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검집 안에서 진의 검이 공명했다.
-내가 간다. 적이 누구든 내가 다 쓸어버릴 테다.
호기로운 울림에 걸맞게, 그 주인의 기세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깊게 심호흡한 진이 눈을 번뜩였다.
“자작님의 호의,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단번에 발검한 진의 신형이 내게로 날아왔다. 발돋움과 자세 모두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그래서 더 피하기 쉬웠다.
진은 모의 결투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패도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거칠던지, 검기 실린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칠 때마다 열에 들뜬 공기가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상대의 손이나 검을 후려쳐서 멀리 떨어뜨렸다.
“읏!”
대화를 나눌 때는 너무 진지해서 감정의 굴곡도 크게 없어 보였는데.
‘한 대씩 맞을 때는 죽일 기세로 노려보네.’
자신을 공격한 적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외려 적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에 가까웠다.
‘스스로에게 무서우리만치 까다로운 스타일이야.’
뒤로 나가떨어지기를 몇 번씩 반복하던 진이 이번에는 호기롭게 덤벼들지 않고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후우.”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본인의 속도를 되찾는 건 좋은 태도다.
게다가 진은 새로운 틈을 파고들 줄 알았다. 호흡을 가다듬을 때마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살피고,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그런 진의 모습은 나를 조금 웃음 짓게 했다.
‘너는 정말 검을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진 양은 검성의 제자잖아.
‘나는 검성의 검만 수십, 수백 번을 받아 냈는데.’
심지어 그가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달성한 순간에, 그의 곁을 지키기까지 했는데.
그런 검성의 검술을 배우고 익히고 다듬은 진이지 않은가? 그녀가 내지르는 검의 길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었다.
“헉, 헉.”
연달아 공격이 막힌 진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물론, 한 번쯤 검을 휘두르면 진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검성의 검이라서 그러기 싫어. 찝찝해.’
그렇다고 해서 계속 피하기만 할 수도 없는 상태다.
상대를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것도 전술이라면 전술이겠지만, 시간이 대차게 낭비돼서 꺼려진다. 그렇다면 남은 수는 하나다.
‘뒤지게 아파서 못 일어나게 만든다.’
나는 오른손의 검집을 제대로 그러쥐었다. 낌새를 눈치챈 진은 내가 곧 검을 뽑을 거라 생각했는지 몸을 옆으로 굽혔다.
“미안.”
나는 발검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에 쥔 검집을 정면으로 쑤셔 넣었다. 손잡이의 끝이 진의 복부를 그대로 가격했다.
“윽.”
상대가 뒷걸음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왼손으로 검집을 한 바퀴 돌려 잡아 진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아주 세게.
퍽!
“헉.”
좋아. 마음에 드는 비명이야.
두 눈을 질끈 감은 진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다음에는 양쪽 발목. 둘 다 맞으면 당분간은 목발 없이 못 걸어 다닐걸?”
진은 눈물이 찔끔 흐른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에 대고 친절하게 다음 부상 루틴을 설명했다.
“발목 다음은 손목이야. 한 달은 만년필도 못 들게 만들어 주지.”
진은 이미 나와 자신의 실력 차를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검에 죽고 검에 사는 그녀다. 실력 차를 알고도 오기 하나로 손목을 내주려 할까?
검을 쥐어야 하는, 귀중한 손목을?
거칠게 호흡을 조절하던 진이 참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제가, 졌습니다.”
검귀치고는 아주 이성적인 패배 선언이었다.
나는 진이 휘두른 검에 대해 몇 마디 조언을 남기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려 검성씩이나 되는 인물을 스승으로 둔 검사다. 내가 뭐라고 가르침을 남기나 싶었다.
제게 날아온 검성의 검을 받아 든 진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두 개 여쭈어도 되는데.”
“어떻게 하면 그 나이에 그런 경지를 이룰 수 있습니까?”
나이라. 웨더우즈 자작의 나이가 올해 스물이라고 했었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못 이뤄.”
스물은 가짜 나이니까.
게다가 나는 검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경지라는 표현도 부끄러웠다.
10년을 전쟁터에서 구르고, 다치고, 살아남아서 얻은 조잡한 생존 기술이었으므로.
“하지만 자작님께선…….”
“나는 그릇된 방식으로 검을 배웠습니다. 남들보다 이르게 강해졌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상태죠.”
양념을 조금 뿌리긴 했지만 거짓말은 안 했어. 전쟁터에서 강해지고 그 대가로 전쟁터에서 죽었잖아?
