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95)

55화

내 질문에 영혼 없는 얼굴로 하녀장의 당부를 듣고 있던 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30분 후에 시장으로 데리러 와 줘.”

“어디로?”

“식당 <피스 오브 랜드> 앞에서 기다릴게.”

“맨입으로?”

“…….”

“흠. 우리가 아무리 같은 침대에서 숙면을 취한 부부라 해도 그렇지. 결혼반지를 깨뜨린 무심한 남편에게 더 이상의 빚을 지우고 싶지는 않은걸?”

무심한 남편.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게 할 정도의 장신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다.

물론 그의 외모는 내게 빚을 떠넘긴 후 파산시키고 노예로 끌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2층 벽에 매달려 외부 유리창을 닦고 있던 진이 감탄사를 뱉었다.

“부부셨구나.”

부부겠냐? 나는 짜증스레 루를 흘겨봤다.

“방금 부탁은 취소.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이런. 잘 훈련된 개처럼 저택에 처박혀서 데이지 양만 기다리라니? 맨입으로?”

“그리고 후배. 저거와 나는 부부가 아니야. 결혼하느니 죽는다.”

“쌀쌀맞네. 나라면 죽느니 잘 키울 텐데. 물론 데이지 양을 말이지. 서운하니까 기억해 둬.”

나는 실실 웃는 루의 면상을 무시하고 시장으로 향했다.

결혼반지 수법.

이 수법은 루가 나를 괴롭히고 싶을 때 활용되는 악독한 말장난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결혼반지 수법은 오늘의 나에게 퍽 이로운 효과를 선사했다.

바로, 분노로 인한 폭력성 증가.

‘아아, 화가 난다.’

잠들어 있던 폭력성을 일깨워 준 루에게 감사하며, 시장에 도착한 즉시 펍의 문을 밀었다.

덜컥, 덜컥.

움직이지 않는다.

안에서 잠긴 건가? 집사 암살자에게 펍을 맡긴 이래, 이 문은 절대 잠긴 적이 없었다.

그 말은 예의 그 수상한 놈이 잠가 버렸다는 뜻이었다.

“도끼 있어?”

구경하듯 동그랗게 모인 자들에게 넌지시 묻자, 정육점 상인이 후다닥 튀어나왔다.

“여기! 이 도끼를 쓰게나.”

“고마워. 잘못하면 머리 날아가니까 비켜.”

나는 정육점 상인을 밀어내고 도끼로 문을 내리찍었다.

콰직!

나무 문이 부서지면서, 갈라진 자제 틈으로 내부가…… 잘 안 보이네.

문짝을 몇 번 더 부순 후 구멍 틈으로 팔을 집어넣어 잠겨 있던 걸쇠를 풀었다.

끼이익.

음산한 잡음과 함께 펍 내부로 사각형의 햇빛이 떨어진다.

가장 먼저 보인 광경은 정면 벽 쪽에 일렬로 늘어앉아 무릎 꿇고 있는 조직원들이었다.

하나같이 입이 틀어 막힌 채 상체를 힘차게 버둥대고 있었다.

나는 문의 톱밥이 부유하는 내부로 발을 디뎠다.

그 순간.

“조심성 없군!”

문 뒤편에 소리 없이 서 있던 인기척이 살기를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쉬익,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머리 위로 떨어진다.

무게감도, 날카로움도, 하다못해 정갈함도 엿볼 수 없는 허접한 검격이었다. 차라리 총을 쏘던가.

검지와 중지로 검날을 잡자, 흠칫 놀란 침입자가 덥수룩한 인중 수염 사이로 욕설을 내뱉었다.

“어중이떠중이는 아닌가? 그렇다면 네가 우리 지부에 손을 댄 계집…… 컥.”

가벼운 발길질도 버티지 못한 육체가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나는 조직원들의 입을 막고 있던 줄을 뜯어냈다.

조직원들은 입이 뚫리자마자 “푸하!” 하며 호흡을 내뱉곤.

“누님! 그 자식, 베리드 렛에서 나온 놈입니다!”

“자기들을 배신한 걸 안다며 공모자를 캐물었어요!”

바로 고자질했다.

“저희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누님. 그 대가로 얼굴이 곤죽이 될 만큼 처맞았지만요.”

그중 가장 침착한 바텐더가 퍼렇게 멍이 든 눈을 들이밀며 조직원들의 의리를 알렸다.

“잘했어.”

헤헤. 다 큰 남성이 쑥스러워할 동안 등 뒤에서 상인들의 쑥덕거림이 들려왔다.

“베리드 렛이 뭐여?”

“몰라. 다른 동네 깡패인가 봐. 우리 동네 깡패들 진작 개과천선했는데. 쯧쯧.”

“어어, 아가씨! 뒤 조심해!”

지척에서 이 악문 외침이 터졌다.

“죽어라!”

쥐새끼처럼 다가와 검을 내리긋는 침입자……를 예측해서 뒷발차기로 검날을 차 버린 나.

티잉.

힘 빠지는 소음에 뒤이어 침입자의 검날이 부러졌다.

침입자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반쪽이 된 제 검을 바라보다가, 거칠게 콧김을 내뿜으며 뒷걸음질 쳤다.

“이봐, 여자.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실수한 거다. 우리 베리드 렛은 방해하는 녀석들을 절대 봐주지 않…….”

“시끄러.”

