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95)

48화

여기, 예고 없이 맞이한 낯선 문화권에 당황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데이지 파거.

바로 나다.

“- -- - -!”

“- -- - -!”

한눈에 봐도 수상한 자들이 루를 맞이하는 이 상황. 이런 당황스러운 사태에는 객관적인 판단력과 관찰력이 필요한 법.

나는 차분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장소는?

‘루가 호출한 비행선. 크기는 소형이지만 전체적인 외관을 봤을 때 양산형으로 보이지 않음. 값비쌀 게 분명함.’

시각은?

‘오후 2시 30분. 미드윈트리로 돌아가는 길.’

상황은?

‘비행선에 오르니 이상한 사람들이 무릎 꿇은 채 소리치며 루를 맞이하고 있음.’

상대는?

‘대략 서른 명. 외국인. 하얀색 북방식 옷에 하얀 베일을 쓰고 있어서 턱만 보임. 대체로 남자. 여자는 둘 정도.’

북방식 의복.

‘……그래, 자세히 보니까 저 사람들 모두 북대륙연합교국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잖아?’

그것도 현대 의복이 아니라, 어릴 적 책에서나 봤던 전통 의복에 가까웠다.

손을 가릴 만큼 길고 넓은 소매와 좁은 허리 라인. 진주와 황금으로 장식된 허리띠와 귀걸이.

게다가 서른 명이 하나 같이 동일 색을 맞춰 입으니 종교 의식이라도 치르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한 줄 정리.

‘외국인 서른 명이 모여서 종교 의식 비스름한 행동을 보이고 있음.’

결론 도출.

‘……사이비!’

세상에, 루.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사이비 교주였다니!

논리적인 추리에 대한 확답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루를 쳐다봤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환대의 주인공인 루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그가 당연한 환대라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면 내 추리에 신빙성이 더해졌을 텐데.

그는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는 양, 양쪽으로 늘어선 복면인 사이를 조용히 지나쳤다.

거만함도, 당연함도 느껴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내 추측이 틀린 건가.

‘그럼 이 사람들 대체 뭐지?’

뭔데 환영이 이렇게 거창한 거야?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이상했다.

군인처럼 경직된 분위기. 난세의 영웅을 부르는 맹목적인 외침. 정복자 앞에서 예를 차리는 듯한 복종의 자세.

이 모든 것이 이 한자리에 존재한다. 어찌 이상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칼레파! 칼레파! 칼레파!”

어느 순간부터인가 끝없이 연호하는 저 단어.

‘칼레파?’

루의 본명인 것일까?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루를 쳐다봤다.

정면을 향해서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그는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사르륵.

루를 뒤따라서 흰 바탕에 금실이 수놓아진 천을 거두고 비행선의 더 깊은 공간으로 이동했다.

각기 다른 그림이 새겨진 천을 네 번 정도 더 지나치자 사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이어서 전에 본 적 없는 환상적인 풍경이 나타났다.

유리로 된 벽면을 배경으로, 초록빛에 물든 온실이.

“와아.”

머리 위로 붉은 꽁지깃의 작은 새가 날아갔다.

지지배배 우는 청량한 새 울음 틈으로 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행선은 분명 고립된 공간이고, 그런 곳에서 물줄기가 흐르는데도 습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벽 너머에는 너른 창공과 숲이.

발아래에는 천국의 동산을 머금은 듯한 작은 온실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이 비행선에 쏟아부은 걸까?’

어쩌면 루는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부유할지도 몰라.

그때, 앞서 걷던 루의 곁으로 낯선 인기척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들어온 인원은 셋이었다.

루를 환대했던 자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으로 무장한 그들은, 루 옆에 바짝 붙어 조심스럽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놈들인가?’

왜 내 앞에서 벗기는 건데?

심지어 루는 남들이 제 옷을 벗기거나 말거나, 온실 안쪽으로 유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런 식의 접촉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여기만의 방식인가 본데. 루가 놔두니 내가 언짢아할 수도 없고.’

어찌 되었든 나는 이 비행선을 얻어 타게 된 처지니까.

옷 벗는 꼴을 지켜보기도 뭣하니 온실 구경이나 해야겠다.

하지만 그러한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한참 동안 루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음.’

놈들이 루의 영 아니올시다인 부위까지 손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세심하게. 마치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어린아이 대하듯이!

‘저렇게까지 한다고?’

설마 루는 밥까지 떠먹여 주는 집안의 도련님인 건가?

