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드르륵.
언제 왔는지, 채소 바구니를 옆에 낀 루가 내 옆에 의자를 꺼내고 앉아 아스파라거스를 다듬기 시작했다.
일부러 안 보일 때 하녀장에게 물어본 건데. 얌체 같은 놈.
“과거의 로궤는 북데우스산맥을 중심으로 한 북쪽의 북로궤 교회, 남쪽의 남로궤 교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불리는 로궤는 그 둘 중 북로궤 교회를 일컫죠.”
북로궤 교회.
‘뭐야, 그게 로궤였어?’
어쩐지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 본 것 같은데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다 싶었다.
10년 전에는 그래도 북로궤 교회로 계속 불렸던 것 같은데. 이제는 완전히 로궤로 불리나 보구나.
“남로궤 교회는……. 처음에는 특별할 것 없는 종교였다고들 해요. 성회교와도 나쁜 사이는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남로궤 교회는 선도사가 없었거든요.”
성회교는 펜 로타 제국을 포함한 주요 연합국의 국교이다.
다만 제국 내에서는 위세가 많이 약해, 미드윈트리 같은 대도시에나 종교 의식이 치러지는 성회전이 자리했다.
“그러다가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손을 잡았고, 마도 전쟁에서 마도 연합군에 의해 궤멸. 사실상 역사에서 사라진 수준이죠.”
메피스토를 추종했던 마법사들 대부분은 이 남로궤 교회 소속이었다.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눈에 보이는 남로궤 교회의 신전을 모두 불태웠다.
신전 지하에는 종종 끔찍한 살육의 흔적이 발견되고는 했는데, 매복이 필요할 때면 썩은 시체 옆에 숨어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로궤’라는 뿌리로 묶여 있다 보니, 북로궤 교회 역시 사람들에 의해 많은 지탄을 받았어요. 남로궤 교회가 메피스토에 가담할 동안 말리지 않고 무엇 했냐는 여론이었죠. ……하지만 종전 후, 연합군이 북로궤 교회로부터 마귀 토벌을 비롯해 다양한 마법학적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하녀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타샤 역시 마귀 토벌을 위해 뭔가 복잡하고, 백날 설명해 줘도 모를…… 그런…… 새로운 이론의 마법을 여럿 배웠는데. 모두 북로궤 교회의 마법사들이 전수한 마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북로궤 교회가 주장하기를, 남로궤 교회는 교리를 무시하고 도망친 변절자들이라더군요. 독립적인 단체일 뿐, 같은 뿌리의 분파로 인정하려 들지 않았어요. 마도 연합은 그 주장을 인정하고 북로궤 교회의 명칭을 로궤교로 수정. 이후 남로궤 교회는 메피스토의 군대로 역사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종전 후 그런 과정이 있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려던 나는 두 번째로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칼레파가 뭔지도 알아?”
“칼레파요? 물론 알죠. 그건…….”
그때, 주방 창밖으로 한차례 큰 바람이 불었다.
태풍처럼 몰아친 바람은 뒤뜰에 걸린 침구의 일부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이런, 갑자기 바람이! 칼레파에 대해선 다음 시간에 알려 줄게요. 데이지 양은 따라오지 말고 루 씨를 도우세요. 나 참, 비가 오려나.”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 비가 오기는 무슨.
‘루가 꼼수를 썼군.’
하녀장이 다급히 떠난 자리.
나는 표정 변화 없이 아스파라거스를 다듬고 있는 (심지어 꼼꼼하게) 루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루 씨는 다른 할 말 없어? 로궤에 대해서 말이야.”
껍질을 살살 벗기던 루의 칼질이 멈추었다. 고개를 돌린 그가 나와 지그시 눈을 맞추며 첫입을 뗐다.
“데이지 양.”
왜? 무슨 말을 할까 싶어 심장이 두근두근 뛰…….
“먹기 좋게 반절로 잘라.”
……기는 무슨.
나는 서랍에서 새 식칼을 꺼내, 루가 다듬은 아스파라거스를 반절로 잘랐다.
네 이놈, 솜씨 좋은 요리사. 내 기필코 칼레파가 무엇인지 알아내리라.
그날. 나는 루가 만들어 준 맛있는 저녁을 먹고, 자정쯤 펍으로 가 집사 암살자를 만나려다가.
깜빡 잊고 또 잠들었다.
다음 날.
약속과 달리 하녀장은, 칼레파가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오늘 수업은 취소입니다.”
뭐?
“어째서?”
“뒤뜰 쪽 수도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한번 확인해 본 후 사람을 부를 예정입니다. 혹시 모르니 물이 필요하면 정원 쪽 물을 사용하세요.”
그 말과 함께 하녀장은 쌩하니 뒤뜰로 떠났다.
‘이렇게 갑자기 뒤뜰 쪽 수도관에 문제가 생긴다고?’
나는 현관에 선 채 이 일의 주범이 분명할 루를 노려봤다.
정원에 물을 뿌리던 루가 싱긋 웃으며 내 심기를 건드렸다.
“우리 데이지 양이 왜 그렇게 뜨겁게 노려볼까. 또 고백하려고? 미리 거절하지.”
“방해하지 마, 노인네. 속 좁게 왜 자꾸 방해해?”
“사람이란 나이를 먹으면 속이 좁아지는 법. 나는 웬만한 노인들보다 두 배 나이가 많으니까 두 배로 속이 좁아. 알아 둬.”
