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집사 암살자는 잠시간 아무 말도 없었다.
처음에는 의심스럽기만 했던 눈동자에 점점 짙은 당혹감이 깃들었다.
“설명이 필요하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치면 그런 결과가 도출되는 거지?”
결투에 대해 짧게 설명하자, 집사 암살자가 드물게 감탄을 내뱉었다.
“놀랍군. 당신이 진 버클리그레이튼을 이겼다고? 정당한 수법으로 이긴 게 맞는 건가?”
“아니면 어쩔 건데?”
“잘했다고 칭찬해 주려 했다.”
“아쉽게도 칭찬은 못 받겠네.”
“그런 극단적인 대가를 받아들이다니. 아직 어릴 텐데 상대도 어지간히 대인배야……. 알겠다. 진 버클리그레이튼과 일대일로 대화할 자리만 마련해 준다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죽이지 마. 이제 하녀야.”
“나도 집사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동료를 괴롭힐 생각은 없어.”
집사 암살자는 인간적이어서 좋다니까.
만족스럽게 웃은 후 상체를 살짝 낮춰 그에게 속삭였다.
“나도 이제 받을 건 받아야지. 그게 우리의 협력 관계잖아. 그렇지?”
루와 디안 케트의 정보.
애당초 진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권 박탈과 교환하기로 되어 있던 그 정보.
고개를 짧게 주억인 집사 암살자가 품에서 소형 수첩을 하나 꺼냈다.
“디안 케트의 관한 정보는 그 수첩에 정리해 뒀다.”
정리씩이나? 양이 꽤 되는 건가. 나는 그의 수첩을 받아들여 기분 좋게 갈무리했다.
협력 관계라는 거 좋구나. 내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집사 암살자가 차분하게 입술을 뗐다.
“열흘 전, 저택에 낯선 방문자가 찾아왔다. 주인님이 저택의 주인이 된 후 처음으로 찾아온 외부인이었지.”
이제 루에 관한 정보인가? 나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방문자의 제국어는 다소 어눌했다. 자세히 들어 보니 북대륙 쪽 억양이 묻어나더군. 그가 저택에 머문 시간은 고작해야 10분 정도가 다였는데, 그중 반은 주인님께 경건한 태도로 인사하는 데 소요됐지.”
“…….”
“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일 것. 그리고 찬양하는 인사를 길게 읊는 것. 그자는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겠지만, 익히 봐 온 인사법이야. 그 인사는 로궤에서 높은 신분의 지도자가 받는 인사다. 주인님은 북대륙연합교국 출신의 로궤 소속이다. 이건 확실한 정보야.”
확실하긴 하지.
“나도 아는데.”
“뭐?”
“나도 안다고. 루가 로궤 사람인 거.”
귀족회에서 개고생하고 왔더니 이미 아는 정보를 팔려고 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자 집사 암살자가 입을 꾹 닫았다.
하아.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너 칼레파가 뭔지 알아?”
“로궤의 칼레파?”
“그래, 그거.”
집사 암살자는 별 대단한 지식도 아니라는 눈으로 대답했다.
“칼레파는 보통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로, 로궤의 종교 지도자. 성회교에 교황이 있다면 로궤에는 칼레파가 있지. 다만 로궤는 삼권 분립이라 항상 세 명의 칼레파가 존재한다. 서기장, 지휘관, 인도자.”
“셋이나 돼? 흠. 각각 총무, 행동 대장, 영업 사원 느낌인 건가?”
집사 암살자는 내 말을 무시했다.
“로궤 본교가 자리한 성역의 중심지도 칼레파라 불린다. 애초 로궤의 지도자들이 칼레파라 불리는 것도 ‘신의 땅인 칼레파의 출입을 허락받은 이’라는 의미에서 시작됐으니까.”
성회교 교황에 대비되는 로궤의 종교 지도자, 칼레파.
‘루가 그 칼레파라고?’
루가…… 북대륙에서 가장 독실한 세 명의 신자 중 한 명이라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루가?
세상 무서울 것 하나 없이 그저 뻔뻔하고 재수 없는 루가?
‘안 어울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선 안 되는 건가.’
북대륙 문화에 대해 단편적으로 아는 나도, 로궤가 그쪽 지방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강력한 종교임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지금껏 루가 보였던 모습이 퍼즐처럼 차곡차곡 맞아떨어졌다.
‘돈이 썩어 빠지게 넘치는 것도. 떠받들어지는 게 익숙했던 것도. 귀족과는 연관이 없다고 했던 것도 모두. 로궤의 칼레파였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루는 세 명의 칼레파 중 누구일까.
서기장, 지휘관, 인도자……. 흠. 역시 행동 대장? 하지만 귀찮은 일을 나서서 하는 성격이 아닌데. 그럼 영업 사원? 말솜씨가 좋기는 하다만.
무엇보다도.