심지어 루는 변태 놈들이 어디를 어떻게 만지든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꼴을 보니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가풍이라면 외부인인 내가 이해해 줘야 하겠지만.

‘이해하기 싫네.’

싫을 만큼, 괜히, 어쩐지 더, 자꾸 신경 쓰이게 불쾌해.

왜 불쾌한 것일까? 내가 루의 입장이라면 불쾌할 것 같아서? 아니면 내 눈앞에서 다 큰 남자가 어린애처럼 대해지는 게 꼴 보기 싫은 걸까?

‘모르겠어.’

분명한 점은 하나다.

짜증 난다. 멈추게 하고 싶다.

그렇다면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였다.

“손.”

일순 움직임을 멈춘 세 명의 남녀가 나를 돌아봤다.

그들에게 선언했다.

“내가 벗길게.”

“…….”

“지금부터 루의 환복은 내가 집도한다. 공짜로 비행선을 태워 주는 보답. 거절은 거절.”

아, 이 사람들 외국인이었지. 언어가 안 통하려나?

걱정은 무색했다. 가장 열성적으로 루를 벗기던 남자가 아랫입술을 씹으며 나를 노려본 것이다.

“이 무엄한. 칼레파 앞에서 이런 불경한 짓을…….”

불경?

‘여기선 외부인이 루의 옷을 벗기는 게 불경한 짓인 건가.’

별 해괴한 수칙이 다 있네.

한데 남자는 나를 질타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죽음으로 불경을 갚아라!”

죽음?

“아니 그건 좀.”

남자의 신형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그에 나는 반사적으로 남자의 뺨을 후려쳤다.

이건 정당방위다. 죽으라고 해서 죽어 줄 수는 없잖아?

“컥.”

변태의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그러나 근성을 잃지 않고 쓰러지는 척 발을 디뎌 내 목덜미를 쥐려 하기에, 반대쪽 뺨도 때려 주었다.

남자는 기절했다.

“…….”

“…….”

“…….”

길어지는 침묵 속.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자기 변호했다.

“정당방위.”

남은 두 명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반쯤 벗겨진 루의 셔츠 소매를 양쪽으로 꼬옥 쥔 채 마른침을 삼킬 뿐이었다.

“……하.”

침묵을 대신한 것은 짧게 터진 웃음이었다.

아니,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웃음은 곧 긴 폭소로 이어졌다.

나는 어깨를 흔들며 정신 못 차리고 웃는 루의 얼굴을 멍하니 주시했다.

저렇게 무방비하게 웃는 루는 처음이라,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다.

실컷 감정을 토해 내던 루는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쳤다.

그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며 입가를 슬슬 쓸다가, 팔에 거추장스레 매달린 셔츠를 저 멀리 내던졌다.

위풍당당하게 상의를 탈의한 후.

루는 내 몸을 제 쪽으로 완벽하게 돌려세웠다. 그러고는.

“데이지 양.”

마주하는 내 등에 긴 소름이 일 만큼. 미치도록 즐겁고 행복한 눈이 되어, 내 뺨을 쓸어내렸다.

“내 옷이 그렇게 벗기고 싶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수줍음과 광기.

두 감정이 선명하게 밴 황홀한 미모를 마주하자,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너는 지금 모리안이 아니잖아. 모리안도 아닌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뭐지. 뭔가. 무언가. 무언가를, 들출 필요 없는 암막을 들춰 본 느낌이었다.

주춤 뒤로 물러서자 루가 손을 뗐다.

고개를 돌린 그가 두 변태를 향해 가벼이 턱짓했다. 나가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칼레파.”

“저희는 칼레파를 모시기 위해…….”

루가 입을 다물고 지그시 응시하자 두 남녀의 대거리가 멈추었다.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켠 그들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한 차례 무릎을 꿇고 가까스로 인사한 후 온실에서 사라졌다.

어디선가 새가 울었다.

그 어딘가를 무표정으로 응시하던 루가 아주 느리게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서는 대뜸 두 팔을 벌리고 한다는 소리가 이따위다.

“자, 나는 준비됐으니 나머지도 벗겨.”

오늘도 나는 고찰한다.

루는 미친놈이다.

그것도 심지어 미친놈이라는 세 음절을 소모하기도 아까울 만큼 미친놈.

그러니 이제부터 미친놈, 미쳤냐는 ‘미’로 줄여 쓰도록 하겠다.

“미? 루 씨가 스스로 벗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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