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4/195)

54화

진이 웨더우즈 가문의 네 번째 고용인으로 고용되었다.

직책은 집사.

은발을 짧게 다듬고 남성 고용인 복장을 걸친 진은 대충 살피면 남성으로도 충분히 오인할 만한 외형으로 변했다.

170cm 중반의 작지 않은 신장과 검술로 단련된 어깨와 팔. 하의 너머로 느껴지는 하체의 탄탄함은 검사 특유의 예리함과 어우러져 쉽지 않은 인상을 풍겼다.

‘입만 닫고 있으면 확실히 남자로 보이겠어.’

굳이 왜 그래야 되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집사와 하녀의 담당 업무는 보통 다르다. 하지만 이곳은 주인님이 무려 마도구인 불우한 웨더우즈 가문.

요리사를 제외한 모든 고용인이 하녀장의 법도 아래 업무를 분담하는 곳.

“데이지 양? 오늘 시장 가는 길은 진 군과 함께하세요. 자주 가는 가게가 어디인지 안내해 주면 됩니다. 필요한 목록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집사의 일을 하녀인 내가 가르치게 되었다.

귀찮아.

진을 채용한 건 하녀장인데 왜 내가 교육해야 하는 거야?

물론 진과 결투한 건 나지만.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주인님과 결투한 셈인데.

“후배.”

“예, 선배님.”

“심부름의 진수를 보여 주지. 잘 따라와.”

“예, 선배님.”

깍듯한 녀석.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든다.

나는 후배 고용인을 옆구리에 끼고 시장으로 향했다.

“뭐? 이렇게 젊은 청년이 집사?”

당연한 말이지만, 진은 시장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아이고, 잘생겼네. 아이고야, 잘생겼어. 이리 와, 청년. 날이 이제 덥지? 물 한 잔 마시고 가.”

“감사합니다.”

“웨더우즈의 마님은 얼굴 보고 고용인을 뽑나 봐.”

“아닙니다.”

“그려. 인물이 아주 훤하네. 둘이 아주 잘 어울려. 결혼은 언제 해?”

나는 기겁하며 어깨를 떨었다.

“안 해!”

“응? 애인 아녔어? 난 또. 처음 보는 총각이 그 큰 가문의 집사가 되었대서 아가씨 연줄인 줄 알았지. 오해해서 미안해, 총각.”

“쯧쯧. 자네도 주책은 참. 이 아가씨 남자 친구는 그 흉흉하게 아름다운 퍼런 머리 청년이라고.”

“아니야.”

우욱. 전혀 아닌 두 명과 연인 관계로 오인되었다는 사실이 불쾌하지만, 시장 상인들의 오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파격적인 인사 채용이었다는 거지.’

하지만 그보다는 아무도 진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더 놀랍다.

나는 심부름 물품을 구매하며 진에게 주요 거래처와 <숙련된 하녀를 위한 가성비 좋은 청소 솔 세트>, <숙련된 하녀를 위한 가성비 좋은 재봉 세트> 등 인기 잡화 물품을 소개해 준 후 귀가했다.

“내일이랑 모레는 출장.”

“하녀장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루 님과 함께 웨스트윈트리에 가신다고요.”

물건 정리를 돕던 진이 다소 진중해진 낯으로 말했다.

“제가 걱정을 사서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물론 루 님이 계셔서 안전하겠지만요.”

진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루는 무인을 상대로 항상 ‘적당히’ 기세를 흘리나 보다.

“그런데 선배님. 선배님은 근력을 어떤 방식으로 단련하신 겁니까?”

근력?

갑작스러운 질문에 힐긋 진을 바라봤다.

다분히 그녀다운 질문이다. 안 어울리게 조용하다 싶었지.

가슴 속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호기심을 가리기 어려웠는지, 진의 눈동자가 퍼렇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 정도 근력이라면 거의 매일같이 고강도의 훈련을 반복해야 할 텐데. 선배가 훈련하시는 모습은 본 적 없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검사로서의 호기심.

이걸 상대해 줘, 말아?

‘한번 상대해 주기 시작하면 계속 상대해 줘야 할 텐데.’

고민은 짧았다. 나는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해. 매일 새벽, 내 방에서 두 시간 정도.”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진이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역시 선배님은 웨더우즈 자작님을 스승으로 두신 건가요?”

“스승?”

아닌데? 본인인데?

“사실…… 이곳에 와서 선배님과 루 님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두 분에게서 대단한 기세가 풍기는 것도 아닌데, 도저히 빈틈을 찾을 수 없지 뭡니까.”

루는 이해하는데, 내게도 그런 분위기가 풍겼다고?

‘역시 검귀.’

무서울 정도의 본능이다.

“새삼 제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생 검을 단련해도 이 정도인데, 선배님과 루 님은 생업과 병행하면서 그런 수준에 오르시지 않았습니까?”