그대로 뺨을 후려치자 맑고 깨끗한 흰자를 내보이며 쓰러진다.

공교롭게도 곧 기차에 올라야 할 시간이라 침입자의 개인 사정을 들어 줄 여유는 없었다.

심부름에 대한 책임감. 그것이 바로 하녀의 의무니까.

“뭐야. 끝이여?”

“싱겁구먼. 요즘 젊은이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이.”

목을 길게 빼고 구경하던 상인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일어난 조직원들은 침입자의 상태를 재차 확인하고선 우는 낯을 했다.

“누님, 역시 저희한테는 누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앞으로도 저희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형님은 아버지로, 누님은 어머니로 모시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펍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9시 30분.

걸어서 웨더우즈 저택에 들렀다가 미드윈트리 역사로 가기에는 조금 빠듯한 시간이다.

“나 가 봐야 해. 저건 잘 묶어 놔.”

“예! 형님께 넘길까요?”

“응.”

지붕이라도 타고 달려야 하나, 싶은 마음으로 펍을 나왔다.

안 그래도 좁아서 불편한 시장 바닥인데. 문 앞에 크고 번쩍번쩍한 마차가 한 대 정차해 있었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반쯤 열린 마차의 문 틈새로 미남이 보인다. 조소를 띤 마차의 주인.

나의 폭력성을 일깨워 준 고마운 파트너, 루였다.

엉망진창이 된 펍의 상태에도, 루는 그 경위를 묻기는커녕 천연덕스럽게 내 얼굴로 팔을 뻗었다.

“우리 데이지 양은 칠칠치 못해서 탈이라니까.”

길고 매끈한 그의 손가락 끝에 톱밥이 묻어 나왔다. 나는 멀어지는 하얀 손을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다가 작게 헛기침했다.

‘안 온다고 했으면서.’

항상 그래. 결국 들어줄 거면서 말만 얄밉게 한다. 거절하는 게 재밌는 건가?

“아, 루 씨. 혹시 일꾼 같은 거 안 필요해?”

루는 대답 대신 마부석을 쳐다봤다. 필요하냐는 눈이다.

뒤통수에 눈이 달린 것도 아닌데, 집사 암살자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만. 종종 살림에 능숙한 고용인이 한 명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 에슐라 저택의 시종들은 잡기술이 뛰어나지만, 섬세함이 부족해서 같은 일을 두 번씩 하는 경우가 많다.”

마침 잘됐다.

나는 펍으로 들어가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침입자를 끌고 나왔다.

“섬세함에는 하녀만 한 인재가 없지. 데려가서 오늘부터 하녀로 써.”

집사 암살자는 맨 처음 ‘이 산적을?’ 하는 눈으로 수상한 사내를 훑고, 그다음으로 ‘미쳤나?’ 하는 눈으로 나를 훑었다.

“웨더우즈에 남는 하녀복 많아. 제일 큰 사이즈 빌려줄 테니까 수선해.”

“…….”

“참고로 베리드 렛 길드원이야. 우리…… 아니, 선량한 펍의 조직원들을 괴롭히고 있었어.”

마뜩잖았던 집사 암살자의 눈빛이 대번 날카롭게 변했다.

“이자가? 선량한 펍의 직원들을? ……알겠다. 하녀로서 잘 교육하도록 하지.”

그렇게, 에슐라 저택의 첫 번째 하녀가 될 침입자는 집사 암살자 옆자리에 짐짝처럼 꽁꽁 묶였다.

마차에 올라타자, 말머리가 미드윈트리 역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폭신한 고급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바깥을 구경하는데 뺨 한쪽이 몹시 따가웠다.

루의 시선이었다.

어째서? ……아, 인사.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쥐어짠 감사 인사를 루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녀복이라니. 그런 취향이었나? 예상 범위를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는데.”

뭐라는 거야, 또.

“아니면 설마 내가 데이지 양이 숨겨진 취향에 눈 뜨도록 한 건가? 음. 이건 좀 책임감이 느껴지는걸.”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산적 같은 침입자를 상대로 하녀 운운했던 일을 말하는 듯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루 씨는 가끔…….”

루가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반박하는 것조차 사람 피곤한 기분이 들게 해.”

하하. 한 차례 건조하게 웃은 그는 제 귀를 만지며 대답했다.

“가끔이라 다행이야. 나는 매일같이 그러거든.”

“과장하지 마.”

“나도 과장이었으면 좋겠어. 무의식적으로 데이지 양을 살피고 있는 내 자신이 가끔 낯설게 느껴져서.”

그 말에 내 기분이 더욱 오묘해졌다.

방금 그건 고백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지 않은가?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의식하고 있는 자신이라니? 그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진다니?

혹시.

“루 씨, 나 좋아해?”

루가 나와 눈을 맞췄다.

아, 그건 정말 오묘한 표정이었다.

더불어 몹시 복잡한 감정이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기도 했고. 그러는 동시에 고뇌와 고심에 휩싸이는 눈이기도 했다.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저 표정.

어쩔 수 없지. 진지하게 경고하는 수밖에.

“나 좋아하지 마. 루 씨만 다쳐.”

루의 눈이 더욱 커진다. 금빛 눈동자에 선명한 감탄과 탄성이 서렸다.

이윽고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앞에서 그런 놀라운 헛소리를 하는 건 데이지 양이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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