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195)

43화

반신 디안 케트의 고향은 북대륙연합교국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저런 증거를 종합해 봤을 때, 루의 출신도 같은 곳이 아닐까?

고민하는 사이에 우리는 별장을 나와 다른 대피인들 틈에 끼어들어 와 있었다. 한창 주변을 둘러보던 볼크윈이 루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부인. 그레이는 어디 있습니까? 밖으로 나와도 보이질 않는군요.”

“그레이요? 제 남편은 많이 아파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안전한 곳에 있으니.”

“아프다니요? 어딜 다쳤습니까?”

“글쎄요? 그가 우리의 소중한 결혼반지를 깨뜨려서 제 마음이 다치기는 했네요.”

시무룩하게 가라앉은 미녀를 보고 있으니 내가 정말 천하의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내 팔에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은 루를 흘겨보고 있는데, 볼크윈과 함께 주변을 살피던 예거시가 조금은 의심스러운 투로 입술을 뗐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루가 얼굴만 예쁜 위험 분자라는 걸 알아챈 것일까? 역시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게다가 은근히 감동이네.’

명색이 부인인 루에게 재차 확인받을 정도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거잖아? 착한 놈.

나는 위험스레 눈매를 좁힌 루를 대신해 그의 걱정을 진정시켜 주었다.

“주인님은 진과의 결투에서 몸져누움.”

예거시와 볼크윈은 요상한 생물체를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볼크윈에 내게 되물었다.

“결투? 하지만 아가씨, 그레이는…… 진 양을 상대로 두 수를 물려주기까지 했다고 들었는데요.”

뭐야. 그새 떠들고 다녔어? 귀족 놈들은 하나같이 입이 가볍다니까.

“하지만 다침.”

“다쳤다면 더욱 우리가 돌봐야…….”

“주인님은 강함.”

“그래도 그레이는 웨더우즈 가문의…….”

그거참 신경 끄라니까 그러네!

라고, 소리치려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웨더우즈?”

나직한 물음 하나가 귓가에 억지로 때려 박혔다.

동시에 예기치 못한 인기척의 등장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습관처럼 주변의 인기척을 확인하고, 인지하고 있는 나였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항시 서 있는 내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이곳에 몇 없었다.

루와 검성. 그리고.

“제나일 각하.”

라파엘로.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양 바로 아래로 짙게 그늘진 이목구비가 보였다. 웨더우즈 자작의 머리칼보다 더 찬란하고 진한 빛깔의 금발이 햇빛을 받아 새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우직하면서 형형한 존재감. 단 한 마디로 좌중을 끌어당기는 강자로서의 강력한 마력까지. 내가 알고 있는 그 라파엘로가 지금 내 눈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차가운 선홍빛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감탄이었다.

‘말도 안 돼. 고작 4년 사이에 경지가 이렇게 올랐다고?’

못 본 사이 그의 무위가 놀랍도록 발전했다. 너무 높아져서 이제는 쉬이 힘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쩌면 그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을 수도 있다고 생각됐다.

두 번째로 느낀 감정은.

재회한 기쁨보다 살짝 앞선, 오묘한 낯섦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라파엘로는, 그래. 분명 내가 아는 라파엘로가 맞다. 한데 어느 방면으로는 기억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라파엘로가 이렇게…….’

이렇게…… 좀…… 성격 나빠 보이는 인상이었나?

그간 대체 얼마나 고생했기에.

‘뭐, 전쟁은 끝나고 나서도 문제라곤 했었지. 모두에게 존경받는 대공이란 위치가 쉽게 얻어지지는 않았을 거야.’

복잡한 감상을 뒤로한 채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물렸다.

원래 나 같은 고용인은 라파엘로 같은 높으신 나리와 눈을 마주칠 수 없다. 그런데 이것도 이거 나름대로 재밌네.

하녀로 변장한 네 친구가 감히 얼굴도 못 올려다보는 기분이 어떠냐, 라파엘로?

“…….”

하지만 일대는 너무나 조용했다.

이 어색한 침묵. 이상함을 느낀 나는 루의 뒤편에서 몰래 고개를 들어 라파엘로를 훔쳐봤다.

라파엘로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 소름이 뒷골을 타고 올라왔다. 의문을 가지기에는 너무나 확고한 시선. 저 눈은 필시 나를 아는 눈이다.

‘나를 안다고?’

어떻게?

걸음걸이? 블랙라갈호에 오른 이래 단 한 번도 본래 나의 자세로 걸은 적이 없다.

왼손잡이 검사로서의 습관? 예기치 못한 사태를 대비해 검을 들고 오지도 않았다.

얼굴? 안데르트와 내가 친남매 사이였다 해도, 눈 말고는 그다지 닮지도 않았다.

재수? 원래 없다.

그런데도 나를 안다는 것은…….

“남의 여자를 너무 오래 보네.”

