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95)

58화

“그 개자식들의 목표는 힘이었네. 정확히는 반신에 도달할 수 있는 완전한 힘! 수단과 방법을 따지지 않고 힘을 추구하는 놈들은 낚기에 쉽지. 난 살아 있는 덫 역할을 해 왔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내가 10년 전 남부에 있을 때…….”

이후, 귀에 피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개인사가 좔좔 이어졌다.

‘도저히 거짓말이라 여길 수가 없었달까.’

무엇보다 루도 말리콥스의 신분을 더는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말리콥스와 레냐가 메피스토의 잔당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는 자연스럽게 소강되었다.

“칼레파, 칼레파. 칼레파.”

허리를 깊이 숙인 인사를 마지막으로, 노인은 소파에 돌아와 나를 보며 말했다. 잔뜩 상기된 낯이었다.

“이 인사를 입에 담지 않은 지 10년이 훌쩍 넘어 잊은 줄 알았는데. 몸이 기억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 무례를 포용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칼레파.”

칼레파는 저기 있는데.

“허허, 죽기 전에 당신을 뵙다니. 이 늙은이에게도 남은 운이 다 있었나 보군요.”

저기 있다고.

“칼레파. 괜찮으시다면 이 비천한 노인네가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나 참, 이 할아범.

‘루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게 부담스러운 건가.’

아니면 이런 대화법이 로궤의 수칙일지도.

더는 지적하는 것도 귀찮아, 루를 대신해 허락을 내렸다. (물론 루는 허락을 내리지 않았다.)

“말해.”

“혹여…… 디안 케트 님의 유물을 회수하기 위해 남하하셨는지요.”

디안 케트의 유물.

하녀장의 서신을 전하기도 전에 아주 중요한 화제가 거론됐다.

나는 냅다 고개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제 추측이 옳다면, 감히 말씀드리건대, 정확히 찾아오셨습니다. 이곳, 웨스트윈트리에 디안 케트 님의 일기장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제가 그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는 나도 안다.

“얀센 전시관?”

겸손함을 유지하던 말리콥스가 대번 차가워진 눈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곳에 전시된 유물은 가짜일세.”

거 태도 좀 일관되게 유지합시다, 할아범.

“보물 사냥꾼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 위한 눈속임용이지. 현대에 와서는 아무도 속지 않지만 말일세.”

“그럼 진짜는?”

“진짜는……. 크흐흠. 컥! 커헉. 크흠. ……아, 미안하군, 내가 나이가 적잖아서. 오랜만에 기절하니 몸이 영 좋지 않아.”

“할아버지. 루 앞에서 나이 많다고 하면 안 돼.”

할아범이 아무리 늙었어도 루보다 백 살은 어릴걸. 말리콥스가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레냐? 올라가서 지도를 가져오거라.”

벽에 바짝 붙어 서 있던 레냐가 황급히 다가와 물었다.

“어, 어떤 지도를 가져오면 될까요?”

“일곱 번째 책장의 아홉 번째 서랍을 열면, 맨 아래에서 네 번째 순서쯤에 파란 가죽 수첩이 하나 있을 게다. 그사이에 보관된 두 장의 지도를 가져오면 된단다.”

“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레냐는 후다닥 응접실을 나가 2층 계단을 올라갔다.

책장이 일곱 개. 그리고 책장마다 서랍이 아홉 개라.

‘지도 수집가인가.’

그런데 무슨 지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에서 내려온 레나가 낡은 종이 한 장을 말리콥스에게 건넸다.

한눈에 봐도 오래되어 보이는 종이를 펼치자, 눈이 아플 정도로 복잡한 설계도가 등장했다.

적어도 야외 장소의 지도는 아닌 듯하다.

“흠.”

지도를 얼굴에서 멀찍이 떨어뜨린 채 샅샅이 살피던 말리콥스가 이내 곧 만족스러운 얼굴로 종이를 접었다. 그리고 내게 떠넘겼다.

“멀쩡하군. 자, 받게. 이 지도를 가져가면 디안 케트님의 일기장을 찾을 수 있을 걸세.”

“무슨 지도인데?”

“펜 로타 황실의 금고 설계도.”

……어디의 뭐라고?

말리콥스는 내가 황당해할 여유도 주지 않고 두 번째 지도를 펼쳤다.

펜 로타 제국의 지형도였는데, 총 세 장소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황실의 금고는 총 세 장소에 숨겨져 있다네. 수도인 라갈의 지하, 이리겔 호수 근방의 습지, 그리고 이곳, 웨스트윈트리의 버드나무 숲.”

잠깐. 진행이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설마 지금 나보고 황실의 금고로 숨어 들어가서 디안 케트의 유물을 훔쳐 오라는 거야?”

