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부탁은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진 버클리그레이튼 양이 제게 패배한다면 후계권을 박탈해 주십시오.”
이쪽을 움직이게 하려면 그쪽은 더 큰 걸 걸어야지.
그것이 바로 무급으로 일하지 않는 하녀다.
“워어어!”
그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예거시가 내 손을 확 끌어당겼다.
뭐야,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
“아, 하하, 흠. 공작 각하. 모르셨겠지만, 이 친구는 아주 오랫동안 병을 앓아 왔습니다. 그래서 뇌가 조금.”
“뇌는 문제없어.”
따라 일어선 볼크윈이 내 대답을 무시하고 다급히 뒷말을 이어받았다.
“뇌가 조금 녹은 것 같아요.”
“안 녹았다니까?”
“예, 녹아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지금 나 누구랑 이야기하니?
다행히 검성만은 나와 대화를 나눌 의지가 명백해 보였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웨더우즈 자작. 우리 가문의 후계를 운운하는 건 너무 건방지다 생각되지 않습니까?”
“아, 각하께선 이번에도 제 생각을 여쭈어 주시는군요! 과연 검성다우십니다. 희대의 대인배세요.”
엄지를 치켜세워 주자 예거시와 볼크윈의 안색이 더 창백해졌다.
나는 깊은 우려가 섞인 음성으로 진심을 다해 거짓말했다.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차기 공작위는 오직 각하 당신과 황제 폐하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걸 압니다. 황실과 제국을 지키는 수호자에게 주어지는 고귀한 지위이지요. 제국의 안위와 미래가 각하의 가문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한 명의 제국민이 된 도리로서, 어찌 차기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저는, 검이라고는 두어 번 휘둘러 본 게 다인 초짜 중의 초짜, 이 그레이 웨더우즈와의 모의 결투에서 패배한 후계자가 차기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위에 오르는 것을 도저히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것이죠.”
손자의 재롱을 구경하듯, 연신 고개를 끄덕여 준 검성이 나를 부추겼다.
“그럴싸한 이유로군. 계속 말해 보십시오.”
“끝인데요.”
검성의 한쪽 눈썹이 아주 살짝 들썩였다.
“요점은, 공작 각하와 진 양이 검이라고는 두어 번 휘둘러 본 게 다인 초짜 중의 초짜, 이 그레이 웨더우즈에게 모의 결투를 ‘부탁’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정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아! 두렵고말고요!”
“자작은 어디서 연극이라도 배우다가 온 것 같군요.”
“그리고 결론은,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각하의 그 터무니없는 부탁을요.”
“…….”
“아, 그렇지. 한 가지 더 조건을 붙여야겠습니다. 구경꾼은 받지 않겠습니다. 공작 각하를 포함해서요.”
“…….”
“손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러시겠죠. 이 수지 안 맞는 모의 대결에 해결책이 하나 있습니다. 알려 드릴까요? 바로, 각하께서 ‘부탁’을 무르시는 겁니다. 참 쉽죠?”
조건이 지켜진다고 가정할 시. 나로서는 모의 대결이 진행돼서 나쁠 것 없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진의 후계권을 박탈시키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검술 실력을 드러낼 정도로 간절한 건 아니거든.
진의 후계권이야 다른 방식으로 박탈시켜도 되는 거고.
하지만 검성이 과연 그리할까?
“자작의 조건은 구경꾼 없이 모의 결투를 치를 것. 그리고 자작이 승리할 시 내 딸의 후계권을 박탈해 간다, 인가?”
내 귀로 들어도 상대 입장에서 좋을 것 하나 없는 조건이었다.
그러고 내 예상이 맞다면.
검성은 이번 일을 무르지 않을 것이다.
“진 버클리그레이튼.”
나직한 부름이었다.
선실 바깥에서 키 큰 은발의 여성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우리 앞에 섰다.
“예, 각하.”
“웨더우즈 자작의 내기 조건을 받아들이겠느냐?”
쯧쯧. 절로 혀가 차졌다.
‘이런 곳에서 그렇게 대놓고 물어보면 받아들이라는 뜻이나 다름없잖아.’
역시 검성에게 진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 그의 정체가 의뢰인이었단 사실을 깨달은 직후 어렴풋이 눈치챈 바다.
그리고 애초에 진을 조금이라도 신경 써 주었다면, 나를 부득불 바깥으로 끌고 간 후 결투를 요청했겠지.
