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95)

47화

“가족은 남동생. 거기에 성은 파거, 라.”

여러모로 안데르트의 누이가 떠오르는 조합이다.

하지만 과연 신뢰할 만한 정보일까?

이미 한 번 신분을 조작했던 여자이지 않은가. 데이지 파거라는 신분 또한 가짜일 확률이 높았다.

라파엘로는 기억 속에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각인된 여자의 얼굴을 다시금 되새겼다.

베르티, 아니, 데이지는 한마디로 정의해서 순박한 인상의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 부분이 유일하게 안데르트와 유사한 점이었다.

데이지는 표정 변화가 적은 편이라 다소 멍한 분위기이기도 했는데, 목소리까지 작았다. 그 탓에 성격은 가늠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더욱 안데르트와 연결할 수 없어.’

안데르트는 쾌활한 사내였다.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도 친구로 만들 만큼 무서우리만치 사교적이었고, 그래서 인간적인 매력이 더욱 물씬 풍겼다.

안데르트와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누었던 상대라면 그 누구든 안데르트를 궁금해했고, 알은체했으며, 인연을 이어 가려 노력했다.

“주인님. 저택에 청소 인력이 부족합니다.”

그와 반대로 데이지라는 여자는 나사가 하나 빠진 느낌이지 않았던가?

안데르트의 친누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 분명 그렇지.’

하지만 라파엘로 스스로도 진정으로 의문스러운 점은.

그럼에도 눈이 간다는 사실이었다.

라파엘로가 여자의 얼굴을 면밀하게 뜯어본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오죽하면 냉철한 드셰로가 당황하며 그를 돌아보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 같은 생각을 하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파엘로는 7시간 전, 이리겔 별장 비행장에서 지하르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지하르크는 구름 뒤로 사라져 가는 웨더우즈 자작 부인의 비행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선 모습이 의아해 다가가던 도중.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린 지하르크가 나직이 이름을 불렀다.

“라파엘로.”

지하르크는 단둘만의 자리에서 종종 그를 ‘라파엘로 공작’이 아닌 ‘라파엘로’라 부르고는 했다.

라파엘로는 그런 지하르크의 호칭이 불편하지 않았다. 둘은 전쟁터를 함께 헤쳐 온 전우였으니까.

“예.”

“웨더우즈 부인과 정확히 어떤 소동이 있었던 건지 물어도 되겠나?”

“공작님이 아시는 그대로입니다. 제국 남부 군도 생존자의 조사 여부와 관련해서 작은 소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네는 공적인 자리에서 그런 소동을 일으킬 사람이 아니지.”

라파엘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지하르크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하녀, 눈에 걸리기는 하더군. 이런 말 하면 비웃을 수도 있겠지만…… 순간 안데르트가 떠올랐어. 그의 친누이가 살아 있다면 그런 얼굴이지 않았을까 싶었지.”

이번에도 라파엘로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지하르크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귀족회에서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한 인물이 한 명 더 있었지.”

“……누구입니까?”

“그레이 웨더우즈 자작.”

라파엘로가 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할 동안, 지하르크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까 자네에게 했던 이야기 기억하나? 우리 진이 웨더우즈 자작과의 결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 말일세.”

“예.”

“진은 내가 가르치는 검사들 중에서 단연 발군이지. 검귀만 아니었다면 가로쉬와 그 아이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을 거야.”

“…….”

“이제 와 말하지만. 진을 가르치면서 종종 안데르트가 떠올랐네. 그래, 그 무정한 녀석의 검이 연상되고는 했지.”

무정한 녀석이라.

너무나도 적절한 표현이라, 라파엘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진 버클리그레이튼 양이 검귀이기 때문입니까?”

“내가 검을 휘두르는가, 검이 나를 휘두르는가? 나는 이 자문에 대한 답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는 사람일세. 그 질문 하나가 검의 길을 바꾸고, 끝을 바꾸지. 진과는 그래서 많이 부딪혔네. 그 아이는 거짓말에 서툴러. 말로는 모든 가르침을 흡수한 것처럼 굴지만, 검의 움직임은 달라. 진은 검에 휘둘리는 데 거리낌이 없다네.”

지하르크도 나이를 많이 먹었다.

그는 예전에 비해 말이 많아졌다.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후계자들을 언급할 때 특히 그랬다.

“내가 가르치려는 길과 정반대의 길을 가려 하니, 진의 눈은 더 이상 나로 차지 않아. 그 아이는 자신의 검이 나아갈 길을 뚫어 줄 새로운 스승을 필요로 해. 그런 진을 홀리게 할 상대라면 분명 같은 부류의 검사, 검귀밖에 없겠지.”

