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95)

37화

“너 이게 대체 무슨…….”

아니, 잠깐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지난 한 달을 지켜본 결과.

루가 행하는 일에는 항상 나름의 이유가 존재했다.

나를 관리하겠다는 핑계 하나로 하녀장을 설득해서 이곳까지 동행한 그였다.

아무 이유 없이 이 귀부인을 끌고 왔을 리 없다는 뜻이다.

“흥미로운 추리를 하는 것 같은데. 이왕이면 내게 직접 들려주는 게 어때? 혹시 몰라. 내가 도와줄지.”

못 할 것도 없지.

“……지금의 너는 모리안이 아니라,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어. 그건 네가 다른 마법을 사용했다는 뜻이야. 그렇지?”

변신한 상태에서는 다른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이는 ‘서로 다른 마법은 중복 상태에 놓일 수 없다’는 마법 기초 이론에 의거한다.

마법사들이 마도구를 중시하는 이유가 이 이론 때문이었다. 변신한 상태에서는 마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여자를 굳이 선실 안으로 끌고 들어왔어. 단순히 여자를 기절시키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었던 거지.”

루가 빤히 나를 쳐다봤다. 나는 당당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너는 며칠 전부터 수상한 행태를 보여 왔어. 아마 이 여자에게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고 있었을 거야. 어제도 약속이 있다며 따로 나갔었잖아?”

“귀여운 논리도 늘어놓을 줄 알아. 그래서 결론은?”

“너는 이 여자에게 반했어.”

루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한 대 때려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라 다급하게 변명했다.

“농담이고. 결론은, 네가 이 여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어때?”

“잘 가다가 삐끗했어.”

뭐? 아니라고?

나는 묘한 시선으로 귀부인의 외형을 한 여인을 바라봤다.

아니라면 뭐가 문제일까?

디안 케트의 정보 같은 건, 이런 나약해 보이는 여자를 짐짝처럼 널브러뜨리지 않아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텐데.

“……설마 이 여자가 먼저 너를 위협한 거야?”

“정확히는 그럴 예정이었지.”

아. 방금 건 확실한 힌트였다.

“이 여자, 암살자구나.”

똑똑.

고요한 노크가 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텅 빈 오른쪽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실례합니다. 블랙라갈호가 이리겔에 선착했습니다. 하선 준비가 완료되면 밖으로 나와 주십시오. 이리겔 별장의 침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음. 내 아내가 이제 막 잠에서 깨서, 나가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비행선 아래에서 기다려 주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휴우.

승무원을 쫒아 낸 나는 한껏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다.

“설마 널 암살하러 온 거야?”

“글쎄. 적어도 음습한 목표가 있는 건 확실하지. 궁금하면 목적이 뭔지 한번 물어볼까?”

비릿하게 웃은 루가 암살자 머리를 감자처럼 쥔 채 허공에 들어 올렸다.

순간, 굳게 감겨 있던 암살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헉!”

단말마와 같은 탄성이 터지면서, 암살자의 초록색 눈동자 위로 수십 겹의 마기가 겹쳤다.

마의 겹이 두꺼워질수록 눈동자의 초점도 흐릿해졌다.

나는 이 마법을 안다.

‘정신 조종 마법.’

맹세와 더불어, 태반이 금기로 지정된 고위험 계열 마법이었다.

“안 물어봐?”

“……이러려고 데려왔던 거야?”

루는 대답 대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금기 마법이고 뭐고 아예 상관을 않는구나.’

나도 크게 상관하지 않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암살자의 얼굴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나는 조용히 입술을 뗐다.

“어떤 목적으로 블랙라갈호에 올랐지?”

질문을 거부하듯 한 차례 어깨를 부르르 떤 암살자가 죽어 가는 음성으로 답했다.

“귀족회…… 감시……입니다.”

루가 아니라 귀족회가 목표였던 건가.

‘음.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긴 싫은데.’

나는 한숨과 함께 물었다.

“타깃은 누구지?”

“불특정 다수……입니다.”

다수?

“너 같은 놈들이 몇 명 더 숨어 있지?”

“열……둘입니다.”

무언가 이상하다. 단순히 감시하는 것에 불과하면서, 열두 명의 암살자를 숨겨 두었다니.

나는 루를 쳐다봤다. 그의 눈은 무언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의미심장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너 말고 다른 놈들의 역할은?”

“이…… 장, 우에엑…….”

암살자의 정신 반항이 극심해졌다.

피식 웃은 루가 암살자의 눈 위로 마기의 곁을 더 덮어씌웠다. 이제는 거의 눈 뜬 시체나 다름없는 얼굴이 됐다.

“대답해. 너 말고 다른 놈들의 역할이 뭐야?”

