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유독 해가 높이 떠오른 날의 아침.
기다리고 기다렸던 소식을 하녀장이 전했다.
“데이지 양. 며칠 전 말했던 웨스트윈트리의 어르신을 기억하고 있나요?”
“네.”
“그분께 방문 허락을 받았습니다. 모레 중으로 루 씨와 함께 다녀오…….”
하지만 웨더우즈 저택에 도착한 것은 웨스트윈트리 소식만이 아니었다.
띠리리리링.
날카롭게 울리는 초인종.
철장으로 반듯하게 세워진 정문 너머, 초여름의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 묵직한 짐 가방과 허리춤에 맨 검까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진 버클리그레이튼입니다. 웨더우즈 자작님을 뵈러 왔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녀장이 힐긋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사전에 전달해 둔 사안이었기에 우리 둘 다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하녀장은 정문으로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자작님께 들은 바 없습니다만. 사전에 약속하신 일정일까요?”
“약속까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방문 의사를 밝혔습니다.”
“죄송합니다, 진 버클리그레이튼 님. 자작님께서는 현재 외출 중이십니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냉랭한 축객령에, 안 그래도 푸석푸석했던 진의 낯이 더욱 어두워졌다.
‘의외네.’
대공작가의 후계자로서 교육받고 자라 온 진이다.
귀족 자제로 살아온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을 텐데, 하녀장의 냉대에 고성을 지르기는커녕 몹시 침착해 보였다.
검을 배울 수만 있다면 지위 같은 건 상관없다, 이건가. 하기야 그 정도로 맹목적이니 공작가를 박차고 나올 수 있던 거겠지.
그때.
정문 너머에 서 있던 진이 대뜸 무릎을 꿇었다.
“……진 버클리그레이튼 님?”
진은 거칠어진 음성으로 단호하게 제 의사를 밝혔다.
“어떤 일을 맡기셔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저는 웨더우즈 자작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부디 받아 주십시오.”
“이, 일어나세요!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어찌 한낱 고용인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잡일을 한다는 건 더욱이 말이 안 되지요. 어서 일어…….”
“저는 더 이상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후계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저를 이 저택의 하녀로, 아니, 심부름꾼으로 부리셔도 됩니다.”
하아아. 길게 한숨을 내쉰 하녀장이 주위를 살피곤 진을 들여보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이러다 이상한 소문이 나겠네요.”
나는 진이 정문 안으로 발을 딛기 무섭게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허락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에게 재차 물었다.
“검성의 허락은?”
그제야 진이 담담한 태도로 답했다.
“받았습니다. 저의 후계권은 공식적으로 박탈되었습니다.”
“그가 아무 조건 없이 너를 이곳에 보냈다고?”
“…….”
거짓말에 서투른 성격인가?
정곡을 찌른 질문에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네.
그리고 진이 거짓말에 서툴다는 사실을, 검성이 과연 몰랐을까?
“어떤 조건이었지?”
“…….”
역시 답하지 않는다.
한데 그 모습이 내 눈에는 영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진은 염치도 없이 폭탄을 장착하고 올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진의 양쪽 팔을 확인했다. 왼쪽 팔 안쪽에 맹세의 흔적이 한 줄 새겨져 있었다.
“이거, 검성과 나눈 맹세?”
“…….”
또 대답이 없다.
대답하지 않는 게 아니다. 맹세로 인해 못 하는 것이었다.
‘대놓고 이런 흔적을 새겨서 보내다니. 명백한 도발이야.’
검성이 원래 이렇게 여우 같은 사내였었나. 이 흔적은 과연 무엇에 관한 맹세일까?
‘웨더우즈 가문의 모든 비밀을 파헤쳐 가는 맹세? 저택에서 디안 케트의 유물을 찾아 가는 맹세?’
물론 나 혼자서 충분히 훼방 놓을 수 있지만……. 맹세가 걸린 상태로 오니 마음 한구석이 영 찝찝했다.
‘이러면 대충 받아 준 후 다시 내쫓으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데. 웨더우즈를 멸문시키려 한 자의 각인을 심은 채 들여올 순 없어.’
게다가 맹세란 영혼을 건 약속.
내 방해로 진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면, 필시 죽고 말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진의 눈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각인은 제가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제 영혼에 맹세하건대, 웨더우즈 가문에는 절대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흔들림 없는 진의 약조에 하녀장이 대답했다.
“이 맹세가 어떤 맹세인지 밝히지도 못하는데. 그 말을 과연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로 인해 웨더우즈 가문에 피해를 끼치게 될 시 자결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마법사를 데려와 맹세하겠습니다.”
흠.
‘저렇게 호언장담할 정도면…… 의외로, 웨더우즈 가문과는 크게 관련 없는 맹세일 수도 있겠어.’