말리콥스는 내가 황당해하건 말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중에서도 이 버드나무 금고에는 위험천만한 마도구들이 그득하다더군. 황실에서도 그 점을 고려해서 라갈이 아닌 이곳에 숨겨 둔 게 분명해. 다른 누구도 아닌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이 직접 지키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물론 그 대단한 검성도 우리의 칼레파 앞에서는 한낱 날벌레에 불과하겠지만 말일세! 하하, 하하…… 컥, 커억.”

버클리그레이튼 성이 이 근방인 건가.

검성의 기사가 직접 상주할 정도면 확실히 보통 금고는 아닌 듯했다.

“자! 지도를 잘 살펴보고, 오늘 밤 쳐들어가서 디안 케트 님의 유물을 챙겨 나오게!”

말리콥스가 힘없는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곳은 분명 하녀장의 심부름 때문에 왔던 것 같은데.’

어쩌다가 황실의 보고 설계도까지 얻게 된 거지.

‘하녀의 삶은 요지경.’

나는 설계도를 펼쳐 확인했다.

눈알이 튀어나오게 복잡하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디안 케트의 일기장은 그리 깊지 않은 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속 편히 루에게 바쳐도 되는 물건인가.’

로궤의 신자들이 칼레파라는 존재에 맹목적인 건 나도 알겠다.

한데 무려, 펜 로타 제국 황실의 금고이지 않은가?

“할아버지. 황실의 물건을 훔치는 건 크나큰 죄야. 금고에 숨어 들어갔다가 붙잡히기라도 하면 할아버지도 공범으로 끌려갈 거라고. 괜찮겠어?”

말리콥스는 턱도 없는 소릴 한다는 얼굴로 나를 다그쳤다.

“도둑질? 허어! 말도 안 되는 소릴! 이건 도둑질이 아닐세. 그러니까, 음. 자네의 이름이…….”

“데이지.”

“그래, 데이지 양. 데이지 양은 세뇨트인가?”

세뇨트? 어디서 들어 본 단어인데.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레파. 세뇨트들을 쫓아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대신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아, 그래. 비행선에서 그 흰옷 입은 사람들을 세뇨트라고 일컬었지.

나보고 그 허연 놈들이냐고?

“아닌데.”

“아니라고? 그럼 예테? 흠. 예테로 보이지는 않구먼.”

대충 들으니 직위 비슷한 건가 본데. 미안하지만 나는 세뇨트도, 예테도 아니다.

나는.

“하녀다.”

“그건 보면 아네.”

“나는 하녀에 불과할 뿐. 로궤의 신도는 아니야.”

“뭐라?”

말리콥스는 자신이 기절했었다는 사실도 잊고 꽥, 소리쳤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칼레파의 첩씩이나 되놓고 로궤의 신도가 아니라니? 어떻게…….”

뭔 첩? 너무 황당한 단어라, 순간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첩.’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나는 루에게 곧장 물었다.

“루 씨. 혹시 난봉꾼이야?”

“헉.”

말리콥스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말렸다. “아니, 그걸 칼레파께 물어보다니…….” 작게 웅얼거리는데, 못 물어볼 건 뭐람.

루의 입가에 평소보다 세 배 정도 짙은 조소가 걸렸다.

“하.”

답하기에도 같잖다는 눈이다.

그러다 곧장 무표정으로 바뀌더니 은근한 말투로 되물었다.

“혹시 질투?”

“난봉꾼이냐고.”

“아니.”

더 볼 것도 없다는 부정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뭐, 난봉꾼이라 해도 남의 사생활에 이래라저래라 할 순 없겠지만. 하여간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아니래, 할아버지. 괜한 오해로 멀쩡한 사람 난봉꾼으로 만들지 마. 물론 나이가 들면 생각이 조금 편협해지고, 편견도 심해지지. 이해해. 하지만 나와 루는 직장 동료야.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야.”

“……직장 동료.”

말리콥스가 충격에서 벗어날락 말락 할 동안, 루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우리 데이지 양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면 지능도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토록 논리정연할 수도 있다니.”

무시했다.

그사이 천천히 심호흡을 반복하던 말리콥스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사과했다.

“후우, 미안하네. 나는 자네와 칼레파가…… 설마 지, 직장 동료라는 충격적인 답을 들을 줄은…… 내가 생각이, 생각이이……! 컥.”

“주, 주인니이임!”

그리고 쓰러졌다.

또. 쓰러졌다.

화들짝 놀라 달려온 레냐가 눈을 까집고 쓰러진 말리콥스의 상태를 확인했다.

죽은 거 아니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봐선 아닌가 보다.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셨나 봐요. 언제 눈을 뜨실지 확신할 수 없는데…… 괘, 괜찮으시다면 침실로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놀란 거지.

‘이번에는 억지로 깨우기도 뭣하네.’

하녀의 마음은 하녀가 가장 잘 아는 법.

나는 대거리하지 않고 순순히 레냐의 제안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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