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셋째 날은 오페라를 감상했다. 재미없었다.
넷째 날은 음악회를 감상했다. 미치게 재미없었다.
다섯째 날은…….
‘아니야, 정신 차려. 이런 식으로 게으름 피우면 디안 케트나 의뢰인의 정보는커녕 집사 암살자와의 관계도 틀어질 거야. 아무리 귀찮다고 해도 후자는 곤란하다고.’
농땡이 피우지 말자.
웨더우즈 자작이란 지위로 얻을 수 있는 건 다 얻어서 가야지, 안 그래?
셋째 날을 다시 되짚어 보자.
셋째 날.
“자기. 일어나, 당신을 만나러 사람들이 왔어.”
“음?”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한껏 졸다 깨어나자, 익숙한 얼굴의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비몽사몽인 내 꼴을 조금 당황스럽게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극이 조금…… 지루하셨던 모양입니다. 저희를 기억하십니까? 어제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결투를 함께 구경했었죠.”
“웨더우즈 자작님이라는 걸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내게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결투를 설명해 주었던 신문사 사장 아들과 은행장 아들이었다.
어제의 호탕했던 태도는 어디로 가고, 언사와 표정이 유달리 빳빳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자작이라는 내 신분이 마음에 걸린 듯했다.
하기야. 마음 놓고 편히 대한 상대의 신분이 자작님이라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질 만하지.
나는 길게 하품하며 둘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 친구들을 내가 잊을 리 있겠어? 이쪽 금발의 신사분은 신문사 사장의 아들인 예……크윈. 검은색 머리의 신사분은 은행장 아들인 볼카……시.”
“음. 예거시와 볼크윈입니다.”
“보란 듯이 잊으셨네요.”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어제 못 했던 소개를 대신하자면, 나는 그레이 웨더우즈 자작이야. 이쪽은 내 아내인 모리안 세레니예. 말 편하게 해, 친구들. 아니면 친구로 지내기엔 내가 많이 부족한 건가?”
예거시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손사래 쳤다.
“예? 아니요, 어떻게 그렇겠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야. 어색해지는 건 싫거든. 앞으로 날 어색하게 만든다면 지체 없이 자리를 뜨겠어.”
“……정말 저희가 말을 편하게 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방금 건 실수라 생각하고 넘어가 주지.”
예거시와 볼크윈은 의외라는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곧 조심스레 내게 제의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다름이 아니라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혹시 이 뒤로 일정이 있나?”
“없는데.”
“음. 그럼 우리랑 가지 않겠어? 술 한잔하려고 야외석을 예약했거든. 한데 자리가 조금 남아서 말이야. 아, 물론 웨더우즈 부인도 함께.”
나를 스카우트하는 건 좋다. 한데 루도 데려가자고?
‘루를 데려간다라…….’
나는 어젯밤 그와 즐겼던 게임의 결과를 잊지 않았다…….
루는 내가 23연패를 할 동안 단 한 번도 수를 물린 적이 없다. 내가 성내고 분해할 때마다 루는 더욱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 앞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루의 재기 발랄한 행동과 그에 괴로워하는 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둘의 모습이 그려졌다.
끔찍했다.
“안 돼.”
“안 된다니?”
나는 웃음기 없이 진지한 얼굴로 루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내 아내는 너무 예뻐서 위험해.”
“……아, 그래?”
입을 가린 채 얌전히 웃은 루가 내 어깨를 콩콩 두드렸다.
“자기도 참! 부끄럽게!”
진심으로 수줍게 여기는 표정이라 등에 소름이 돋았다.
루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귀부인의 자태를 흉내 내며 예거시와 볼크윈에게 당부했다.
“아쉽지만 저는 다른 분과의 약속이 있어서요. 제 남편을 잘 부탁드릴게요, 두 분.”
“저런, 아쉽군요. 다음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약속? 처음 듣는 말이다. 나는 슬쩍 고개를 숙이고 루에게 속삭였다.
“약속이라니. 누구와?”
“비밀.”
흠.
‘뭔가 꾸미고 있네.’
안 그래도 어제부터 수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싶었는데.
“이상한 일에 휘말리지 말고 조용히 지내. 알겠어, 자기?”
괜한 사건 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하려 했으나, 선수를 빼앗겼다.
“……응.”
우리는 오페라 홀을 나와 아래층으로 향했다.
블랙라갈호의 좌측 후미 중간층에는 작은 회랑이 자리해 있는데, 하늘을 구경하며 차 한잔을 즐기기에 제격이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볼크윈이 먼저 입을 뗐다.
