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랬다.
예거시와 볼크윈이 설명한 파벌에 따르면 웨더우즈 가문만큼 그 위치가 모호한 곳이 없었다.
가장 먼저, 웨더우즈 가문은 마도 전쟁에 참전했으나 수혜를 받지 못했다.
더불어 지난 4년 동안 외부 활동을 일절 하지 않은 탓에 귀족회 내에서도 친황제파라든지 친제나일파로 구분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귀족회 소속인 주제에 블랙라갈호에 오른 이후, 사흘 내내 예거시와 볼크윈 같은 귀족 아닌 상류층들과만 어울렸으니.
‘돌연변이가 되어 버린 건가.’
내 나름대로는 눈에 띄지 않게 적당히 지내려는 의도였지만. 결과적으로 처참한 실패였다.
‘내 입장에서의 적당히와 웨더우즈 자작 입장에서의 적당히는 완전히 다른 기준이란 걸 고려하지 못했어.’
노는 게 귀족의 일이라기에, 진짜 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내 표정이 어땠는지 몰라도 볼크윈이 위로하듯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단순하게 입장이 모호하단 이유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너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야.”
예거시가 내 어깨를 세게 두드리며 웃었다.
“누가 이 친구를 고명하신 귀족회 나리로 보겠어? 넌 전혀 그들 같지 않아, 그레이. 가끔 나도 화들짝 놀랄 정도라고.”
그냥 놀랄 정도도 아니고 화들짝 놀랄 정도라니. 역시 쓸데없이 감 좋은 자식.
“그건 품위 없다는 뜻?”
“아니. 자유롭고 재밌다는 뜻.”
볼크윈이 게임을 포기했다. 기다렸다는 듯 예거시가 자신의 판돈을 올인했다.
“너 재밌어, 그레이.”
“그러냐. 네 얼굴도 조금 재밌기는 해.”
“너처럼 작위나 가문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는 귀족은 처음 봤어. 아닌 척해도 다들 적당히 선을 긋기 마련이거든. 이 사람은 내 수준에 맞는 친구. 이 사람은 옆에 두기에는 살짝 부족한 인간. 등급을 매기는 거지. 너만 빼고.”
실실 웃는 예거시의 눈빛은 꽤 예리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을 탐색하고, 살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런데 내 경험에 의하면 말이야. 사람이 재밌다는 건 삶이 조금 피곤해진다는 뜻이기도 하거든? 너처럼 겉모습도 지위도 멋진 녀석은 특히 그래. 사람을 괜히 기대하게 만든다고.”
“아하. 방금 그건 경험담인가? 나한테 기대를 조금 했나 봐?”
“그 질문에는 묵비권을 행사하겠어.”
그때, 선실의 문이 다시 열렸다.
조심스럽게 등장한 승무원은 다른 쪽으론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곧장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것 봐. 또 손님이 찾아왔지?”
말과 함께 예거시가 카드를 완성했다.
풀 하우스. 제국식 포커에서 세 번째로 좋은 패다. 사실상 승리의 패였다.
“그런 것 같군.”
선실 밖에 선 무형의 기세를 느끼며, 나는 내 패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한데 이번 손님은 꽤 귀찮겠는걸.”
“뭐?”
“스트레이트 플러시.”
풀 하우스가 세 번째로 좋은 패라면, 스트레이트 플러시는 최고의 패다.
“……아니, 뭐? 잠깐, 잠깐만.”
내가 테이블의 판돈을 쓸어 갈 동안, 예거시가 놀란 눈으로 내 카드를 확인했다.
그사이 다가온 승무원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웨더우즈 자작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다시 한번 선실 밖에서 전해지는 기세를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게는 블랙라갈호에 오른 이래 나흘 동안 애타게 기다려 온 존재가 있다.
내가 이 번거로우리만치 커져 가는 모임을 말없이 두고 봤던 것도 모두 그자 때문이었다.
나는 놈이 웨더우즈 자작이라는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렸다.
육감이 비정상적으로 단련된 만큼, 눈을 마주하면 단번에 알아챌 자신이 있었다.
그자가 과연 의뢰인인지 아닌지를.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선실의 소음이 한순간에 뚝 끊겼다.
긴 다리가 규칙 없이 배치된 테이블 사이를 유연하게 건너온다.
걸음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숙련된 무인은 자신만의 빠르기를 지니는 법.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나를 찾아온 열일곱 번째 손님은 가장 독보적인 속도를 지닌 자였다.
“의도치 않게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 민망하군.”
검성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그에게 있어 나이만큼 의미 없는 숫자가 또 없을 것이다.
남자는 언제나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이는 젊은 외형을 유지했다. 어떤 면으로는 14년 전보다 지금이 더 어려 보였다.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워지는 얼굴이었다.
‘전쟁터에서 만난 검성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았는데.’
지금은 마치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분하다. 어떤 자세도 취하지 않은 채, 단지 서 있을 뿐인데도 자그마한 균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파문 없이 평온한 초록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검성은 소드 마스터다. 나 따위의 무인은 절대 그의 속내를 가늠할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심신일체 첫 경지를 넘은 육감은 고도로 정련된 눈빛 속에 감춰져 있던, 단 한 끗의 감정을 파헤쳤다.