헉. 헉.

힘겹게 호흡을 이어 가던 암살자가 느리게 입술을 들썩였다.

“이리겔 별장…… 테러…….”

루가 손을 놓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창가로 달려갔다.

새하얀 달빛 아래 고고하게 자리한 이리겔 별장.

‘이런.’

그 안으로, 수십 명의 머리가 개미 떼처럼 줄지어 들어서고 있었다.

* * *

너른 통로는 바삐 움직이는 승무원들로 가득했다.

트레이에 짐 가방이 가득한 것을 봐선, 해당 층의 승객들은 이미 대부분이 하선한 듯했다.

진은 그사이를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목적지로 향했다.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했지만, 머릿속에는 그녀가 겪은 몇 분 전의 상황이 끊임없이 되새겨지고 있었다.

‘이제껏 상대했던 검사들과 확연히 달랐어.’

실력? 그거야 당연히 다르다. 상대가 발검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패배했으니까.

다만 진이 느끼는 의문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검집이나 발은 생각지도 못한 위치에서 파고들었고. 몸의 움직임도 예상과 판이했지.’

그래서 더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졌고, 쉼 없이 그와의 결투를 복기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때 오른손이 아닌 왼손을 휘둘렀다면? 왼발의 균형이 더 완벽했다면? 습관처럼 오른쪽 어깨로 치받지 않았다면?

‘……후우.’

검성은 결투에서 압도적인 실력 차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스타일이다.

이와 반대로 웨더우즈 자작은 결투에서 마치 그녀를 농락하는 느낌이었다.

오늘의 결투는 진에게 여러모로 충격이어서, 자신이 온실 속 화초였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웨더우즈 자작을 만난 건 내게 행운이야.’

검성은 3년 내로 공작위에서 물러날 거라 선언했다. 그가 가로쉬를 후계자로 점찍었다는 건 제국 모두가 인정하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진은 오로지 검 하나를 배우기 위해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문을 두드렸다.

더불어 검성은 후계자 싸움에서 탈락한 검사를 계속 제자로 둘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 절대 웨더우즈 자작을 놓쳐서는 안 돼.’

쉬지 않고 수련하여 검의 정점을 노린다.

일평생 그 목표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진에게, 웨더우즈 자작은 또 다른 검의 길을 선사할 존재였다.

정신 차렸을 때, 진은 자신의 스승이자 양부인 검성 앞에 도착해 있었다.

마지막 경유지인 동부 호수 이리겔에 도착했음에도 선실 안에는 적잖은 승객이 남아 있었다.

결투의 결과를 두 귀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자들일 터였다.

“신세를 졌습니다, 공작 각하.”

그녀는 검성의 검을 두 손으로 겸손하게 돌려주었다. 아니, 돌려주려 했으나 당사자는 돌려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은 자세 그대로 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내 예상과 많이 다른 표정을 짓고 있군.”

“면목 없습니다.”

카드를 쥔 채 힐긋 눈치를 보던 예거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설마…… 그레이가 진 양을 이긴 겁니까? 아니겠죠?”

선실 내 수군거림이 점차 커진다. 그러나 검성은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심에 빠진 눈으로 천천히 턱을 쓸던 검성은 지나가듯 진에게 물었다.

“진. 그에게 몇 수 물러 줬지?”

“제가 아니라 상대가 물렀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검을 두 번 휘두르면 저의 승리로 쳐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토록 오만할 수가! 누군가 그리 외치는 순간, 검성의 고개가 예거시를 향해 돌아갔다.

“예거시 파뉼라 군.”

“예? 아, 예.”

“당신의 눈에도 자작이 진정 검을 배우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까?”

무언가 떠올리듯, 예거시의 눈이 얇아졌다.

하지만 반응만 다소 느렸을 뿐 확고한 어투로 긍정했다.

“그리 보였습니다.”

“그런가? 질문에 답해 주어서 고맙군요.”

진에게서 검을 돌려받은 검성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단 돌아가지. 예상보다 빨리 이리겔에 도착했어. 다들, 내일 아침엔 하늘 위가 아닌 땅 위에서 만납시다.”

검성과 진은 가장 먼저 선실을 떠났다. 블랙라갈호가 이리겔에 도착한 만큼 모두가 납득할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진은 알고 있었다.

검성이 그녀의 패배 선언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는 아주 교묘하게 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진이 패배했느냐는 예거시의 질문을 보란 듯이 묵살하고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떴다.

검성은 본래 자신의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두고 보지 않는 성정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진의 패배는 계산 외 결과였을 게 분명했다.

개인 선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검성이 물었다.

“웨더우즈 자작은 어떻게 검을 휘둘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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