강해지고 싶다는 의지가 충만한 눈을 보고 있으려니, 어제 오전에 들은 루의 한마디가 떠올랐다.

“데이지 양 같아서.”

크게 공감 갔던 말도 아니고. 딱히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말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그 말이 떠오른다.

“훈련 매뉴얼. 알려 줘?”

그래서일까?

본래라면 나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모르는 척했을 진의 호기심에 괜히 답을 주게 된다.

진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듯 깜짝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정말이십니까?”

나는 진이 특별히 좋지도, 싫지도 않다.

하지만 강해지고 싶어 하는 진에게는 어쩐지 조금 마음 약해지는 것 같다.

결투를 받아들였던 것도 그렇고, 웨더우즈 저택에 들어오겠다는 의사를 철저히 짓밟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어째서일까?

진이 나와 같은 성별에, 검사이고, 검귀여서? 가족이 없어서?

“대신 조건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일주일 동안 내가 가르친 것 외의 다른 훈련은 일절 금지.”

“이제 제게 남은 건 시간뿐입니다. 어떤 훈련이든 따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예!”

“2층 창틀을 전부 닦아.”

“…….”

“(나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처럼) 하루 안에 끝낼 것.”

“…….”

“그리고 일주일 동안 밤에 아무 생각 없이 잠들 것. 검은 잡지도 말 것. 실시.”

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금 멍하게 나를 쳐다봤다.

사납고 딱딱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조금 멍한 구석도 있었네. 이래서 사람은 하루 이틀 겪어서 모른다니까.

“…….”

“따라 한다. 실시.”

하지만 훈련 중에 넋 빠진 건 인정 못 하지. 흠칫 놀란 진이 곧 큰 목소리로 따라 외쳤다.

“실시!”

걸레를 챙기기 위해 주방 뒤편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물건을 마저 서랍에 채워 넣었다.

나는 왜 진을 돕는 걸까.

‘진이 새로운 검의 경지에 올랐으면 해서?’

아니.

확신컨대, 그것만은 답이 아니리라.

* * *

웨스트윈트리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바로 옆 도시로 이동하는 데다, 볼일도 아주 소박한 편이라 일정 또한 소박했다.

오늘 오전 10시, 웨스트윈트리행 기차에 오른다. 도착은 오후 4시.

내일, 볼일을 본다.

모레 오전 11시, 미드윈트리행 기차에 오른다. 도착은 오후 5시.

총 2박 3일이 소요되는 일거리였다. 심지어 동행인도 똑같았다.

“준비는 끝났나요? 너무 빠듯하게 기차표를 구한 탓에 2박 3일 일정이 되었지만……. 어르신은 까다로운 분이 아니에요. 간 김에 편히 쉬다 오세요. 웨스트윈트리는 구경할 곳이 많으니 이곳저곳 돌아다니면 재밌을 거예요.”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데이지 양을 잘 부탁합니다, 루 씨. 귀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번거로운 일을 맡기게 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네요.”

“이틀쯤이야. 산책시키는 기분이니 괜찮습니다.”

“그렇겠죠. 여기, 몇 가지 물건 챙겨 두세요. 이건 제가 어르신께 보내는 편지고…….”

나한테도 설명해, 하녀장. 심부름꾼은 나라고. 루만 보면서 설명하지 말라고.

바쁘신 루 정원사를 대신해서 소정원에 심드렁히 물을 뿌릴 때였다.

“큼. 크흠. 데이지 양?”

정문 바깥에서 튀어나온 주름 진 손가락이 내 등을 콕, 콕 찔렀다.

잡화점 상인이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주위를 요란스레 살피더니 가슴 안쪽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자, 받아. 감자 할매가 보낸 비. 밀. 쪽. 지야. 비. 밀. 쪽. 지니까 몰래 봐야 하는 거 알지?”

“비밀 쪽지?”

“쉿! 쉿! 거, 뭐냐. 수상한 녀석이 시장에 숨어들어 온 것 같은데……. 우리들이 다 주시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하여간 숨어서 확인해.”

비밀이라면서 줄줄 다 말하네. 시장 상인들 죄다 아는 비밀인 거 아니냐고.

‘그나저나 이렇게 빨리 연락이 오다니.’

감자 노인을 비밀 조직원으로 고용한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말이지.

구깃구깃한 종이를 펼치자 반듯한 필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자 노인이 보낸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수상한 남자가 펍에 들어간 후, 2시간 동안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수상한 남자는 세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펍을 찾아가는 남자라는 것.

떠오르는 인물은 명확했다.

‘베리드 렛.’

집사 암살자도 슬슬 놈들이 움직일 시기라고 했지.

“루 씨. 기차 시간 여유 있어?”

아무래도 떠나기 전에 가볍게 인사를 나눠야 할 것 같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