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너는 네 몸을 남이 그렇게 지분거려도 괜찮은 거냐고 물으려다 참았다. 괜찮으니 놔뒀던 거겠지.
“미? 그 ‘미’는 뭐야. 애교인가.”
“미는 ‘미쳤어?’ 혹은 ‘미친놈’이라는 뜻이야. 루 씨에게 미쳤냐고 묻기도 지친 내가 새롭게 고안해 낸 줄임말이지. 절대 애교 같은 게 아니야. 알았어, 미?”
“아하, 창의적인걸. 들어도 애교랑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미?”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루가 날 보며 조소했다.
그래, 그게 네 웃음이지. 나는 한결 평온해진 기분으로 그를 지나쳤다.
작은 공중 온실 한쪽에 너른 침대가 보였다.
미? 숲속의 침대라고? 너무나 동화 같은 풍경이라,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달려가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세상에나.
“미?”
이런 미치도록 포근한 침대를 다 봤나. 이렇게 편안하다고?
나는 등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를 포근히 감싸는 감촉에 말을 잇지 못했다.
긴 두 다리를 휘적거리며 느릿느릿 쫓아온 루가 침대에 뒹굴기 바쁜 나를 오묘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상당히 기분 나쁜 시선이다. 나는 포근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루를 노려봤다.
“뭔데? 할 말 있으면 해.”
루는 그딴 거 없다는 얼굴이다. 없기는.
“방금 나 보면서 무슨 생각 했잖아?”
“……아, 생각. 하기야 했지. 내 침대에 다른 사람이 누운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라는 생각.”
흠.
“크흠.”
스리슬쩍 일어나, 침대 옆에 자리한 소파로 향했다.
소파도 말만 소파지 내가 쓰는 침대만큼 넓고 높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소파에 앉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내 침대인 양 굴었네. 이제 부부인 척도 끝났으니 다시 내외하자.’
루라면 분명 ‘나랑 그렇게 한 침대를 쓰고 싶었어? 아, 침대 위에서 벗기려고 그러는구나? 자, 벗겨.’라며 놀릴 줄 알았는데, 순순히 내 맞은편에 앉는다.
그런데 루가 맨몸에 바지만 걸친 꼴이라 심리적 불편감이 가중되었다.
마법사 주제에 5년은 검술에 매진한 무인처럼 완벽한 몸이라서 더 껄끄러웠다.
나는 온실을 구경하는 척 사방을 살피며 물었다.
“루 씨. 칼레파가 루 씨의 진짜 이름이야?”
대답은 의외로 시원시원했다.
“아니.”
그럼 칼레파는 무슨 뜻인데? 라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격식 있는 걸음이 풀을 지르밟고 다가왔다.
작은 물푸레나무 너머에서 나타난 이는 이제껏 봐 온 자들과 달리, 평범한 현대 의복을 걸친 흑발의 남성이었다.
‘검사.’
나는 허리춤에 달린 남자의 장검을 바라봤다.
공명이 들리지 않는다.
자세로 보나 기세로 보나 어쭙잖은 실력은 아니었다.
그 말은 즉, 공명을 숨길 만큼 뛰어난 실력의 검사라는 뜻이리라.
남자는 꽤 능숙한 제국어로 첫입을 뗐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레파. 세뇨트들을 쫓아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대신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흑발의 검사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루를 살폈다.
아니, ‘루만’ 살폈다.
아까 변태들도 그렇고. 이 비행선에 오른 외국인들 눈에는 내가 투명 인간으로 보이는 것일까?
“환복하다 마셨군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한 흑발의 검사가 바닥에 검을 내려놓고 루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루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리 잡더니,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루의 바지춤을 잡아챈다. 이어서 천천히 바지를 끌어 내리이으허으아악.
“정지!”
이 변태 자식들은 상식도 없나 봐.
내 간절한 외침에 흑발의 검사가 몸을 돌렸다. 한껏 경계하는 눈으로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려 둔 모습이 여차하면 내 목을 그어 버릴 기세다.
‘하지만 이자는 방금 전 변태들과 달라.’
이 검사에게 있어 루를 버…… 버, 벗기는 행위는 일이나 의무에 가까워 보였다. 이 비행선의 외국인들은 여러모로 이상하단 말이지.
‘같은 행동을 해도 누구는 불쾌한 의도를 품고 있고, 누구는 의무감만 지니고 있으니.’
오직 변태와 쓰레기에게만 육체적인 대화를 사용하는 법.
나는 현대인답게 대화를 시도했다.
“안녕.”
상대의 경계심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제국어를 할 줄 아는 자가 ‘안녕’을 못 알아들었을 리 없고. 나는 외국인을 배려하기 위해 제국어를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뱉었다.
“나는 데이지 파거입니다. 칼레파의 직장 동료입니다. 칼레파는 벗을 옷이 아니라 입을 옷이 필요합니다.”
남자의 얼굴이 순간 벙쪘다. 그는 루를 바라보며 물었다.
“칼레파, 이분은…….”
루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못 들었어? 직장 동료.”
“직장 동료……. 말씀이십니까?”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반문에 나는 미간을 구겼다. 외국인이라서 직장 동료를 못 알아듣는 건가.
