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노인은 내가 놀라는 것보다 반 박자 더 빠르게 소파 위로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그에게 달려가 호흡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그래, 죽지는 않았는데…….’
나를 루를 주시했다.
그는 평온했다. 응접실에 처음 발을 디딘 그 자리 그대로 서서 팔짱을 낀 모습이었다.
이전과 다른 면이 있다면.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금색의 서늘한 눈길이 바닥의 한곳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
입꼬리 끝에 습관처럼 띤 조소. 우울하게 음영 진 긴 눈매. 높다 못해 뾰족한 코끝. 미세하게 들썩이지도 않는 눈썹.
이 모든 요소가 화합해 이루어 낸 표정까지.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음.”
루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이 노인을 죽일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안 돼.’
나는 노인과 레냐를 부랴부랴 소파에 눕히고 그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까지. 접근 금지.”
한쪽 눈썹을 들썩이던 루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우리한테 봉급을 주는 할아버지야. 위협하면 안 돼.”
루는 그다지 즐겁지 않은 얼굴로 낮게 웃었다.
“저런……. 우리 데이지 양은 돈만 벌 수 있다면 쓰레기 밑에서도 일할 마음이 있다는 건가?”
쓰레기? 이 노인에게 하는 말인가.
날 지그시 쳐다보던 시선이 거두어지고. 루는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나를 지나쳐 창가의 책상으로 향했다.
응접실의 책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저택을 찾아오는 손님이 없다시피 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책장 위로 작은 액자들로 가득했다. 그중 몇 가지에는 익숙한 얼굴이 담겨 있는 탓에 시선이 떼어지지 않았다.
루는 종이로 가득한 책상 위와 서랍을 대범하게 뒤적거리며 입술을 뗐다.
“데이지 양.”
“…….”
“펜 로타 제국에서 내 얼굴을 알아볼 사람은 존재할 수 없어.”
“…….”
“만약 있더라도, 이들과 같은 반응은 절대 보일 수 없지. 비행선에서 나를 대하던 신도들의 태도를 기억한다면.”
로궤의 신도들이 루를 대하는 태도라면.
“발등을 핥아도 이상하지 않을 태도?”
“그래. 따라서 나를 알거나, 내 얼굴을 아는 이를 만났을 때 데이지 양이 취할 태도는 한 가지야.”
“죽이는 것?”
무심한 눈으로 장부를 훑던 루가 나를 향해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긍정의 미소였다.
어렵고 난해한 경고라 여긴 것도 잠시.
나는 루의 신분이 가진 특이성을 떠올리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칼레파.’
로궤의 단 셋뿐인 종교 지도자.
로궤의 신도들 중에서 북데우스산맥을 남하한 일부 변절자(남로궤)들은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군대에 합류했다.
메피스토의 군대는 10년의 마도 전쟁에서 완전히 뿌리가 뽑혔으며, 신전도 모조리 불탔다.
이후 로궤는 펜 로타 제국에서 꺼림칙한 외래 종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취급을 받고 빠르게 잊혔다.
그러므로 제국에는 칼레파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존재하더라도 두려워하며 기절하는 게 아니라, 발등을 핥을 태도로 납작 엎드렸을 테지.
이 두 경우를 부정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은 아마.
‘메피스토 군대의 잔당.’
순간 심장이 땅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했다.
‘이 둘이…… 메피스토의 군대였다고?’
눈앞에 지난 14년의 순간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마귀의 발아래 짓밟히던 처소.
거듭된 생체 실험으로 피딱지가 붉게 물들어 있던 신전 지하.
가족에게 편지를 부쳐 달라던…… 더는 기다리지 말라 전해 달라던…… 죽은 전우.
동생을 지키기 위해 전선으로 자원한 소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나 자신조차 의아할 만큼 무거운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빙그르르 돌았다.
“데이지.”
고개를 들었다. 루의 그늘이 나의 어깨를 감싸고 등을 토닥이는 것이 느꼈다.
“죽일까?”
나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그리 묻는 루를 올려다봤다.
“아니면 살릴까?”
속삭이는 음성에는 분노도, 가엾은 마음도 담겨 있지 않다. 안부를 묻듯 건조하기만 할뿐.
“답을 모르겠다면 이 저택을 나가서 웨스트윈트리 역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 그곳에 도착하는 열차를 기다리며 딱 셋까지만 세. 그러면 내가 할 일을 마치고 네 옆에 도착해 있을 거야. 이후 우리는 미드윈트리로 돌아가는 거지.”
“…….”
“그리 할까?”
루의 다정한 배려는 새까만 잉크로 점철되어 있던 내 이성에 더 검은 덧칠을 반복했다.
……아니, 덧칠이 아닌 등불을 밝혔다.
“그렇게 하면 너도 마음이 편하겠어?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아니, 만족할 리가.”
그렇게 긴 시간을 메피스토가 남긴 흔적에 휘둘릴 수는 없지.