이자는 나와의 만남을 기다려 왔다.
이자는 나를, ‘웨더우즈 자작’을 안다.
검성이 바로…….
내가 찾고 있던 의뢰인이었다.
‘젠장.’
나는 깊은 탄성을 목 안으로 삼켰다.
이것은 그야말로 내가 상상한 패 중에서 최악의 패이지 않은가?
‘집사 암살자가 틀렸어. 진은 <클론>의 진짜 주인이 아니야. 검성 본인이 의뢰인인 동시에 <클론>의 진짜 주인이었던 거야.’
그리 여기면 진이 <클론>의 길드 마스터 자리에 오른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진은 일종의 눈속임이었다.
황제의 검이라 불리는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은, 황실과의 조약에 따라 사조직을 휘하에 둘 수 없었다.
‘그는 조약의 범위를 교묘하게 비껴서 진을 길드 마스터로 둔 거야.’
놀랍군.
과거의 인연과 이런 식으로 엮이게 된 게 정말 놀라워.
한때의 일이라지만 그에게서 검을 배우고 함께 전장을 누비며 생사를 넘었다.
당시의 기억은 너무나 강렬해, 지금 이 순간에도 검성과의 재회가 기껍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이 괴물이 우리를 몰살시키려는 주범이라, 이거지?’
역시 하녀의 삶은 순탄치 않도다.
검성이 먼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웨더우즈 자작. 나는 지하르크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입니다. 지하르크 공작이든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이든, 자작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의자에서 일어선 나는 재빨리 몸가짐을 확인했다.
걸음걸이. 오른쪽 허리춤을 확인하는 습관. 오른쪽 상체를 살짝 뒤로 밀어 두는 습관. 어떤 것도 내보여선 안 된다.
나는 긴장한 속내를 조금도 숨기지 않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레이 웨더우즈입니다. 검성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힐긋 테이블을 살핀 검성이 작게 웃었다.
“스트레이트 플러시. 멋진 패로 승리하셨군.”
“운이 좋았죠.”
“겸손은 훌륭한 미덕이지. 게임이 끝난 후 찾아오게 되어 다행이군요. 괜찮다면 잠시 시간을 내 줄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야 내 드릴 수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말씀하시기에는 곤란한 내용인지요?”
예거시가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내 옆태를 노려봤다.
‘네가 왜 호기롭게 구는지 모르겠지만 바보처럼 굴지 말고 당장 모시고 나가라’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잠시간 말이 없는 검성을 쳐다봤다.
‘내 반응이 예상과 달랐나 보지?’
검성은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다. 나를 가늠하듯 응시하던 그가 작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곤란하지는 않습니다. 내 딸, 진이 웨더우즈 자작과 모의 결투를 치르길 원하더군요. 자작만 괜찮다면 부족한 내 딸에게 배움을 내려 주길 부탁합니다.”
주위의 속닥거리는 소음이 점차 늘어 간다.
그것과 별개로 내 머릿속에는 커다란 물음표가 하나 띄워졌다.
‘단순한 모의 결투 신청이라면 직접 진이 찾아왔어도 무방한데, 검성이 직접 찾아오다니. 이자가 권력으로 상대를 압박하려 드는 성정이었나?’
심지어 딸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겠다는 목적으로? 그럴 리가.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예거시가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무언가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만, 공작 각하. 그레이는 검사가 아닙니다.”
“아. 그러신가?”
“이 손바닥 좀 보십시오. 세상에 손바닥이 이렇게 부드러운 검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 제 친우의 기세가 워낙 예사롭지 않아 진 버클리그레이튼 양이 착각한 모양입니다.”
내 손을 활짝 펼친 예거시가 부채처럼 열심히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나 검성은 내 손이 부드럽든 거칠든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웨더우즈 자작.”
“네.”
“자작도 그리 생각합니까?”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 생각을 물으신다면, 검사가 아니어도 검을 들 수는 있다고 답해 드리겠습니다.”
볼크윈이 당황한 목소리로 내 손등을 두드렸다.
“그레이?”
검성은 변함없이 부드러운 태도로 내게 물었다.
“그 말은 검술을 배운 적은 없어도, 기꺼이 내 딸의 상대가 되어 주겠다는 말씀입니까?”
“각하. 저는 솔직히 각하께서 제게 왜 이런 부탁을 하러 오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게 너무나 터무니없지 않습니까? 검사가 아닌 자에게 뛰어난 검사와의 결투를 부탁하다니. 외람되지만 저를 조롱하러 오신 것 같다는 기분까지 드네요.”
노골적인 질타에도 검성은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따로 자리를 내어 조심스럽게 제의드리려 했던 겁니다.”
“이해합니다. 버클리그레이튼 공작님께선 제게 무려 ‘부탁’을 하러 오신 것 아닙니까? 공작 각하의 ‘부탁’을 모르는 척할 순 없죠. 제아무리 난감하고, 어처구니없고, 허황된 ‘부탁’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나는 부탁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더 강한 악센트를 짚어 주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검성의 미소가 더 짙어진 기분이다.
이쯤 되면 그도 내가 이렇게 밑밥을 까는 이유를 알아차렸을 터.
“원하는 대가가 있다면 속 시원히 말해 보시죠, 웨더우즈 자작.”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