뭐, 그건 중요한 정보가 아니니까. 나는 루를 가리키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칼레파는 옷이 필요합니다.”
흑발의 검사가 나를 다시 바라본다. 미친놈을 보는 눈이었다. 이 자식, 제국어로 ‘환복’도 아는 주제에 ‘옷’은 모르는 거야?
“칼레파는 옷이 필요합니다.”
“…….”
“옷! 이거. 내가 입고 있는 이런 거. 칼레파는 옷이 필요하다.”
외국인과 손짓 몸짓으로 대화하는 내 꼴이 우스웠는지, 한 차례 낮게 웃은 루가 남자에게 턱짓했다.
“뭐 해? 입을 옷 가져와. 자꾸 칭얼거리잖아.”
“……예, 알겠습니다.”
석연치 않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흑발의 검사가 온실을 떠났다.
‘뭐야, 알아들었으면서 왜 이렇게 행동이 굼떠?’
하여간 루의 지인들이라 그런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점이 없다.
하지만 나는 비행선을 얻어 타는 입장.
결과적으로 루의 옷도 얻어 냈고, 변태도 아니니까 얌전히 굴자.
나는 현대 마법학의 집합체나 마찬가지인 비행선의 온실을 꼼꼼하게 구경했다.
제아무리 고순도, 대량의 정제석을 실었다고 하더라도, 장기 여행을 떠나는 비행선 안에서 이런 수준의 복잡한 생태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설마 아까 그 서른 명이 다 마법사인 건가?’
아니면 북대륙연합교국의 마법학은 제국의 마법학 수준을 한참 넘어서는 것일까?
“이런 곳 처음 봐?”
구경하는 내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루가 조금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질문 딱 한 개만 받을 테니까 머리 잘 굴려 봐.”
갑자기?
의심스러운 눈으로 루를 훑어봤다. 아니, 훑어보다가 말았다.
가슴이 너무 흉흉하게 잘생겨서 도무지 못 쳐다보겠다. 군대에서 매일같이 보던 게 남자의 알몸인데 새삼스럽게 왜 불편한 거람.
“……무슨 질문이든 상관없어?”
“그럴 리가.”
나는 머릿속으로 천천히 질문을 골랐다.
가장 좋은 건 역시 루의 목적이나 신분을 묻는 건데.
질문하면 분명히 ‘그런 탐욕스러운 질문을 하다니, 꽃도 못 피운 주제에 날로 먹으려 들어?’라고 대답할 게 뻔하니까.
적당히 무난한 걸로 고르자.
“루 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
그사이 루는 검사의 시중을 받아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외투처럼 가볍게 걸친 옷은 루의 머리보다 조금 더 짙은 청색에, 은빛 화려한 자수가 놓인 전통 코트 형식이었다.
저런 나풀거리는 옷을 입으니 사람이 달라 보인다. 거만하고 오만해 보이는 모습이 루에게 제격이었다.
고민에 빠진 듯 가만히 턱을 쓸던 루가 흑발의 검사에게 물었다.
“내가 몇 살이었지?”
남자는 가볍게 대답했다.
“올해 179세 되셨습니다.”
……뭐?
“벌써? 흐음. 맨 뒤에 숫자는 빼고 대충 열일곱 살 정도로 알아 둬, 데이지 양.”
그게 되겠냐?
‘디안 케트와 안면 있는 사이라고 할 때부터 적잖이 예상하긴 했지만. 179세라고? 그게 가능해?’
문제는 거짓말 같지가 않다는 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평범한 인간은 179년을 살아갈 수 없다.
‘강력한 마도구로 생명을 연장했거나, 소드 마스터급의 깨달음을 얻었거나. 둘 중 하나겠어.’
나는 순수한 감탄사를 뱉으며 루의 얼굴을 살폈다. 200세가 가까운 할아버지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외모였다.
“루 씨는……. 생각보다 더 늙었구나.”
흑발의 남성은 내 말에 기함하며 루를 돌아봤다. 루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굉장히 노땅이야.”
흑발의 남성이 내 말에 반쯤 분노하며 루를 돌아봤다. 루는 내게 대충 사과했다.
“미안하군.”
“앞으로는 조금 더 연장자 대우를 해 줄게.”
“아, 그건 정말 고마워 돌아가시겠어.”
“돌아가시지는 말고.”
이후 나는 아주 잠깐 잠들었다.
낮잠 자듯 가볍게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떴을 때 밖은 새까만 어둠이었다. 게다가 전에 그랬듯 오늘도 침대에 누여진 상태였다.
“으으.”
루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잠이 잘 온단 말이야.
길게 기지개를 켠 직후, 루가 나를 데리고 온실 밖으로 나섰다.
비행선은 이미 미드윈트리 고속 비행정 역에 정박하고 있었다. 설마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를 땅으로 안내한 흑발의 검사가 루를 향해 무릎을 꿇고 인사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건강하시길, 칼레파.”
그의 배웅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미드윈트리 고속 비행정 역을 떠났다. 긴 개고생 끝에 집에 돌아온 것이다.
이번 외출에서 배운 점이 하나 있다.
다시는…….
다시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을 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