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95)

33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던 두 남자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너 설마 결혼 상대로서 어떠냐고 물은 거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정도 실력이면 가주는 따 놓은 당상 아닌가? 신문사는 네 형에게 넘어갈 테니, 넌 그 아래에서 일하지 않는 이상 다른 길을 찾아 봐야 할 텐데. 공작의 남편이면 놀고먹기 제격이겠어.”

예거시가 푸하핫 웃음을 터트렸다.

“웃긴 녀석! 진 버클리그레이튼은 가망 없어. 다음 대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은 정해져 있다고. 너무 압도적이라 다른 후계자가 치고 올라가는 건 상상도 못 할 정도야.”

이건 꽤 놀라운 이야기였다.

“검기를 사용할 만큼의 천재가 가망이 없다고?”

볼크윈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그런 천재보다 더한 천재가 버티고 있으니까.”

“더한 천재라면?”

“가로쉬 버클리그레이튼. 그자가 살아 있는 한, 진 버클리그레이튼은 절대 공작위를 못 넘봐.”

가로쉬라.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지 한 번쯤 보고 싶은걸.

“……아하, 그러고 보니 어제 그 여자가 대뜸 네게 관심을 보였었지?”

“아니.”

“흠. 네가 좀 잘생기긴 했지만. 진, 그 여자는 검밖에 모르는 여자야. 얼굴을 보고서 접근했을 리 없지. 뛰어난 검사가 아니면 말도 먼저 안 건다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훑던 예거시가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그레이, 너 혹시 검사냐?”

무서운 자식. 감이 좋아도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럼 진은 정말 순수한 호승심에 내게 관심을 가졌던 건가.’

하지만 그럴 리가.

집사 암살자의 증언에 따르면 진은 <클론>의 길드 마스터였다. 의뢰인의 의뢰를 받아, 웨더우즈 가문에 수차례 암살자를 보낸 당사자이지 않은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했다.

‘반대로 내가 이용하면…… 진을 통해서 의뢰인의 정보를 캐낼 수 있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의뢰인의 정체는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예거시의 정보에 따르면, 의뢰인은 웨더우즈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을 들쑤시는 중이었다. 디안 케트의 유물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크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하나에 미치도록 집착하는 놈치고 제정신인 놈이 없지. 더 큰 사달을 치르기 전에 어떤 놈인지 확인해야 해.’

옛말에 드래곤을 잡으려면 드래곤 둥지에 들어가란 말이 있다.

어떤 식으로 진을 이용해야 할지, 조금씩 윤곽이 잡혀 가고 있었다.

“어라. 이것 봐라. 그레이, 너 몸도 꽤 근사하잖아? 전 웨더우즈 자작님이 훌륭한 무인이라고 들었는데. 그 밑에서 배운 적 있어?”

“그럴 리가. 나는 몸 쓰는 일은 영 아니야. 근육은 잘 붙는데 실속은 영 없다고 해야 하나? 검은…… 로망이 있는 정도?”

말과 함께 보란 듯이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은 손바닥을 펼쳤다. 손바닥을 살핀 볼크윈이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무인의 손은 아니네. 검을 들었다고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보송보송해.”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밤 11시가 되어서야 각자의 선실로 돌아갔다.

아마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나, 예거시, 볼크윈. 우리 셋이 속한 그룹의 머릿수는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늘어 갔다.

시간이라고 해 봤자 고작 이틀. 그러나 셋이 여섯이 되고 여섯이 열다섯으로 불어나는 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허어. 다들 어디로 숨었나 했더니, 이곳에 굴을 파고 몰래 모여 있었어? 내 자리는 어디야?”

이것 봐라. 대형 선실을 하나 더 빌렸는데도, 새로 온 사람 몇을 더했더니 꽉꽉 들어찬다.

“잠깐만요. 순서가 잘못되셨습니다. 저기 창가 쪽 테이블로 가시면 웨더우즈 자작님이 앉아 계십니다. 금발의 키가 큰 미남이니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 모두 그분과 합석하고 있는 처지이므로, 그분께 먼저 인사드리는 게 맞겠군요.”

“아하. 그런 사연이었나? 고마워, 에틀리. 키가 더 컸는걸.”

안 모았거든?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너희가 모였거든?

“안녕하십니까, 웨더우즈 자작님. 저는 포트사의 헨리 포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

그 뒤로 어쩌고저쩌고 예의상 인사가 덧붙여졌지만, 이제까지 그러했듯 10분 후면 잊을 이야기였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앞으로 알은체하기를 약속한 후 다시 카드로 시선을 돌렸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모 씨의 친절한 설명 덕분에, 우리 선실에는 열여섯 번째 불청객이 추가되었다.

‘귀찮은 놈들.’

이처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들이 하나둘 달라붙게 된 원인은 천차만별이었다.

“익숙한 얼굴이 조금 보입니다만. 합석해도 괜찮겠습니까?”

“안녕하세요, 볼크윈 씨. 이게 얼마 만이죠? 카드 게임 팀전을 하려는데, 이쪽 인원과 우리 인원이 맞아 보여서요. 같이 하실래요?”