그렇다면 역시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보안 유지와 관련된 맹세이려나.
“하아……. 그럴 때는 용서를 빌겠다고 해야 하는 거예요. 자결이 아니라.”
하녀장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검성이 웨더우즈 가문을 노리고 있단 사실을 모르니 더욱 그러할 테다.
나도 하녀장도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할 동안.
정원 테이블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루가 넌지시 말했다.
“받지 그럽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루 씨?”
“데이지 양 같아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진을 돌아봤다.
‘이 검밖에 모르는 꼬마가 나 같다고?’
진과 나의 공통점이라고는 검귀라는 점과 가족이 없다는 점뿐이다.
나는 진처럼 검에 미친 사람이 아니었고, 진도 나처럼 설렁설렁 살아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우리가 대체 어떤 점이 닮았다는 것일까.
“나 같은 게 뭔데?”
“글쎄. 목적의식이 뚜렷한 점?”
예상외의 평범한 대답이다.
‘무식하게 앞만 바라보는 점?’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저는 이제 연고 없는 떠돌이입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어떤 일이든 완수하겠습니다.”
재차 무릎 꿇은 그녀 앞에서, 하녀장이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하녀를 한 명 더 받을 여유가 못 됩니다. 당신의 처지는 이해하…….”
“하녀…… 그 말씀은, 제가 여자라서 힘들다는 뜻입니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크게 틀리지도 않아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스릉.
짐 가방을 내던진 진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러나 나는 하녀장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진에게서는 미약한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여자로서 웨더우즈 가문에 머물 수 없다면.”
진은 높게 올려 묶은 제 머리칼 아래에 검을 가져다 댔다.
“남자로서는 가능하다는 뜻이겠지요.”
스륵.
긴 은발이 잘려 나갔다. 잘게 흩어진 은색 실은 눈송이처럼 가벼이 흩날리며 소정원을 수놓았다.
하녀장은 흉측하게 잘린 진의 머리칼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게 무슨…….”
재차 무릎을 꿇은 진이 크게 외쳤다.
“부탁드립니다, 하녀장님. 저를 부디 웨더우즈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 주십시오!”
받겠냐?
‘하녀장이 얼마나 깐깐한 사람인데.’
한데 그 깐깐한 하녀장이 허가 찔린 눈으로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귀하게 기른 머리를 단번에?”
“그깟 머리카락 따위, 제 진심을 보여 드릴 수 있다면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밀어 버릴 수 있습니다.”
“……부정할 수 없겠네요. 당신의 마음가짐이 단번에 와닿는 뛰어난 퍼포먼스였습니다. 내가 다 아쉬워서 심장이 아렸네요.”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하다는 거야, 대체.
하녀장이 진지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데이지 양? 나와 루 씨를 양손에 들어 볼래요?”
갑작스러운 요구였지만, 하녀는 까라면 까야 하는 법.
나는 오른팔로는 하녀장의 엉덩이 부근을 받쳐 들어 올리고, 왼팔로는 루가 앉아 있던 정원 의자의 하단을 지탱해 들어 올렸다.
놀라서 눈을 깜빡이는 진의 얼굴에 대고 하녀장이 물었다.
“웨더우즈 저택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힘이 필수로 요구됩니다. 당신은 비록 뛰어난 검사이지만, 모든 검사가 강한 힘을 가진 건 아니지요. 할 수 있겠나요?”
진은 비장한 눈으로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할 수밖에 없도록 뼈 빠지게 노력하겠습니다.”
“……웨더우즈 자작님은 아주 바쁘신 분입니다. 퇴직할 때까지 얼굴 한 번 못 뵐 수도 있어요. 그래도 괜찮나요?”
“괜찮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찾아뵙겠습니다.”
“급여는 다른 저택에서 받을 수 있는 금액보다 훨씬 적을 거예요. 예정에 없던 고용이니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상관없나요?”
“상관없습니다. 밥은 잘 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제 내려도 되겠지? 나는 조용히 양쪽 팔을 내렸다.
“당신 제안대로, 우리 웨더우즈 저택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서 당신을 고용할 겁니다. 그리고 남자 고용인에게 요구할 수 있는 모든 집안일을 요구할 거예요. 어려운 일도, 위험한 일도 모두요. 감수할 수 있겠어요?”
“감수할 수 있습니다. 수련에 도움 될 명령은 오히려 환영합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렇게 좋지? 설마 머리 좀 짧게 쳤다는 이유로 받아 주려는 건 아니겠지?
눈꼬리를 치켜뜬 하녀장이 비장한 눈으로 진에게 공표했다.
“좋아요. 진 버클리그레이튼 님, 아니, 진 군. 당신을 우리 웨더우즈 저택의 집사로 고용하겠습니다.”
네 이놈, 설마.
또 사람을 잡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