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95)

41화

내 출구가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방금 말을 하지 않았나?’

게다가 짝다리를 짚고 선 채 당당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기까지 한다. 내가 알던 평소의 출구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원래는 겁을 잔뜩 먹은 얼굴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는데.’

게다가 입을 여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그렇다는 말은.

‘……아아, 그래. 내 출구가 아니라 역린으로서 나타난 건가.’

트랩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설마 나도 환각에 걸렸을 줄이야. 놀랍다 못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내 역린으로는 안데르트나 대마법사 메피스토가 나오고는 했는데. 그리고 가끔 죽은 전우도. 왜 어린 내 모습으로 바뀐 거지?’

말없이 서 있던 내가 답답했는지, 어린 나는 뚱한 표정으로 내 옷을 잡아끌었다.

“뭘 그렇게 바보처럼 쳐다봐? 이제 그만 나가자.”

“……음, 그래.”

일단 환각을 깨뜨려야 새로운 출구도 발견할 수 있으니까.

나는 종종걸음을 잇는 어린 나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 걸었다.

깜짝 놀란 얼굴로 굳어 있던 어린 나는 ‘얘가 미쳤나, 왜 이래?’ 하는 눈으로 흘겨보다가 곧 얌전해졌다.

어릴 적의 나는 조용하고 얌전한 편이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미화된 건가?

전신에 힘을 쭉 뺀 채 편히 안겨 있던 어린 내가 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계속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린 나에게 질문받는 기분이 묘하다. 나는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다.

“친구들을 구해 주고 있었지.”

“친구? 있지도 않은 걸 어떻게 구해? 망상하고 있었어?”

충격. 어린 나의 조롱은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설마.

‘내 역린은…… 친구 없는 왕따?’

기분이 찝찝하다.

상대는 비록 환각이어도 어린 시절의 나이지 않은가? 나는 어린 나를 ‘나는 왕따야’라며 땅을 파고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넌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어. 나는 왕따가 아니야. 지금의 나에게도, 과거의 나에게도 모두 소중한 친구가 많았거든. 너와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어린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가 당신의 친구인데? 말해 봐.”

“하녀장, 집사 암살자, 감자 노인…….”

예거시와 볼크윈도 넣어야 하나? 따지고 보면 내 친구가 아니라 웨더우즈 자작 친구인데. 뭐, 셋으로도 충분히 많으니까 억지로 넣지 말자.

“끝?”

“응. 대충 그 정도?”

“끝일 리가 없을 텐데.”

“그럼?”

“요리사 겸 정원사는?”

언짢은 눈초리로 날 훑던 어린 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 하긴. 루는 친구가 아니라 개 목줄을 쥔 주인님이지. 주제 파악을 아주 잘하고 있어. 칭찬해 줄게.”

두 번째 충격. 뭐? 누가 내 주인님이라고?

설마.

‘내 역린은…… 루?’

안 돼, 루가 역린인 건 싫어! 나는 어린 나를 꽈악 끌어안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정신 차려! 루는 내 주인님이 아니야! 그 녀석은 그냥 제 잘난 맛에 사는 공주님에 불과하다고!”

어린 나는 내 품에 안겨 얼굴이 찌부러진 채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반문했다.

“공주님?”

“그래.”

“……뭐, 그래. 어찌 됐든 모셔야 하는 상대라는 건 잘 인지하고 있네.”

입가에 떠오르는 냉소적인 미소가 어쩐지 낯익다. 어린 내가 웃으면 귀여워야 하는데 왜 재수 없게 느껴지지?

“말장난은 이쯤이면 된 것 같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

“내가 왜 환각이라고 생각해?”

나는 입을 다물고 어린 나를 바라봤다.

‘뭐지?’

환각이 스스로를 환각으로 인지하는 경우도 있나? 아니, 절대, 듣도 보도 못했다.

“너는 내 출구가 아니니까.”

“내가 왜 네 출구가 아니야?”

“내 출구는 내 어린 시절 모습이지만 그 출구가 말을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때. 어린 나는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내가 너의 어린 시절로 보여?”

방금 그 말, 기시감이 느껴진다.

이유는 또렷하다.

“내가 예거시로 보여?”

내가 볼크윈에게 했던 질문 그대로였으니까.

순간 두 다리가 멈칫 굳었다. 나는 어린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멀찍이 물러섰다.

어린 나는 그런 내 행동을 비웃었다.

“뭐 해?”

“너 누구야.”

“글쎄, 누굴까. 당신에게는 그보다 더 생산적인 자문이 필요해 보이는데.”

“…….”

“무엇이 내 환각일까, 라든지.”

“…….”

“안다면 어째서 극복할 생각 없이 내버려 두기만 하는지.”

그제야 나는 주변을 돌아봤다.

온 세상이 어둡다. 나는 어둠 속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죽어, 안데르트!]

[우리를 구하지 못하는 너는 필요 없어. 그냥 죽어 버려!]

비명과 저주가 난무하는 세상.

안다. 저 목소리는 모두 환상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환상.

내가 구하지 못한 사람들.

[날 구하지 못할 거라면 죽어 버려!]

그 존재들이 바로 내 역린이었다.

트랩에 갇힐 때마다 여지없이 들려오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들려도 출구를 통해 트랩을 벗어날 수 있다. 저들이 나의 역린임을 인지한 상태였으니 당연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 출구는 왜 어린 나였을까?’

