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상쾌한 공기가 피부를 건드린다.
쓰읍. 깊이 호흡을 들이켠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있는 공간은 별장의 침실이었다.
“후우.”
나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별장의 인기척을 파악했다.
별장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일축해서 소란스러웠다. 겁먹은 자들이 통로를 내달리는 걸음도 느껴졌고, 그런 그들을 달래는 승무원들의 바쁜 움직임도 느껴졌다.
‘그래도 다들 정신 마법 트랩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 같네.’
설마……. 루가 다 죽여 버린 건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창가에 앉은 미녀를 바라봤다.
눈부신 봄의 햇살 아래, 황홀한 미의 자태를 흩뿌리는 여인이 창문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마치 혼자 다른 세상을 유람하다 온 듯하다.
언제 마련했는지 모를 붉은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켠 루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디에 가 있던 거야?”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야, 자기. 흠.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처음에는 말이지. 아침 공기가 너무 좋아서 나 홀로 호숫가 산책을 나가려고 했어.”
내 귀에는 마법사들의 머리를 따러 외출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런데 하늘에서 커다란 비행정이 하나 내려오더니 블랙라갈호 옆에 선착하더라고. 거기에서 내려온 자들이 이 주변을 순식간에 장악하지 뭐야? 그리고 마법사들을 사냥하며,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지.”
“아군? 이런 산골짜기의 일을 알고서 단숨에 날아왔다고?”
“뭐. 도우러 온 게 아니라, 온 김에 도와준 거라면 말이 되지 않겠어?”
그가 창문 아래로 가볍게 턱짓했다.
나는 구겨진 의복을 탁, 탁 털고 루 옆에 섰다.
별장 앞은 건물을 뛰쳐나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승무원들과 함께 블랙라갈호에 동승해 있던 호위들이 주위를 살피기에 여념 없어 보였다.
‘검성과 진은…… 안 보여.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건가?’
한데 사람들 사이로 아주 낯선 제복을 걸친 자들이 보였다. 검성을 보좌하던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기사들과는 정반대의, 백색 제복을 걸친 자들이었다.
“루 씨. 혹시 저 사람들이 우리를 도우러 왔다는…….”
똑똑.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승무원인가? 문을 열기 무섭게 통로에서 예거시가 튀어나왔다.
“이봐, 그레이! 당장 부인을 데리고 나와. 대피해야 해! 암살자들이 귀족들을 공격…….”
급하게 외치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숨을 헐떡이는 예거시는 묘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눈앞의 광경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심하는 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예거시는 금방 예를 차려 인사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처음 뵙습니다, 숙녀분. 그레이 웨더우즈 자작은 먼저 나갔습니까?”
아, 이런.
‘맞아. 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지.’
이런 식으로 마무리될 줄 알았으면 반지를 안 부쉈을 텐데. 은근한 시선으로 침실을 살피던 예거시가 루를 발견하고 알은체했다.
“웨더우즈 자작 부인? 이곳에 계셨군요. 그레이는…….”
살랑살랑 다가온 루가 내 팔에 팔짱 끼며 웃었다.
“남편은 이곳에 없어요. 마침 나가려 했는데 잘됐네요. 함께 갈까요?”
“아, 예. 어서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가자꾸나, 내 우매한 하녀 데이지야.”
나 이제 루의 하녀 노릇을 해야 하는 거야? 까마득하네, 정말.
“이쪽으로.”
두 친구는 그레이의 위치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루의 태도가 워낙 여유로워, 어디선가 잘 살아 있겠거니 여기는 모양새였다.
우리 둘은 (우리보다 한참 약한) 성인 남성의 보호를 받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사이 루가 볼크윈에게 물었다.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이곳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죠?”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큰 문제는 해결된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각하는 물론 펜 로타 최고의 영웅이 우리를 지켜 주고 있으니까요.”
“하아. 그분이 오늘 아침 이리겔에 도착한 건 정말 천운이야, 천운. 안 그래, 볼크윈?”
오늘 아침 이리겔에 도착한, 펜 로타 최고의 영웅.
구태여 누구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볼크윈이 알아서 이름을 밝혔으니까.
“그렇지. 그 누가 라파엘로 제나일 펜 로타 공작 각하의 등장을 예상했겠어?”
라파엘로.
나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다.
10년을 함께 전장을 굴렀던 친우가 이리겔 별장에 와 있다. 지금 이곳, 나와 같은 장소에.
이런 날을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사람의 일이 항상 계획된 대로 일어나지는 않으니까. 지나가다 한 번쯤은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을 거라 여겼었다.
‘후우.’
라파엘로를 만나게 된다면. 혹은 나타샤와 마주하게 된다면.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옛 친우와의 재회는 내게 그런 궁금증을 자아내곤 했지. 한데…….