“예거시 군, 볼크윈 군? 오, 맞았군요.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도 가장 큰 원인은 역시 예거시의 존재라고 해야 할까.

“예거시, 요즘 얼굴도 안 보여 주고 어디서 뭘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야?”

“어머, 예거시! 이 새로운 미남분은 누구시죠? 이렇게 멋진 분을 새로 사귀었다면 제게도 소개해 주셔야죠?”

예거시는…… 친구가 많다.

‘쓸데없이 사교적인 녀석.’

친구 많고 사회성 좋은 놈은 불편하다.

자석처럼 새로운 사람이 달라붙고, 나 역시 그 사람들과 알은체를 해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라파엘로는 쿵짝이 꽤 잘 맞는 친구였다.

이목을 끄는 수려한 외모와 달리 낯을 꽤 가리는 성격인 데다, 쉬이 말 걸기 어려운 분위기여서 타인이 먼저 다가오지도 않았고, 라파엘로도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통해서 라파엘로에게 용건을 전달할 정도이니 말 다 했지.

“판돈 좀 크게 올려 볼까?”

이럴 때만 눈치 없이 구는 예거시가 자본으로 나를 위협했다.

“올리지 마. 우리 집 가난해. 돈 없어.”

“그런 말을 대놓고 하는 귀족은 네가 처음이다, 그레이. 볼수록 특이한 놈이라니까.”

“피리 부는 예거시 파뉼라만 할까? 숨만 쉬어도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인기인이 누구에게 뭐라 해?”

“……너 진심으로 이 많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모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하는 눈으로 흘겨보자 진지하게 카드를 살피던 볼크윈이 작게 웃었다.

“그레이는 가끔 보면 정말 순수해.”

“욕이냐?”

“그레이, 나도 종종 네가 우리와 어울린다는 게 신기하다. 주변에 영 관심이 없다니까? 하아. ……하여간 이 사람들은 전부 너 때문에 모인 거라고, 친구야.”

대답 없이 묵묵하게 쳐다보자, 예거시가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오, 정말 몰랐나 보군.”

“하하. 머리를 잘 굴려 봐, 그레이. 수법이 다 비슷비슷하지 않았어? 예거시나 나를 핑계 삼거나. 카드 게임을 핑계 삼거나. 단순히 친목 때문이었다면 다른 대형 선실도 가득 차야 했을 텐데……. 과연 가득 찼을까 싶네.”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주위를 살폈다.

모두가 자유롭게 술을 마시며, 카드 게임, 보드게임 할 것 없이 다양한 놀이를 즐기기 바빠 보인다.

그러나 이따금 마주치는 시선에는 은밀한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육감이 말한다.

이들 모두가 내게 집중한다고.

‘어렴풋이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 이유를 단순한 호기심으로 여겼었다. 귀족회 일원이 4년 만에 활동을 시작했으니, 궁금하지 않고서 배기겠는가?

“자, 그럼 여기서 문제 하나. 왜 다들 우리 그레이 웨더우즈 씨를 궁금해할까?”

한데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잘생겨서.”

뻔뻔하게 대답하자 두 사람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너의 그런 자신만만한 점이 좋아, 그레이.”

“고맙다, 볼크윈. 나도 내가 좋아.”

허탈하게 웃은 예거시가 카드 한 장을 가져가며 물었다.

“그레이를 처음 만났던 날. 내가 어떤 말을 했었는지 기억해, 볼크윈?”

볼크윈은 시의 한 구절이라도 읽듯 무던하게 답했다.

“그때 네가 한 말이라면. ‘이곳에 밥 먹듯 뒤따라오는 작자들, 아닌 척해도 저들끼리만 어울리려 들거든. 처음이면 끼어들기도 힘들 거야’였지.”

생각해 보니 이들과의 첫 만남에서 그런 조언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재연할 줄은 몰랐지만.

“기억력이 대단한데, 볼크윈?”

진심 어린 칭찬에 볼크윈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나는…… 한 번 보고 들은 건 안 잊거든. 음. 예거시의 표현이 조금 날것의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틀린 소리는 아니야. 아마 이 블랙라갈호에 탑승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걸.”

“귀족은 귀족대로, 작위 없는 상류층은 상류층대로. 하지만 그건 대분류에 불과해.”

고민 끝에 볼크윈이 판돈을 반절 올렸다.

“그래, 맞아. 자세히 보면 귀족 사이에서도 귀족회에 속한 가문과 속하지 못한 가문 사이에 벽이 있고, 상류층 사이에도 귀족과 연이 깊은 자들과 아닌 자들 사이에 벽이 있거든.”

“흠. 조금 색다르게 나누자면 마도 전쟁 참전파와 침묵파, 수혜파와 비수혜파로 나눌 수 있겠고. 귀족회 안에서는 친황제파와 친제나일파로 나눌 수 있겠군.”

친제나일파는 라파엘로 쪽 사람을 일컫는 말인 듯했다.

그제야 이 둘이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테이블 위의 카드를 가져가며 말했다.

“그거 말이야. 내 위치가 상당히 애매하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리고, 판돈은 올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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