어째서 힘없고 연약한 어린 소녀가 내 출구였던 걸까.

연약한 나는 저들을 구할 수 없는데.

겁먹은 내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 리 없는데.

이토록 약한 존재가 내 도피처가 된다는 건…….

“그래, 이제 조금 머리가 돌아가는 모양이구나. 맞아, 데이지. 네 역린은 구하지 못한 존재들이 아니야.”

키득키득 웃은 어린 내가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역린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야.”

“……사람을 구하는 게, 내 역린이라고?”

“왜. 부끄러워?”

기분이 멍해졌다.

겁먹은 어린 소녀가 나의 출구였던 이유.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어.

어린아이라면 도망쳐도 되니까.

공포에 굴복하고, 저 멀리 사라져 버려도 되니까.

‘이런.’

순간, 얼굴이 불에 덴 듯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뭐가 부끄러운 걸까. 부담스러운 일을 억지로 하고 있었단 사실을 들켜서? 그런 주제에 생색내는 자기 자신이 우스워서? 이런. 완벽하게 틀렸어, 데이지 양.”

어린 나의 걸음이 점차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낮게 숙인 시선 위쪽으로 소녀의 작은 신발이 나타났다.

“자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마. 그 대신 가엾은 의무감에 혹사당한 스스로를 더 안쓰럽게 여기도록 해.”

“…….”

“이제껏 무시해 온 내면의 외침에 더 귀 기울이고.”

“…….”

“본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널 호되게 다그치라고.”

착각이 아니라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점차 무거워져 가는 듯했다.

“아, 그래. 이쯤 해서 다시 한번 물어볼까?”

가벼운 운율에 견고한 서늘함이 서렸다.

사랑스러움이 만연했던 색채에 동굴 안으로 밀려든 파도처럼 음울하고 어두운 울림이 더해졌다.

“내가 아직도 당신의 어린 시절로 보여?”

그리하여 새로이 변화한 목소리는, 내게도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언제나처럼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온 긴 다리가 보란 듯이 내 앞에 멈춰 섰다. 신장이 어찌나 큰지, 고개를 숙인 내 시야에 그의 허리가 걸쳐졌다.

“어때. 고개 좀 들어 봐.”

하지만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응?”

상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내 환각을 깨뜨리러 온 요주의 남자.

남자의 소매는 시원하게 걷혀 있었다. 소매 아래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각양각색의 직선이 박혀 있었다.

‘맹세의 흔적.’

어림잡아도 열 개. 이토록 많은 맹세의 흔적을 팔 안쪽에 새겨 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유일했다.

정말 유일하게, 루밖에 없다.

.

.

.

죽고 싶다.

내 출구가 루의 모습을 하고 있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뜻이지 않은가?

분명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왜 뒤늦게 루의 모습으로 바뀐 거지? 대체 왜? 어째서? 하필? 열받게? 쪽팔려서 죽고 싶게?

‘내 역린의 정체를 알게 돼서? 그래서 루의 모습으로 바뀐 거야?’

그건 더 최악이다.

나도 몰랐던 나의 약점. 그 약점을 내보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상대가 루 자식이라는 거잖아.

“흠.”

짧은 침음에 뒤이어, 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신일체의 첫 번째 깨달음. 말은 멋져. 하지만 그런 짧은 깨달음 하나로 나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꿰뚫을 수는 없는 법.”

“…….”

“보통은 이런 식으로 몸으로 부딪쳐서 느끼고 배우는 녀석들이, 그렇지 않은 놈들보다 더 빨리 깨달음을 얻고는 하지. 적어도 내가 봐 온 이들은 그랬어. 책상 앞에 앉아 종일 책만 보는 건 비효율의 극치거든. 근손실도 크고.”

너 지금 나를 위로하는 거야?

‘내가 역린의 정체를 깨닫고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생각하는구나.’

받기야 받았지만. 널 출구로 깨달은 후 받은 충격보단 적은데.

“그러니까 오늘의 일은 네 일생의 몇 없는 행운임을 인정하고.”

“…….”

“너 스스로가 한없이 약해 빠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누가 약해 빠졌다고?

내가?

“연약한 것들은 전부 위태로우니까. 네가 키우는 화분 ‘루’나, 너나. 내 눈에는 별반 다르지 않아.”

세상천지에 나를 약자라 부르는 이는 그밖에 없다. 떡잎만 겨우 자란 데이지 꽃의 연약함과 나를 동일 선상에 두는 자도 그밖에 없었다.

나도 몰랐던 내면의 나약함과 결점을 보란 듯이 꿰뚫고, 전시하며, 충고……. 그래, 충고하는 이는 이제껏 루가 유일했다는 뜻이다.

‘……약은 놈.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네.’

루는 내 출구가 맞다.

그는 내가 번뇌를 극복하는 데 일조하는 가장 훌륭한 스, 스, 승, 스……. 다른 말로는 서, 선, 선, 생…….

하여간. 그거다. 따라서 루가 내 출구여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아, 인정하니까 속이 다 후련하네.’

나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장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인생 강의 감사했습니다, 루 자식아.”

할 말 있으면 다 하라는 듯 턱을 들어 올리자, 루는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재미없게. 좀 더 수치스러워할 것이지.”

검지의 끝으로 내 이마를 살짝 건드린 그가 말했다.

“돌아가자.”

나직한 한 마디는 마법의 주문이 되어 나의 환각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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