운 좋게 무덤을 기어 나왔지만 6년의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 대가라면 대가지.
“대가라면?”
“비밀.”
고심하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진이 저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더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굳게 다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다는 소리가.
“웨더우즈 자작님. 부디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흠.
검귀는 검 때문에 미친 게 아니라, 미쳐서 검을 잡은 거라더니. 옛말에 틀린 말 하나 없다.
“……혹시 방금 딴생각했나? 분명 난 그릇된 방식으로 검을 배웠다고 했을 텐데? 아니면 그렇게 해서라도 강해지고 싶다는 뜻입니까?”
“네.”
“검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검이 너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네가 검을 휘두르는 거다…….”
“…….”
“벌써 잊었습니까?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이 강조한 덕목일 텐데요.”
“제게도 검은 수단입니다. 그러나 그 수단으로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기꺼이 검에 휘둘릴 겁니다. 저에게는 강해지는 게 더 중요합니다. 가능하면 누구보다 빠르게요. 그러니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스승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겠다는 선언을 하면서도, 눈빛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순간적인 치기가 아니야. 의지가 굳건해.’
그래서 더욱 단호하게 거절했다.
“싫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진 양처럼 검밖에 휘두를 줄 모르는 검귀를 어디에 써?”
“청소와 빨래라도 시켜 주십시오.”
“뭐? 지금 누구 일자리를 뺏으려고…….”
“그렇지 않으면 저는 갈 곳이 없습니다.”
“호기롭게 결투를 받아들이고 지금 징징대는 겁니까?”
“저는 고아입니다. 부모도 형제도 없습니다. 친구도 없죠. 자작님이 절 받아 주지 않으신다면, 길거리에 내몰려서 하루하루 배를 곯다가 아사할 일만 남았습니다.”
얘 왜 이렇게 뻔뻔해? 가족도 없고 갈 곳도 없다니. ‘아프면 죽어야지 권법’보다 악독한 권법이지 않은가?
쿠우웅.
그 순간, 웅장한 기계음이 들리면서 블랙라갈호가 요동쳤다. 이어서 기체가 아주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선착?’
아, 그래. 오늘 밤은 그런 일정이 있었지.
비행선은 이제 막 새로운 목적지인 동부 호수 이리겔에 도착한 듯했다.
입술을 깨문 진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모의 결투는 제가 패배했다고 알리겠습니다. 약속대로 후계 자리를 내놓고 버클리그레이튼 성을 나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을 나간 후에는 자작님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이만.”
진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갑판을 내려갔다.
“쯧쯧.”
실컷 찾아와 봐라. 웨더우즈 자작이 기다리고 있나. 아마 죽을 때까지 다시 볼 일 없을걸?
‘아무튼 이걸로 집사 암살자의 탈주는 막을 수 있겠어.’
귀찮음을 무릅쓰고 모의 결투에 나섰으니, 이것으로 집사 암살자는 내가 디안 케트의 유물을 전부 다 찾을 때까지 노예…… 아니, 친구로서 일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갑판을 내려가기 전, 발아래로 펼쳐진 어두운 수면을 잠시간 구경했다.
‘이곳이 동부 호수 이리겔이구나.’
바다라고 해도 믿겠네. 게다가 호수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북데우스산맥의 그림자는 소문대로 무척이나 험준했다.
블랙라갈호는 내일까지 이곳, 이리겔에 머물다가 모레 아침 일찍 출발해 라갈로 귀환할 예정이었다.
이리겔은 따지자면 귀족회 회담을 위한 방문지다.
귀족회는 내일 하루 동안 일반 승객들과 함께 별장에서 지내되, 회담을 통해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더욱 공고히 다질 것이다.
나는 개인 선실로 돌아갔다.
똑똑.
“루, 있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일단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열린 문 안으로는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눈앞에 나타난 광경이 블랙라갈호라는 배경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순간 웨더우즈 저택으로 돌아온 줄 알았다.
‘어.’
루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발치에 곱게 차려입은 귀부인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면, 이는 큰 문제가 된다.
루, 너…….
‘드디어 사고를 쳤구나!’
나는 누가 볼세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문을 잠갔다. 그리고 쓰러진 귀부인에게 다가가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댔다.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나는 아주, 몹시, 상당히 복잡해진 기분으로 루를 쳐다봤다.
선실 한가운데 무표정으로 서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모리안 세레니예의 사랑스러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선뜩한 미소였다.
“왜.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어서 실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