“…….”

“진은 그레이 웨더우즈에게 패배하고 또 홀렸네.”

차분하게 말을 잇던 지하르크가 돌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의 것처럼 천진함이 묻어 나오는 웃음에 라파엘로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지하르크가 저렇게 웃는 모습은 종전 이래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하하. 그거 아나? 웨더우즈 자작의 손은 검사의 것이라고 상상도 못 할 만큼 부드럽더군. 마치 고양이 손바닥처럼 말이야. 검은 배워 본 적도 없다고 말했으니 당연해. 하지만…….”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초록색 눈동자가 차게 가라앉았다.

“굳은살은 숨겨도 골격은 숨기지 못하니 무슨 소용이겠나. 그의 손바닥은 후천적으로 변형되어 있었어. 장시간 단련된 검사의 손이었지. 정확히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만.”

“…….”

“라파엘로. 자네는 내가 망상에 빠졌다고 생각하나?”

지하르크는 자신의 망상이 무엇에 대한 망상인지 구태여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는 웨더우즈 자작과 안데르트 사이에 분명한 연결점이 있을 거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라파엘로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레이 웨더우즈…….’

실력을 숨기려 하는, 뛰어난 검술의 왼손 검사.

검귀를 홀리는 검귀.

소드 마스터인 검성의 통찰력과 육감.

하지만 그것만으로, 웨더우즈 자작을 안데르트와 연결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아니, 확실히 부족했다.

왼손잡이 검귀. 비록 드물다고는 해도 온 세상을 쥐 잡듯 뒤지면 열에서 스물 정도는 필시 찾아낼 수 있는 존재이지 않은가?

라파엘로는 빠르게 멀어지던 지하르크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망상.’

지하르크는 쉽게 망상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성은 라파엘로보다 더 차갑고 매정했다. 주목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머리로는 의심할지언정 입으로는 뱉지 않았다.

그 말은 즉…….

‘웨더우즈의 하녀가 퀸 섬의 생존자라는 걸 지하르크 또한 아는 건가.’

제국 남부 군도는 19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주자 20만 명 이상의 대형 군도이며, 퀸 섬은 그중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이었다.

‘나는 분명 데이지 파거가 제국 남부 군도의 생존자라고 했지, 퀸 섬의 생존자라 언급한 적이 없는데.’

라파엘로의 눈이 얇게 좁혀졌다.

퀸 섬을 포함한 제국 남부 군도의 모든 정보는 군사 기밀이다.

‘내 전서를 중간에 강탈해 갔던 자가…… 지하르크 공작이었군.’

퀸 섬에서 전달된 전서를 두 번이나 습격했던 상대. 그자가 바로 지하르크였던 것이다.

라파엘로의 전서는 중요 군사 기밀로 취급된다. 라파엘로 본인이 제국 군부 총사령관이니 당연했다.

지하르크는 그런 전서의 루트를 확보할 수 있는 몇 없는 인물이었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드셰로.”

“예.”

“이리겔 별장 테러와 지하르크 공작의 연관성을 조사해 봐.”

당황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드셰로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용의자로 그분을 의심하고 계시는지요.”

“그래.”

“증거가 있습니까?”

“아니, 단순한 감이다.”

드셰로는 장난과도 같은 라파엘로의 답을 조금도 비웃지 않았다.

라파엘로의 짐승과도 같은 감이,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접점을 알아보겠습니다.”

라파엘로는 의자에서 천천히 등을 뗐다.

그의 머릿속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계획이 빠르게 세워지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했다.

머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전신에는 심장이 홧홧해질 만큼 뜨거운 피가 돌았다.

눈앞이 선명해지면서 피부 위 솜털이 바짝 섰다.

날뛰려는 본능을 저지하듯, 라파엘로는 느리고 나른한 숨을 뱉어 냈다.

이 심장의 울림. 대체 얼마 만에 느껴 보는 흥분이란 말인가?

라파엘로는 자조하듯 웃었다.

‘나도 참 멍청하군. 그렇게 당해 놓고도 또 희망을 품다니.’

그를 마음속에서 내보내겠다고 다짐한 게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안데르트.

너는 정말 살아 있는 것일까?

“드셰로, 미드윈트리에 사람을 보내. 담당자에게 웨더우즈 가문과 데이지 파거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요청해라. 더불어 퀸 섬에 새로운 조사단을 파견한다. 이 문제는 내가 직접 지휘하도록 하지.”

드셰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웨더우즈 자작과의 재회가 몹시 기대되는군.”

라파엘로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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