 디안 케트의 일기장을 훔쳐 갈 기회는 오늘이 최적이다.
‘디안 케트에 대한 정보는 다녀와서 캐묻자.’
움직이려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레냐. 안 입는 옷 좀 빌려줘. 이왕이면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기왕 줄 거 어두운 색으로. 새벽의 숲은 추우니까 따뜻한 옷감이면 더 좋고. 아, 머플러도 있으면 좋겠어.”
“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번 찾아볼게요!”
이건 도둑질이 아닌 회수다. 도둑놈은 내가 아니라 제국 황실이지.
황실 놈들은 남의 일기장을 보고에 간직해 두는 변태들이다. 자고로 변태는 혼쭐이 나 봐야 한다.
얼굴을 숨기기 위해 거울 앞에서 한창 모자를 만지고 있을 때였다.
“그건 뭐야?”
루가 뭐 저리 뒤적이나 싶었는데, 대뜸 바지 주머니 안쪽에서 보석을 한 움큼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보통 보석이 아니었다.
‘……마도구?’
오묘한 기운이 풍겨 오는 걸 봐선 보통 마도구가 아니었다.
대체로 귀걸이형 마도구였고 반지형 마도구도 두어 개 보이는 걸 봐선, 루가 직접 착용하는 물건인 듯했다.
‘그 귀한 물건들을 동전 넣듯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어?’
위기의 순간에 루의 주머니를 뒤질 것.
좋은 정보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