검성에게 있어 진 버클리그레이튼은 원하는 방식으로 이용하고 버려도 되는 패였다.
‘전장에서도 그랬지.’
검성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데 거리낌 없는 사내다.
그가 지휘관으로 발탁된 전장은 적잖은 희생을 치를지언정 언제나 완벽한 승리를 쟁취했다.
수천, 수만 명의 목숨을 전술의 미끼로 사용해 온 검성에게 후계자 단 한 명의 희생 따윈 대단치 않을 터였다.
하지만 진이 순순히 검성의 압박을 수용할까?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작님의 주장에는 틀린 말이 없습니다. 장래 제국을 수호해야 할 제가 한낱 치기로 그릇된 판단을 했다면, 제게는 제국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웨더우즈 자작님이 거신 조건에 동의하겠습니다.”
수용하네.
‘아무리 검에 미친 검귀라 해도 그렇지. 이걸 받아들여?’
역시 검귀는 검귀인가?
“뭐,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사이좋게 갑판으로 올라가 볼까요?”
느긋하게 내 의자를 가로챈 검성이 진에게 명령했다.
“진. 웨더우즈 자작께선 검이 없으신 듯하니, 내 검을 빌려주어라.”
“알겠습니다.”
부담스럽게 왜 하필 본인의 검을 빌려주고 그런담.
우리는 흥미진진한 기색의 구경꾼을 가로질러 선실을 나갔다.
그러나 나가기 직전, 내 발이 아주 잠시 묶였다.
“웨더우즈 자작.”
나는 검성을 돌아봤다.
갑옷이 아닌 정장을 걸친 채, 편안히 다리를 꼬고 앉은 검성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혹시 우리 구면입니까?”
“…….”
“혹시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 있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요. 초면입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선실을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걸음걸이로 걷는 것을 잊지 않으며.
내가 갑판에 도착했을 때.
밤의 여유에 젖어 있던 유람객들은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선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로맨틱한 조명과 정원 테이블, 밤공기를 즐기는 이로 만선이었던 갑판은 덕분에 단숨에 고요해졌다.
하늘 아래를 수놓은 은하수에 시선이 빼앗기길 몇 분.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진의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크고 묵직한 검집이 날아왔다.
영광의 흠집이 곳곳에 남아 있는 이 검집은 필시 검성의 검이 맞았다.
나는 짧은 감회에 젖어 있다가 검을 뽑았다. 눈부시게 날카로운 은색 날이 별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리고, 조용했다.
‘검성의 검은 어떻게 공명할지 궁금했는데. 검사가 직접 검을 휘둘러야만 목소리를 들을 수 있구나.’
검을 쥐는 게 얼마 만이더라. 체감상 수년은 흐른 듯한 기분이었지만…….
쿵. 쿵.
‘내 몸은 아닌가.’
심장이 기분 좋게 운다.
무거웠던 손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단 한 번도 휘두른 적 없는 검인데, 마치 처음부터 내 검이었던 것 같았다. 검이 아니라 내 팔처럼 느껴졌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몸을 돌렸을 땐, 묵묵히 나를 응시하고 있는 진이 보였다.
진은 내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온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은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위에는 흥미가 없습니까?”
“……어떤 의도로 건네신 질문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대단한 의미 같은 거 없어요. 보통은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물어본 겁니다.”
고민하는 기색으로 눈을 깜빡이던 진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흥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닙니다.”
“아하.”
그 말은,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자라는 지위가 본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말이었다.
‘검성이 거리낌 없이 이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어.’
실력과 무관하게 딴생각을 품은 후계자를 구태여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으리라.
“진 양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이루는 데…… 나와의 결투가 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겠군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내가 검사라고 생각합니까?”
“네.”
“그렇다면 진 양, 이건 조건이 아닌 부탁입니다만. 결투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진 양만 알고 있었으면 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진의 태도는 몹시 진중하고 깍듯해서 장난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좋아요. 시작해 보죠.”
나는 구경이 끝난 검성의 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 오른쪽 옆구리에 끼워 넣었다. 이어서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간 후 진에게 말했다.
“내가 검을 뽑게 하면 당신의 승리입니다.”
얕보였다고 생각했는지, 진의 눈빛이 대차게 싸늘해졌다.
음, 너무 매서운데?
“방금 말은 취소. 검을 뽑은 후 두 번 휘두르게 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