‘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네.’
특별히 긴장되지도 않고. 정체를 들킬까 전전긍긍해지지도 않고.
나.
생각보다 더 대충 살고 있던 건가?
아, 이전과 다른 점은 한 가지 확실했다. 라파엘로에게 알은척하고 싶은 마음이 살포시 샘솟는 걸 봐선, 내 머리는 분명히 그에게 반가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라파엘로를 위한 일이 아니니까.’
상황을 반대로 생각해 보자.
혼자 떠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나를 무시하고, 라파엘로가 저 홀로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성에 쳐들어갔다면?
그래서 죽었다면?
4년 후 대뜸 다시 나타나서 알은체한다면?
‘처음에는 조금 혼란스럽더라도 분명 기쁘겠지.’
하지만 그렇게 다시 나타난 라파엘로가 사실은 여자였다면?
서로의…… 그렇고 그런…… 단순한 동성 친구 이상의 사생활을 교류했던 소중한 인연인데, 남자라 굳게 믿었던 친구가 실은 여자였다면?
‘그건 좀.’
불쾌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불쾌한 것으로 모자라, 옛 친구라는 소중한 기억조차 더럽혀질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던 기억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나는 그게 싫다. 무려 10년간 지옥을 굴러 온 라파엘로의 과거에 재를 뿌리고 싶지도 않았고.
‘그에게 껄끄러운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과하게 의식해서 쓸데없는 실수 하지 말자. 로즈벨 백작과 검성과의 재회도 문제없이 넘겼으니까.
앞서 계단을 내려가던 예거시가 루를 돌아보며 조금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로부터 웨더우즈 부인이 아스트로사 왕국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그쪽 지방에도 라파엘로 각하의 명성이 높은가요?”
루가 내 쪽을 힐긋 바라보며 웃었다.
“으음? 내 남편이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가요?”
“물론이죠. 그 녀석이 웨더우즈 부인을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던지, 부인을 위해 유물 탐사까지 생각하고 있던걸요.”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친구라는 놈이 부인 앞에서 남편의 사생활을 줄줄 불어? 간사한 자식.
“아. 유물 탐사.”
“디안 케트의 다섯 가지 유물에 관심이 있으시다죠? 제가 몰래 알려 드리는 극비 정보입니다만. 그건 아주 위험한 물건입니다, 부인. 관심일랑 가지지 마세요.”
“왜 위험하다는 거죠?”
예거시가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루에게 속삭였다.
“자세하게는 못 말씀드리지만…….”
그때, 계단 정중앙에 우뚝 멈춰 선 루가 예거시와 눈을 맞추었다.
“왜, 위험하다는 거지?”
그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황동색으로 번뜩였다. 일순, 예거시와 볼크윈의 눈에 초점이 흐릿해졌다.
정신 조종 마법. 블랙라갈호에서 귀부인으로 위장한 암살자가 그러했듯, 예거시의 입술이 느릿느릿 힘없이 움직였다.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제나일 공작, 로궤가 노리는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아주 꽁으로 잡수시네.
‘멍청한 예거시 녀석. 그러니까 누가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래?’
루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나를 돌아봤다.
“아하. 그 정보를 얻으려고 친구에게 부인을 팔았었나 봐, 내 남편은.”
취미이자 특기인 모르는 척을 시전하며 루 옆에서 떨어졌다.
싱긋 웃은 루가 그런 내 팔을 더 가까이 당기며, 예거시에게 속삭였다.
“명심할게요. 조언 고마워요.”
예거시의 푸른 눈동자에 초점이 되돌아왔다. 그는 멍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다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아, 방금 뭔가.”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그러다 뒤로 넘어지면 머리가 깨질 거예요.”
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예거시를 내려보냈다.
얼마나 능숙한 태도인지, 평소에 내 정신을 조종하고 지내는 게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이 자식…… 설마 매일 내 머릿속을 열어 보는 건 아니겠지?
순간 짧은 의문이 들었다.
‘루는 살아 있는 비윤리이자 숨 쉬는 위법 그 자체인데. 이런 사람이 황실 마법사일 수 있을까?’
블랙라갈호에 오르기 전에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그가 황실 마법사였다면 이곳, 이리겔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스터리한 대형 정신 마법 트랩 사건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을까?
그가 어젯밤 읽고 있던 책, <숙련된 요리사를 위한 펜 로타 제국 고급 요리 100선>.
북대륙연합교국과의 연관성.
떠받들어지기 익숙하지만, 황실과는 큰 연이 없는 마법사.
디안 케트와 아는 사이.
종합하면 조금 독특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황실 마법사는커녕……. 제국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