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사돈 남 말 하시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애당초 루 씨한테서 배운 말이라고.”
스쳐본 얼굴이 짙은 충격에 물든 낯이라, 안심시킬 수밖에 없었다.
“루 씨가 나를 좋아할 리 없다는 건 나도 알아.”
“그 말은 몇 번 들어 본 것 같군.”
“그래서 가끔 궁금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나를 특별하게 대하는가 싶어.”
루는 책을 읽다가 아주 생소한 문장을 발견한 듯, 내 말을 천천히 되뇌었다.
“데이지 양이 내게 특별하다.”
“아니라고 할 셈이야?”
“아니.”
무엇에 대한 부정일까.
내가 그에게 특별하다는 확신에 대한 부정? 아니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부정?
“데이지 파거는 내게 아주 특별하지. 아암, 그렇고말고.”
“…….”
“너는 내 생에 가장 특별한 존재야, 데이지. 어쩌면 널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걸 수도 있겠어. 아니, 역시 그런 것 같은데? 널 만나기 위해서 어머니의 배에 잉태되고, 태어나서, 그 개 같은 어린 시절을 꾸역꾸역 버텨 온 것일지도 몰라.”
“…….”
“너는 내 빛이자 소금이고 시작이자 끝이지. 죽으면서도 네 얼굴이 떠오를 거야. 네 얼굴을 보면서 죽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
“내가 미안해. 제발 그만 주책 부려.”
“그런데 좋아하면 안 되나?”
떠본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표정이라 나도 진심을 다해 답했다.
“동료로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실컷 좋아하라고 대답할게.”
“그럼 좋아할게.”
“…….”
“데이지 양은?”
“…….”
“나를 좋아하지? 아, 물론 동료로서.”
나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나도, 조금, 그래.”
루는 긴 장마 끝에 떨어진 햇빛처럼 황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그런가? 감동인데. 동료애라는 게 이런 느낌이었군. 흠, 눈물이 찔끔 날 뻔했어.”
그는 완벽하게 메마른 눈가를 문지르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날, 마차에서 독서하는 루의 얼굴을 멍하니 구경하던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루의 눈동자는 글자를 따라가지 않는다.
루는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단지 책을 펼쳐 놓은 채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계속, 계속.
‘무슨 생각에 저리 깊이 빠져 있는 걸까?’
루 같은 사람을 고심하게 만드는 일이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일지 궁금했다.
기적 소리가 길게 울었다.
나는 잠이 깨지 않은 몸을 이끌고 기차에서 내렸다.
걸음을 한 번 디딜 동안 어깨를 세 번씩 부딪히는 듯했다. 평소라면 먼지 한 톨 묻지 않게 비껴서 걸었겠지만, 지금만은 어쩔 수 없었다.
졸리니까.
“하아암.”
정말 이상한 일이다.
‘루랑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잠을 깊게 자.’
나는 잠이 많은 편이 아니다. 그리고 깊게 자는 편도 아니었다.
특히 웨더우즈 저택에 고용된 첫 일주일 이후에는 5시간 이상 눈을 붙인 일이 드물었다.
숙면을 취한 건 당장 떠오르는 날만 해도 심신일체의 첫 경지를 이룬 날과 귀족회 첫날, 그리고 이리겔 별장에서의 밤.
한마디로, 루와 함께한 날이 대부분이었다.
“똑바로.”
앞서 걷던 루가 어느새 내 등 뒤로 돌아와 왼쪽 어깨를 건드렸다.
“응.”
“대답은 잘하네.”
“응.”
내가 깊은 잠에 못 드는 건 전쟁 후유증 중 하나로 예상된다.
예전이었다면 그 둘을 조금도 연관시키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너를 알라, 라는 루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해야겠지.’
마도 전쟁은 끝났지만, 내 내면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데이지 양.”
기본적으로 나는 수면이 불편하고, 불안하다.
등을 벽에 대고 누워야 그나마 빨리 잠에 들 수 있었다. 이건 새벽에 들이닥치는 마귀의 습격에 대비하던 습관 때문…….
“데이지 양.”
“응.”
“정신을 못 차리는군.”
어느 순간부터 루는 내 양쪽 어깨를 잡고 걸었다.
그의 미모를 의식한 내가 촌스러운 밀짚색의 페도라까지 뒤집어씌웠는데도, 지나치는 사람마다 힐긋 루의 얼굴을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루는 잘생겨서 귀찮겠다.
“여기 주소로. 얼마나 걸립니까?”
루가 마부에게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10분이면 충분히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아까 하던 생각을 계속 잇자면.
여자의 몸으로 돌아오고서 나는 원래 검을 완전히 놓으려 했다.
검귀로서의 삶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밤마다 수련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불면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아까우니, 수련이라도 하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덕분에 검을 놓는다는 다짐은 무산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죽어라 수련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분 다 젊어 보이시는데. 부부이신지요?”
“그랬던 적도 있습니다.”