고개를 돌렸다.
책상 옆에 자리한 오래된 책장에, 크고 작은 액자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액자 속에 두 명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 저 액자다.
나는 응접실에 들어선 이래 저 액자에서 단 한 번도 완벽하게 신경을 끊어 낸 적이 없다.
청년과 소년. 소년은 노인의 어릴 적 모습이었고, 청년은 분명…….
“내게는 더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디안 케트.
액자 속의 청년은, 집사 암살자가 넘긴 자료에서 본 디안 케트의 얼굴과 똑같았다.
‘후우우.’
나는 아주 깊게 숨을 내쉬었다.
느리게 호흡하자 신선한 공기가 뇌리에 차오르는 듯하다. 이성이 감성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했다.
‘정신 차리자. 이 둘이 메피스토의 군대라는 건 추측에 불과해.’
하녀의 본분, 하나. 논리적인 사고로 잡일거리에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것.
“눈 떠 할아범.”
나는 몸을 돌려 소파에 누운 노인을 바라봤다.
“지금 당장 안 일어나면.”
결국 답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메피스토의 군대도, 디안 케트도, 그 둘과 웨더우즈 가문의 관계도.
“칼레파가 공주님의 키스로 깨워 준대.”
노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 * *
나는 액자를 그러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젊은 남성의 얼굴 위로 새겨진 지문이 그림처럼 선명하다.
나는 손끝을 들어 하얀 지문을 부드럽게 닦아 냈다. 어렴풋이 가려져 있던 남성의 얼굴이 다시 또렷해졌다.
디안 케트는 마른 남자였다.
‘게다가 예상외로 미인이야. 키가 조금 더 작았다면 여자로 오인했겠어.’
가슴을 덮는 긴 머리칼과 뾰족한 턱이 인상적인 그는 제 앞에 선 소년을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흑백 사진이었음에도 디안 케트의 창백한 안색이 도드라지게 다가왔다.
눈 밑은 검고 흐릿해서, 바닥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면 시체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디안 케트와 인연이 있는 할아범이었구나. 그럼…… 웨더우즈 가문에 있는 알도 이 할아범이 가져다 둔 건가?’
디안 케트와 어떤 관계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제 막 깨어난 노인에게 물어봐 봤자 경계심만 살 수 있었다.
나는 칼레파가 아니니까. 천천히 각을 봐야지.
“그러니까.”
나는 액자를 다시 책장에 돌려놓고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안색도 사진 속 디안 케트 못지않게 가히 좋지 않았다.
한바탕 기절하고 일어난 노인의 이름은 말리콥스였다. 나는 그에게서 전해 들은 짧은 이야기를 더 짧게 요약해 되물었다.
“할아버지는 메피스토의 군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악행을 밀고한…….”
“군대라니! 이 말리콥스가 그 개자식들과 한편이라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고 말지!”
컥, 커억. 마른기침을 뱉은 노인, 말리콥스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천하의 배신자 놈들! 교단의 배움을 그대로 역행하는 이단자들! 내 이 손으로 놈들의 사지를 찢지 못한 게 철천지한이다! 그놈들은 악마야. 늙은이,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죄다 끌어가서 제물로 희생시켰어. 더러운 욕망을 위한 제물이었지! 절대, 죽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
“알겠으니 진정해. 얼굴에 침 튀어.”
“큼, 크흠! 미안하네. 그 씨XX 잡것들 이야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흥분을…….”
조용히 다가온 레냐가 헉헉대는 말리콥스에게 물잔을 건넸다.
그러나 말리콥스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물잔을 거절하고 소파 아래로 기듯이 내려가 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히 용서를 청합니다, 칼레파. 말로만 전해 들었던 칼레파를 두 눈으로 직접 영접하여, 저도 모르게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허락하신다면 늦게나마 인사를 드리려 합니다.”
루는 이제껏 그러했듯 별말 없이 장부만 훑었다.
말리콥스는 그런 루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레파.”
이윽고 그는 앞서 만난 다른 로궤교의 신자가 그러했듯, 북대륙의 언어로 길고 긴 인사말을 시작했다.
루와의 만남이 얼마나 감격적이었으면 말끝이 드문드문 떨리기까지 했다. 말리콥스는 그가 자신을 해하려 했단 사실을 알까?
‘그건 그렇고. 웨더우즈 가문의 어르신이라는 자가 로궤의 신자였을 줄이야.’
“뭐? 메피스토의 군대? 지금 나보고 그 빌어먹을 개잡종 녀석들과 한패냐고 물어본 겐가? 허허. 세상에. 맙소사! 이 늙어 빠진 노인네가 그 악독한 쓰레기들을 땅에 매장하기 위해 바친 시간만 15년이 넘는데!”
처음에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서 어떤 식으로 남로궤 교회를 조사하고, 물 먹였는지 하나하나 설명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