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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195)

38화

“…….”

“익숙한 검술을 구사했나? 아니면 꽤 많은 검술을 상대해 온 네게도 낯선 검술이었나?”

평소 진은 검성의 명령이나 요구에 별다른 의구심 없이 복종하고는 했다.

한데 오늘의 진은 조금 묘한 기분으로 검성을 올려다봤다.

웨더우즈 자작의 당부가 떠오른 까닭이다.

“진 양, 이건 조건이 아닌 부탁입니다만. 결투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진 양만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그는 지금 순간을 예견했던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특이한 사람이었다. 진은 검성을 향해 겸허히 고개를 숙였다.

“공작 각하. 저는 결투에서의 패배를 시인하겠습니다. 따라서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후계권을 내려놓으려 합니다. 부족한 제자를 가르쳐 주셔서 그동안 감사했…….”

“진.”

나직한 부름이었다. 그 속에 잠재된 서늘함을 읽은 진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주는 나다. 널 버클리그레이튼에서 내쫓느냐 마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너의 답을 들은 후 결정할 것이다.”

“상대는 저를 상대로 검을 뽑지조차 않았습니다. 어떤 검술을 쓰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검을 뽑지도 않았으니 어떻게 검을 휘두르는지도 모른다고? 진담인가?”

진은 입을 닫았다.

그런 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검성의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걸렸다.

검술이란 건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방법론을 뜻하지 않는다.

좁게는 가벼운 검을 추구하는가 무거운 검을 추구하는가에서부터, 넓게는 어떤 장인이 만든 검을 사용하는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데 모른다는 멍청한 답을 내놓는다, 라.’

진은 대답을 회피할 성격이 아니다.

그녀는 각양각색의 후계자들 중에서 가장 순종적인 인물이었다.

게다가 검 이외에는 관심도 없어서 종전 직후부터 운영해 온 길드, <클론>의 대외적 길드 마스터로 두기에 손색이 없었다.

황실과의 조약에 따라 사조직을 휘하에 둘 수 없는 검성에게 있어, 가로쉬 다음으로 쓸모가 많은 제자였다.

때문에 가능하다면 가로쉬에게 공작위를 물려준 후에도 검성 본인이 진을 데리고 다니려 했다.

그런 진이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하는 이유야 훤하다.

‘웨더우즈 자작이 결투의 조건으로 걸었겠지.’

그 말은 즉 웨더우즈 자작에게 반드시 숨겨야 하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웨더우즈 자작이 사용하는 ‘검술’ 그 자체에.

검성은 자신의 검을 쥐었다.

-정진하라.

익숙한 공명이 들려온다.

검사가 검을 쥐면 흔적이 남는다.

주인이 아닌 자가 검을 쥐어도 흔적이 남고, 흔적을 살피면 그 사람의 내면을 조금은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때문에 검성은 검의 공명이 들리기 시작한 후,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검을 빌려주지 않았다.

제아무리 금방 사라진다 하더라도, 타인의 내면이 자신의 검에 남는 게 싫었다.

그런 검성이 웨더우즈 자작에게 검을 빌려준 이유는 반은 흥미, 반은 그에 대해 파헤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검에서는 웨더우즈 자작의 흔적을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을 뽑지도 않았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정진하라.

‘…….’

웨더우즈 자작은 전에 등장한 적 없는 새로운 강자다.

아무래도 방법을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들여다봐야 할 건 웨더우즈 가문이 아닌 웨더우즈 자작이었던 건가.’

그는 지난 2년 동안 웨더우즈 가문을 탐색했다.

이유는 단 하나.

웨더우즈 전 부인의 재산에 디안 케트의 유물이 섞여 있다는 소문. 그 소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가문에 비상한 마법이 걸려 있는지, 수없이 암살자를 보내왔으나 검성이 원하는 디안 케트의 정보는 얻지 못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웨더우즈 가문에 보낸 암살자가 돌아오지 않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그는 이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웨더우즈를 멸문하려 했다.

웨더우즈 자작이 귀족회 참석을 선언하지 않았더라면 필시 그랬을 것이다.

검성은 블랙라갈호에서 웨더우즈 자작을 사살하고, 사고사로 위장하려 했다.

술에 취한 승객이 비행선에서 추락하는 사건은 현대에도 종종 발생하곤 했으니까.

한데 결국 그리하지 못했다.

‘그레이 웨더우즈.’

어째서일까?

검성은 그에게서 낯선 익숙함을 느꼈다.