“아…… 그, 그러셨군요. 하하!”
너무 강도 높지 않게. 또 너무 간절하지 않게.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
결과적으로 좋은 시도였다. 익숙지 않은 여자의 몸으로 검을 휘두르는 데 금세 익숙해질 수 있었으므로.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왜 루지?’
왜 루 옆에서는 더 편하게 잠들 수 있을까?
‘역시 루가 강해서?’
강한 아군이라, 그가 옆에 있으면 불안감이 줄고 긴장이 완화되어 쉽게 잠들 수 있는 건가.
“도착했습니다, 손님.”
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라파엘로는 무엇이 되는가?
라파엘로는 내가 아는 검사들 중 검성 다음으로 강하다. 우리 둘이 함께하면 헤쳐 나가지 못하는 장애물이 없었다.
설마 루는 나 몰래 수면 마법을 거는…….
“데이지 양.”
시원한 감촉이 뒷목에 닿았다.
그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흐리멍덩했던 시야가 환해지는 듯했다. 어느새 우리는 오래된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화원.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아 먼지 쌓인 창문. 벽을 휘감은 길고 너저분한 넝쿨들.
두 달 전 웨더우즈 저택 못지않게 음산한 저택이었다.
“이곳이야?”
“데이지 양. 며칠을 못 잤지?”
“……사흘?”
사흘 맞나? 확실한 건 이틀 넘게 잠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만히 등을 숙인 루가 내 눈을 들여다봤다.
“평소 잠도 제대로 안 자고 잘 버틴다 싶었지. 사흘이 마지노선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잠깐 사색에 잠겼던 것 같은데, 역사를 나와 목적지에 도착해 있는 것을 보면.
루는 웬일로 바보처럼 넋 놓은 내 얼굴을 비웃지 않았다. 대신 굽혔던 등을 일자로 펴며 당부했다.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겠어. 내가 옆에 있어 주지.”
얼마나 자연스러운 당부였는지, 하마터면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나는 멍하니 그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혹시 나한테 수면 마법 건 적 있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듯 미간을 구긴 루가 이내 짧은 탄성과 함께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니고. 잘 자라며 등을 쓸어 주기는 하지. 아직 자장가는 못 불러 봤는데?”
“……농담이야? 나 지금 머리가 멍해서 진담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돼.”
“괜찮아. 나는 얌전한 데이지 양도 마음에 드니까.”
뭐, 그렇다면 문제될 건 없는데.
‘……내가 뭘 물어봤더라?’
기억을 더듬는 와중에 루가 저택의 벨을 눌렀다.
낡은 나무 문 소리에 뒤이어 어린 하녀가 저택 밖으로 뛰쳐나왔다.
밝은 금발에 선명한 주근깨가 인상적인 소녀는 의문 섞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누, 누구신지…….”
“웨더우즈.”
“……아! 웨더우즈 가문의 하녀장님이 보내신 분들이신가요?”
끄덕.
“드, 들어오세요.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이 저택의 하녀인 레냐예요. 두 분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옆의 키, 키가 큰 분이 웨더우즈의 요리사 겸 정원사 분이시라는…….”
멈칫.
루의 얼굴을 확인한 하녀, 레냐가 경악 어린 얼굴로 입을 벌렸다.
“마, 맙소사! 그, 금안에 푸른 머리! 설마! 아아…….”
그러고는 털썩,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
뭐지.
아무리 기다려도 레냐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기절했네.’
잠이 확 깰 만큼 황당한 사태였다.
나는 아니란 걸 알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루를 돌아봤다.
“방금 뭔가 했어?”
루는 부정의 의미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째서? 원래 너무 잘생긴 남자를 보면 기절할 수도 있는 건가?
나는 레냐를 어깨에 들쳐 업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레냐가 말한 주인님은 우리가 찾아온 ‘웨더우즈 가문을 도와주는 어르신’이 틀림없었다.
일단 짐짝부터 눕히자, 라는 생각에 1층 응접실로 향했다.
발을 디딘 순간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있던 왜소한 노인이 나를 돌아봤다.
“……맙소사.”
덜커덩. 의자를 밀치고 일어선 백발의 노인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외쳤다.
“그, 금안에 푸른 머리! 설마!”
왜 그래. 할아범도 레냐처럼 쓰러지시려고?
“워, 워.”
레냐를 내려놓은 나는 노인을 진정시키는 동시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저 나이에 바닥에 쓰러지면 단번에 세상을 하직할 수 있었다.
노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시큰둥하기 짝이 없는 루의 얼굴을 가리켰다.
“거, 거기에 미의 여신 뺨을 후려칠 만큼 아름다운 미모!”
“진정해. 그냥 좀 재수 없는 미남이야.”
“당신은 설마…….”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노인이 기껏해야 ‘웨더우즈 자작?’이나 ‘미의 여신의 신?’ 정도를 언급할 줄 알았다.
한데.
“칼레파!”
많고 많은 단어 중에서 그 단어를 입에 담을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