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사실, 침실을 안내받는 중간에 습관적으로 루의 방에 함께 들어갈 뻔했다.
귀족회에서 매일 같은 방을 쓰던 여파다.
“데이지 양. 나랑 자고 싶어? 뭐, 밤에 내가 직접 그쪽으로 갈 생각이긴 했는데. 같은 침실을 쓰면 재우기는 편하겠네.”
지옥의 놀림거리로 변질되기 전에 후다닥 도망쳐 나왔다.
루는 한번 건수를 잡으면 최소 열 번은 우려먹는 악독한 마귀였다. 처신 잘하자.
그날 저녁은 조용했다.
집주인 없이 조금 이른 식사를 끝낸 후에는 더욱 조용했다.
‘도착하긴 도착했는데. 정작 웨더우즈 자작에 대해서는 못 물어본 데다, 하녀장의 서신도 못 전해 줬네.’
노인이 루를 알아볼 줄 누가 알았겠어.
‘황실 보고의 설계도도 그렇고. 이 집에는 별 특이한 물건이 많은 것 같은데…….’
적어도 오늘 밤에는 괴도 노릇을 할 일이 없을 것 같으니. 소화도 시킬 겸 염탐이나 해 볼까.
생각난 김에 바로 실천에 나섰다. 까딱하다간 황실로 같이 끌려갈지 모를 사이인데, 염탐쯤이야 애교지.
가장 먼저 2층의 전반적인 구조를 확인했다. 그다음은 가장 안쪽에 있는 방부터 차근차근 확인을……은 무슨.
첫 번째 방을 열자마자 구석에서 집안일에 매진하는 레냐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아! 데이지 님! 혹시 피, 필요한 게 있으세요? 말만 하세요. 가져다드릴게요.”
실패다. 나는 염탐 따위 한 적 없었던 척, 테이블 위에 쌓인 침구와 의복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림질 중?”
레냐는 일하는 모습을 보여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헙!”
흠.
하녀의 고충은 하녀가 가장 잘 아는 법.
다림질은 대단히 뿌듯한 일도 아닌데, 시간이 유독 많이 소요되는 집안일 중 하나다.
쓰러진 늙은 주인님을 돌보기에도 바쁠 텐데 다림질에 시간 쏟게 할 수는 없지.
나는 다림질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천들을 하나하나 바닥에 펼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 방의 바닥은 반짝반짝 윤기가 흐를 만큼 깨끗해서, 무리 없이 천을 펼칠 수 있었다.
“데, 데이지 님? 무슨 짓을…….”
“기다려. 천국을 보여 줄 테니까.”
전부 펼친 후 레냐에게서 다리미를 빼앗아 들었다. 구형이라 몹시 묵직하다.
후우우우.
느린 심호흡. 그리고 집중.
나는 상상한다.
이곳은 서른이 넘는 마귀가 한데 모인 적진이다. 나는 이 마귀들을 단칼에 베고 위기에 내몰린 친구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
‘벤다.’
기를 담아서!
슈우욱.
발검하듯 앞으로 뻗어 나간 다리미가 횡을 그리고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천에서 일어난 새하얀 김이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피부에 닿아 오는 습한 감촉이 나쁘지 않아.
처리했나?
눈을 떴다. 모든 천의 주름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수십 장의 천을 단번에 다리는 기술. 이름하여 마귀다리미법.
짝짝짝!
마귀다리미법의 진가를 알아본 레냐가 내게 갈채를 보냈다.
“와아, 대단하세요! 하, 한 시간은 족히 걸릴 양이었는데…… 비결이 뭔가요?”
“근성.”
“근성?”
“그리고 체력. 근성과 체력이 있으면 못 할 일이 없지. 체력 단련법 알려 줘? 우선 기초 체력을 쌓기 위해 매일같이 팔굽혀펴기 200개와…….”
“자, 잠시만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제가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올게요! 받아 적고 싶어요!”
흥분한 레냐가 천을 밟지 않게 조심조심하며 방을 나갔다.
사실, 이 다림질법은 웨더우즈에서 사용하지 못한다. 하녀장이 학을 떼기 때문이다.
“데이지 양. 그러다가 침구가 털끝만큼이라도 그을린다면, 침구의 값어치만큼 당신의 봉급을 깎겠습니다. 제발, 부디, 평범하게 일해 주세요.”
마귀다림질법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하녀장. 당신이 불쌍해요.
날 이해해 주는 동종 업계 친구란 이렇게 좋은 것이었어.
친구라.
“친구.”
흠흠. 입 안에 굴리는 단어가 이상야릇한 기분을 들게 만든다.
돌이켜 보니 데이지로 살아온 시간이 벌써 석 달이 넘어가고 있다.
그사이 데이지로서 만나 온 인연이 꽤 많이 쌓였다. 하녀장, 루, 집사 암살자, 감자 노인, 시장 상인들, 예거시와 볼크윈…….
‘발버둥 치면 어떻게든 생과 인연은 계속되는구나.’