낯선, 익숙함. 지극히 역설적이었으나, 이 말을 대신할 다른 표현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낯설지만 익숙하다. 특히 그에게서 느끼는 ‘익숙함’은 가슴 안쪽을 답답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서 계속, 계속 고민하고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그답지 않게, ‘웨더우즈 자작과 결투하고 싶다’는 진의 부탁을 수용한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진의 주장대로 웨더우즈 자작이 실력을 숨긴 검사라면 어떠한 작은 힌트라도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검성은 그 어느 쪽으로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그 남자에게는 내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

디안 케트의 유물을 찾기 위해 전 대륙을 뒤져 온 시간이 무려 4년.

여기서 더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웨더우즈 가문이 숨겨 둔 디안 케트의 유물은 반드시 그의 것이 되어야만 했다.

“진.”

“……예.”

“네가 진정 버클리그레이튼에서 출가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진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순진한 제자의 머릿속을 읽지 못할 만큼, 검성은 바보가 아니었다.

오직 검 하나를 배우기 위해 자신의 밑에 들어온 어린 검귀. 그런 검귀가 처음 보는 남자에게 크나큰 흥미를 보인다는 것은.

‘가로쉬가 공작위를 이을 게 뻔하니, 가문을 나가 웨더우즈 자작을 찾아갈 셈이겠지.’

그 갈망은 검성에게 있어 기회였다.

“네게도 네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죄송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검성은 조건에 관해 입술을 떼기 전, 아주 잠시 선실의 창밖을 응시했다.

새하얀 달빛 아래 자리한 이리겔 별장. 그 아래로 수십 개의 머리가 줄지어 발을 잇는 게 보인다.

검성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느리게 호흡을 들이켰다.

오늘 밤은 아주 길어질 것 같았다.

* * *

새하얀 달도 구름 뒤에 숨은 늦은 밤.

나는 새로운 침실에 발을 딛자마자, 벽 한쪽을 차지한 거대한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아, 이거지. 이게 침대야.’

선실의 침대도 좋았지만 대귀족 별장의 침대에는 비할 바 못 된다.

이곳, 동부 호수 이리겔의 이리겔 별장은 100년 전에 지어진 귀족회 전용 별장이었다.

과시가 취미인 귀족회라 그런지 거주용도 아닌 저택이 참으로 화려하고 크다. 내 하녀 봉급을 평생 모아도 이 별장의 방 하나도 못 살 것 같았다.

그랬다.

암살자를 색출한 일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결국 이리겔 별장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상 그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별장에 들어갈 거야?”

“그러면? 저걸 승무원에게 넘길까?”

모리안의 모습으로 돌아온 루가 쓰러진 암살자를 턱짓하며 물었다.

나는 선뜻 그러자고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절대 그리하자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 암살자를 귀족회에 넘기면 뒷일이 아주 복잡해진다.

암살자를 어떻게 색출했는지, 색출한 후 어떤 과정으로 자백을 받아 냈는지, 루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금기 마법의 사용 등 모든 방면에서 최악의 결과만 도출될 수 있었다.

“대답해. 테러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우…… 우에엑…….”

암살자를 더 괴롭혀 봤지만, 이리겔 별장에 숨어든 암살자들이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테러를 일으키는지는 모르는 듯했다.

그 꼴을 보다 지친 루가 암살자의 입 안에 술을 잔뜩 집어넣고선 통로 안쪽에 대충 던져 놨다.

만취로 인한 난동으로 덮어씌울 생각인 듯했다.

그는 내 팔을 잡고 자연스럽게 별장 쪽으로 이끌었다.

“뭘 그렇게 걱정해, 자기야. 귀족회에는 소드 마스터인 검성이 있잖아? 별장의 쓰레기들은 그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소드 마스터는 그런 존재니까.”

“그래 봤자 놈들이 미리 폭탄 같은 걸 심어 놨으면 무슨 소용이야?”

“폭탄 따위로 이곳은 안 날아가. 고귀하신 귀족회 분들이 지낼 별장이야. 귀족회에서 대비를 안 했을 리 없지. 그래서 열둘이 넘게 필요했던 거고.”

그것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누구의 짓일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귀족회를 상대로 이런 대범한 짓을 벌일 만한 인물. 누가 있지?

제국인일까? 아니면 국제 테러범?

“…….”

전혀 모르겠네. 제국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니 추측조차 못 하겠어.

그렇게 한참 침대에 쓰러져 있던 나는 어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테러 사실을 모르는 척하기에는 찝찝했다.

‘나라도 이 저택을 살펴봐야겠어.’

문으로 향하는 나의 발목을 루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쉬어.”

이의는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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