촥, 봄의 햇볕을 막는 용도의 아담한 부채가 내 시야를 가리며 펼쳐졌다. 루의 부채였다.

“내 여자한테 반했나? 이런, 미안한데 못 줘. 다른 쪽 알아봐.”

제정신이 아니구나.

하지만 루가 제정신이 아닌 건 흔한 일이었기에 끼어들지 말고 얌전히 서 있기로 했다.

그의 부채 덕분에 라파엘로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므로.

“……북대륙 억양이 살짝 남아 있군. 웨더우즈 자작 부인께서는 연합교국 출신이신가? 아스트로사? 하렌트?”

라파엘로의 목소리다.

얼굴이 가려진 채 목소리만 들으니 확실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별빛 한 점 안 들던 새벽, 서로의 목소리에 의지한 채 늪지대를 건넜던 날이 떠오르…….

“내 여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모자라서 이제는 내 고향까지 캐물어? 이 몸은 조신한 자작 부인이니 방금 질문은 못 들은 것으로 넘기도록 하지.”

그리운 기분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 미친놈아.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크게 당황한 예거시가 루 앞을 가로막고 섰다. 친구의 아내가 미친개처럼 구는 꼴이 불안했나 보다.

“하하. 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나일 공작 각하. 저는 웨더우즈 자작의 친우인 예거시 파뉼라입니다. 현재 웨더우즈 자작의 몸이 성치 않은 상태라, 자작 부인께서 여러모로…….”

“지금 누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지?”

안쓰러운 예거시 녀석. 미친개는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해서 미친개인 것을.

“흠. 흐흠. 그, 자작 부인께서…….”

“이래서 키가 작으면 불편해. 별 같잖은 것들이 보호하려 들고.”

너 왜 그래? 이쯤 되니 나 또한 심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에 또 비위가 상한 거야? 잘 지내다가 왜 그렇게 수상한 티를 풀풀 내는 건데? 미쳤나? 물론 루는 미쳤지만…….’

나는 부채를 쥔 그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나를 돌아보는 얼굴에 살짝 고개를 내젓기까지 했다. 루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라파엘로가 말했다.

“아무래도 의도치 않게 오해를 산 것 같군요. 제가 부인의 하녀를 탐색한 이유는, 이성적인 흥미가 아닌 의무 때문입니다.”

“나는.”

어미를 길게 끈 루가 부채를 거두며 웃었다.

“내 여자가 하녀라고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루의 짧은 한마디는 내게 의문이 아닌 확신을 심었다.

‘나를 이미 알고 있구나.’

퀸 섬에서 벗어나 미드윈트리로 올라올 때까지 몰래 미행하던 자들이 떠올랐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네. 누군가 했더니 라파엘로가 보낸 스토커들이었어.’

한 달 가까이 쫓아다녔던 놈들이다. 그러니 내 몽타주도 필시 라파엘로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드셰로 자작.”

라파엘로는 루의 의문에 답하는 대신, 자신의 참모인 드셰로를 불렀다.

이제는 참모가 아닌 자작이라 불러야 할까?

회색 머리의 보기 드문 미남이었던 드셰로는 4년 전에 비해 인상이 크게 달라져 있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피곤해 보였다.

“웨더우즈 자작 부인. 제나일 공작 각하께서는 지난 4년간 제국 남부 군도의 보안 책임을 맡아 오셨습니다. 종전 후 드물게 군도에서 생존자가 나타나고 있고, 이 생존자를 보호 겸 감시하는 일 역시 공작 각하의 의무이지요.”

그 말은 즉, 나를 ‘안데르트’로 알아봤다는 의미가 아니라 ‘퀸 섬의 생존자’로 알아봤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 입장에선 한결 마음 놓여야 할 사정이었지만…….

‘찝찝한데.’

정말 그게 맞나?

“그래서. 방금 그 말은 내 하녀가 제국 남부 군도의 생존자이니, 마음 놓고 계속 구경하겠다는 선전 포고인가? 아니면 끌고 가서 고문이라도 하겠다고?”

그에 드셰로는 조금 묘한 눈으로 라파엘로를 돌아봤다.

평소 표정 변화가 극히 적고, 무뚝뚝하기로는 제국 제일인인 드셰로였으나 몇 년을 동고동락해서 그런지 미세한 감정 변화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드셰로의 시선을 받으며 라파엘로가 한 박자 늦게 입술을 뗐다.

“웨더우즈 부인.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요청하려는 일은 간단한 추가 조사입니다. 조사 과정에서 윽박지를 일은 없을 테고, 고문할 일은 더더욱 없습니다.”

“이제 와 그런 요청을 하는 이유는?”

“본래 남부 군도에서 발견된 즉시 이루어져야 할 절차였으나, 그 아가씨는 절차를 무시하고 미드윈트리로 이동했습니다. 따라서 추가 절차가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협력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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