‘칼레파씩이나 되는 인물이 어째서 요리사 노릇이나 하고 있는 걸까.’
루의 정체를 알면 그 의문이 조금은 풀릴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 오히려 의문은 짙어지기만 했다.
“디안 케트의 유물을 찾고 있는 위험한 자들. 누구야?”
“북대륙연합교국의…… 로궤.”
예거시의 증언에 따르면, 로궤는 나처럼 디안 케트의 유물을 찾고 있다. 찾는 건 좋다, 이 말이야.
‘그런데 칼레파가 직접 움직인다고?’
성회교로 따지면 교황이 직접 찾아 나서는 격이지 않은가?
확신컨대, 루에게는 디안 케트의 유물 외에도 또 다른 목적이 존재할 것이다.
디안 케트의 눈알을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담백했던 것을 떠오르면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그런데 우리 친구는 로궤에 대해 잘 아네.”
“……마도 전쟁에서 살아남은 암살자들은 대체로 로궤에 대해 정통한 편이지.”
“왜 살아남은 암살자들이 로궤에 대해 정통한데?”
집사 암살자는 한층 어두워진 안색으로 나를 쏘아봤다.
“이유는.”
“이유는?”
“60초 후에 공개하겠다.”
굳이? 나는 60초를 셌다. 그러나 70초가 지나도 집사 암살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60초 후에 공개한다며?”
그는 드물게 짜증스러운 눈으로 대꾸했다.
“눈치가 없군.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뭐야, 그건. 암살자들만의 대화법인가? 나중에 써먹을 수도 있으니까 기억해 놔야지.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쉽겠지만, 루에 대한 정보는 일부 무효야. 이번 거래는 내 쪽의 수지가 안 맞아. 추가 정보를 부탁해야겠어.”
“충분히 납득되는 이의 제기다. 받아들이지. 나 역시 한마디 하겠다.”
“해.”
“베리드 렛이 곧 이 지부의 상태를 눈치챌 거다. 지금까지는 내가 문제없이 이 펍을 통제했지만, 베리드 렛이 움직이면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대처는 해 놨나?”
아니.
“안 했군.”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귀족회에서 개고생하고 온 나를 기다리는 건 오로지 새로운 일감. 일감. 일감뿐이다.
하녀의 삶은 이토록 고단하구나.
“고민해 볼게. 어찌 되었든 이곳은 우리에게 있어 전투 기지나 다름없는 격이니까.”
등을 돌려 창고를 나서려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집사 암살자가 내 발목을 재차 붙잡았다.
“하나 더.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물을 게 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를 바라봤다.
“뭔데? 하려면 한 번에 해, 자꾸 묻지 말고.”
이번에 나를 쳐다보는 집사 암살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확신컨대 이번에 나올 사안이야말로 집사 암살자가 가장 깊게 고심하고 오래 염두에 둔 사안일 것이다.
그는 더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욕실 물때는 어떻게 관리하지? 매일 닦아도 매일 쌓이는군. 하녀만의 팁이 있나?”
욕실 물때. 그렇군.
네 녀석, 아주 무서운 놈과 싸우고 있구나.
“팁은. 없다.”
“……정말인가?”
“없어. 욕실의 물때. 그 녀석은 그냥…… 성실함만이 답이다.”
집사 암살자가 차가운 눈을 빛냈다.
“성실함이라. 명심하지.”
* * *
디안 케트의 다섯 가지 유물.
이 유물은 통상 다음의 다섯 물건을 칭한다.
<디안 케트의 눈알, 디안 케트의 일기장, 디안 케트의 손거울, 디안 케트의 인장, 디안 케트의 열린 새장.>
듣기만 해도 난해하고 잡다한 이 구성은 말 그대로 디안 케트가 남긴 유물이다.
일기장의 경우 디안 케트 본인의 필체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며, 손거울과 인장에는 사용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니. 마도구인 동시에 생활 물품이었던 셈이다.
집사 암살자가 내게 넘긴 수첩에 따르면, 이 중 무려 세 가지가 대중에 공개된 전적이 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유물이 바로 <디안 케트의 일기장>이다.
‘현재 웨스트윈트리 얀셴 전시관에 전시 중이라…….’
얀셴 전시관은 유명한 보물 수집가인 폴로 얀센이 세운 전시관으로, 간단히 말해 보물 자랑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곳의 하이라이트이자 심장이며 가장 깊숙이 전시된 <디안 케트의 일기장>이 내 두 번째 목표였다.
‘그런데 검성은 어째서 이 물건을 건들지 않고 있는 걸까?’
유물 중 하나가 이렇게 대놓고 전시되어 있는데. 대놓고 전시하는 만큼 훔치기 쉬우니까 일단 내버려 두는 것일까?
이 의문은 웨스트윈트리에 도착하기 전까지 잠시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예상보다 더 일찍 들이닥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