늘어놓은 천을 하나하나 접으며 레냐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낯선 인기척이 저택 코앞에서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창 너머로 인기척의 주인을 확인했다.
남성 둘.
“데이지 님! 메모할 준비 완료했어요. 그, 그럼 이어서…….”
“레냐 씨.”
“네?”
한데 저 둘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호의적이지 않았다.
“말리콥스 할아버지 혹시 범법자야?”
“네? 아, 아니요? 저희는 15년 전부터 제, 제국에 정착한 엄연한 제국민…….”
“아니면 척을 진 사람이 있든지.”
답이 뚝 끊긴다. 나는 창문을 주시하며 재차 물었다.
“있어?”
“……주, 주인님은 이웃과도 사이가 좋고, 동네 어린아이들과도 자주 놀아 주세요. 오로지 메피스토의 군대와만 척을 지셨죠.”
“그래? 그럼 저들은 단순히 친구?”
곁으로 다가온 레냐가 조심스럽게 창밖을 확인했다. 느낌이 좋지 않은 두 방문객은 저택의 벨을 누른 채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
“아니요. 처음 보는 분들이에요. 자, 잠시만요, 내려갔다가 오…….”
“가지 마.”
나는 레냐의 팔을 붙잡았다. 이어서 내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느낌이 좋지 않아. 돌아가게 내버려 둬.”
“하지만…….”
“할아버지도 쓰러졌잖아. 볼일이 있다면 다시 오겠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레냐는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
황실 보고의 설계도를 확인하고 나서인가. 레냐의 증언도 그렇고. 뭔가 꺼림칙하다.
이후 저택 앞에 한참을 서 있던 두 남성은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건 자정이 되어서였다.
* * *
암살자의 걸음은 은밀했다.
인기척을 완벽하게 죽인 발걸음은 암살자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담을 넘을 때는 나비 날갯짓보다 가벼울 것. 벽을 탈 때는 흐르는 바람과 함께 오를 것.
숨을 끊을 때는 잠에 이르듯 평온하게 보낼 것.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그의 능력은 이보다 한발 더 앞서 있었다.
“너는 1층을 뒤져라. 나는 2층으로 올라가겠다.”
“확인.”
호흡 하나, 심지어는 심장이 뛰는 속도까지 통제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그다.
주어진 임무를 항상 완벽하게 끝마쳐 온 그였다. 오늘의 목표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곳이 웨더우즈 가문에 자금을 대는 장소.’
그의 임무는 올해 70세라는 이 집 주인을 납치하는 것.
기실, 암살자는 오늘 임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웨더우즈 가문은 4년 가까이 그들 길드의 정밀 조사 타깃이었다.
귀족회 소속인 만큼 유서 깊은 이 가문에는 몹시 비밀스러운 보물이 숨겨져 있었는데, 길드는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보물과 그 소유주를 함께 조사해 왔다.
조사. 그 이상의 요청은 없었기에 길드 역시 평범한 방식으로 사람을 심어 왔다.
물론 고용인이 원체 자주 바뀌는 데다, 저택 내부에 마법 덫이 주기적으로 설치되어 통제하기 쉽지 않았지만. 큰 문제 없이 임무를 지속해 왔다.
한데 석 달 전부터 임무가 꼬이기 시작했다.
‘사라진 암살자가 둘…… 아니, 셋이었나?’
새로운 하녀와 요리사가 고용된 이후.
웨더우즈를 탐색하러 떠난 암살자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사라진 셋 중 한 명은 임무 완수율 100%를 자랑하는 뛰어난 암살자였다.
길드 내에서 미드윈트리를 샅샅이 탐색하고 있지만 사라진 암살자들의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웨더우즈 가문은 영 찜찜해.’
그것도 보통 찜찜한 집안이 아니다.
은연중 존재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있던 ‘그레이 웨더우즈 자작’이 예고도 없이 등장했다가 귀신처럼 사라지지 않나.
북대륙연합교국 출신의 자작 부인이 나타나지 않나.
게다가 의뢰인이 전달한 정보에 의하면 하녀 쪽은 퀸 섬의 생존자이고 요리사 쪽은 신분이 불명확하다고 했다.
고용인들조차 평범하지 않은 가문인 것이다.
‘이번 임무만 완수하면 웨더우즈 관련 임무에서는 배제해 달라고 해야겠어.’
그러던 와중, 의뢰인에게서 새로운 요청이 들어왔다. 웨스트윈트리에 말리콥스 조를 납치해 달라는 요구였다.
말리콥스와 웨더우즈 가문이 긴밀하게 연결된 건 지난 4년의 조사에서 진작 밝혀진 바다.
그리고 이 낡은 빨간 지붕 저택에는 노인과 어린 하녀, 둘뿐인 모양이었다.
다만 오후에는 벨을 눌렀음에도 하녀가 나오지 않은 걸 봐선 외부인에 대한 의심이 꽤 큰 듯했다.
암살자는 벽에 바짝 붙은 채 2층 왼쪽 통로를 확인했다.
이제, 임무를 완수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