뻔뻔한 인간 ‘루’는 양심이라고는 일말도 느끼지 못하는 얼굴로 화분 ‘루’에 물을 줬다.
화분 ‘루’의 이파리가 건강하게 흔들리는 꼴을 보니 이가 갈렸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침실로 올라오니, 오전까지 보이지 않던 새로운 쪽지가 창문에 꽂혀 있었다.
『낮 시간 내에 펍으로.』
이 난해한 암호문. 집사 암살자의 전언이었다.
‘그간 계속 미루기는 했지.’
나는 바닥 청소용 솔을 새로 구비해 오겠다는 명목하에 심부름값을 받고 시장으로 나갔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 감자 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감자 노인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크게 코를 골고 있었다.
‘좋아. 아주 잘 졸고 있군.’
감자 노인의 역할은 펍 근방에 서성거리는 수상한 자를 골라내는 것.
가장 바쁜 시간대에 가장 열렬히 조는 것만큼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 길도 없지.
시장으로 들어가 잡화점에서 바닥 청소용 솔을 산 후, 그 옆의 과일 가게에서 서성이다가 혹시 주변에서 로궤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로궤?”
함께 수다를 떨고 있던 사진점 주인이 턱을 쓸며 나를 바라봤다.
“험. 로궤라……. 어디서 들어는 봤는데?”
“사이비 아녀? 요 근처에도 홀려서 간 놈 몇 명이 있다잖아. 그놈들이 메피스토 그 연쇄 살인마 놈을 도와준 놈들 아니야?”
“아니지, 아니지. 그건 형제 종교고. 로궤는 연합군을 도와준 종교일걸?”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이 정보력.
이들에게서는 아무래도 로궤의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랬어? 난 로궤가 뭔지는 모르것고. 아가씨 그 이야기 들었어? 그 상인 연합회를 엎어뜨린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 펍의 깡패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뒀나 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시장 길바닥을 청소한다니까?”
방금 처음 들었다. 이제는 시장 청소도 하는구나.
“어허. 거뿐이야? 골목길에 감자 파는 할매 알지? 깡패들이 그 할매한테 사죄한다면서 가판대를 하나 사 드렸대. 때깔 좋은 걸로 끌어왔는데 할매가 한사코 거절했다나. 나이도 드셨는데 편하게 좀 장사하시지.”
“그것이 다 그 노인의 장사 철학 아니겄어? 우리가 뭐라 할 게 못 돼. 가끔 도와나 드리자고.”
고개를 활기차게 끄덕인 상인들이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아무튼. 그 영웅 덕분에 우리 시장이 참 살기 좋아졌어. 누군지 몰라도 차암 사람 된 영웅이야.”
“암! 영웅이고말고. 자, 아가씨. 어서 한 입 해. 오늘 딸기는 정말 달어. 한 바구니 줄 테니까 가져가.”
나는 입 안에 쑤셔 넣어진 커다란 딸기를 씹으며 거절했다.
“돈 없어.”
허허, 웃은 과일 상인이 내게 딸기를 한 아름 안기며 대답했다.
“아이고, 돈은! 됐어, 됐어! 어서 가져가! 돈 같은 걸로는 못 갚는 은혜인데, 뭘.”
“은혜?”
“아냐. 말실수야, 말실수. 어서 가. 나 과일 팔아야 해. 딸기 부족하면 또 오고, 아가씨.”
“딸기 말고 사진 필요하면 우리 사진사로 와. 기깔 나게 찍어 줄게. 열 장까지는 무료니까 돈 걱정 말고. 응?”
원래 선물은 거절하는 거 아니다.
나는 딸기를 품에 안고 ‘펍에 물건을 놓고 왔네!’ 수법을 통해 조심스럽게 펍 안에 발을 디뎠다.
문에는 <휴일> 팻말이 달려 있었다.
끼이익.
문이 닫히기 무섭게 펍 곳곳에 자리해 있던 조직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누님! 오셨습니까!”
“어, 그래. 쉬어.”
전체적으로 부산스러운 분위기를 봐선 내부 인테리어를 새로 손보는 듯했다. 전등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더 밝아진 것 같은데.
‘이것들이 시장 청소도 하고 감자 노인의 가판대도 만들어 줬다, 이건가.’
역시 폭력은 세상을 구한다. 앞으로 더 열심히 폭력을 휘두르며 다녀야겠다.
나는 바텐더에게 딸기를 선물로 건넸다.
“먹어.”
바텐더가 경악하며 내게 물었다.
“이 귀한 딸기를…… 감사합니다, 누님! 이봐, 딸기를 사 오신 누님에게 감사 인사 꼭 남겨라!”
“감사합니다, 누님.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시끄러운 조직원들에게서 벗어나, 창고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창고에는 언제나처럼 커튼을 뒤집어쓴 집사 암살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음산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의뢰는?”
그가 내게 한 의뢰는 진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권이 박탈되는 것.
해당 사안을 대가로 결투에 임해 승리를 얻었지만. 검성의 모호한 태도 때문에 실제로 이루어질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른다.”
집사 암살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음산해졌다.
“모른다고? 우리의 협력 관계가 어찌 되든 상관없단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아니. 대신 네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가져왔다.”
“……선물?”
“진 버클리그레이튼.”
“…….”
“웨더우즈의 하녀로 고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