“그레이. 그레이라고 불러도 되지? 부부 사이가 굉장히 좋더라.”
“나도 아아주 놀랐어. 세레니예라면 아스트로사 왕국에서도 유서 깊기로 손꼽히는 가문이잖아? 이렇게 먼 곳까지 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부인께서 널 깊이 사랑하시는 모양이야.”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예거시를 쳐다봤다.
“내 아내의 가문을 알아?”
“뭐, 어릴 때 북대륙연합교국으로 유학을 갔었거든. 크! 환상적인 문화권이었지. 특히 아스트로사 왕국은 북대륙 문화의 심장이나 마찬가지라 공부할 게 아주 많았다고.”
이후 그는 자신의 유학 시절 여행담을 꽤 길게 설명했다.
대형 신문사 사장의 차남인 예거시가 가진 정보력과 경험담은 여러모로 새로웠다.
“너희도 알다시피, 북데우스산맥 때문에 우리 펜 로타 제국과 북대륙연합교국 사이의 문화적 교류가 시원찮잖아? 아버지가 그쪽에 지사를 두고 싶어 하셔. 마도 전쟁도 끝났겠다, 먼저 자리를 잡아 두면 곧 굉장한 기세로 성장할 게 분명해.”
“……북대륙 쪽 사람들과 주기적으로 교류하나 보지?”
“아무래도? 우리가 후원하는 북대륙문화과 교수들은 그 숫자만 스물이 넘어. 그레이, 너도 자식을 낳으면 무조건 내게 연락부터 넣어.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북대륙 문화가 열풍이잖아? 외국어 선생으로 인기 만점이라고.”
북대륙문화과 교수라. 그들이라면 필시 세레니예 같은 귀족 가문 쪽 정보도 정통할 것이다.
‘세레니예 가문은 분명 루와 연관되어 있을 텐데.’
세레니예 가문의 신분을 사용하여도 문제가 없다고 했으니, 필시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
캐내면 루의 신분과 관련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부탁하는 듯 안 하는 듯 자연스럽게 연줄을 요청했다.
“그쪽 교수들 중 한 명만 소개받을 수 있다면 우리 아내가 아주 좋아할 것 같은데.”
“그야 뭐, 어렵지 않지. 친구 사이에.”
“오.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운걸? 아, 교수 하니까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는데. 혹시 뭐 보물 탐사 수업 같은 건 없나?”
“보물 탐사라면…… 고고학을 말하는 거야?”
“예를 들어, 디안 케트의 유물이라든지.”
그때, 예거시의 눈빛에 미약한 경계심이 서렸다.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아무래도 쓸 만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선 그의 경계심부터 덜어야 할 듯싶다.
나는 한쪽 손에 쥐고 있던 루의 <어린이를 위한 대륙 7대 미스터리 보물 편>을 흔들어 보였다. 내가 꾸벅꾸벅 졸 동안 루가 내 옆자리에서 읽던 책이었다.
귀부인용 핸드백이 워낙 아담해, 남편인 내가 들고 다녀야 했다.
“내 아내가 이런 책을 읽다가 관심이 생긴 모양이야. 먼 나라에서 왔으니 즐길 거리가 적겠지. 가능하다면 그녀와 같이 탐사 여행이라도 떠날까 싶어서.”
그제야 예거시의 표정이 조금 허물어졌다.
“탐사? 이런…… 그레이, 너 정말…….”
“순수하네.”
“그래, 볼크윈. 우리의 새로운 친구 그레이는 아주 순수해 보여. 좀 걱정될 정도로 말이야.”
상류층식 농담인가? 아니면 조롱?
고민하듯 턱을 쓸던 예거시가 몸을 살짝 낮추며 속삭였다.
“부인과의 즐거운 탐사 여행 같은 건, 간단하게 말해서 집어치우는 게 좋아. 디안 케트의 유물은 위험해. 정확히는 근래 들어 아주 위험해졌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몇몇 위험한 자들의 표적이 되었거든.”
위험한 자들의 표적.
‘이거다.’
짧은 문장 몇 마디에 나는 직감했다.
‘예거시가 말한 위험인물 중에는 분명히 의뢰인도 포함되어 있어.’
특히 의뢰인은 웨더우즈 가문 말고도 다른 여러 곳에 기웃거리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디안 케트의 유물은 무려 다섯 점이나 되니까.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깊은 관심을 나타내선 안 됐다. 예거시는 눈치가 귀신같이 빨라서 쓸데없는 의심을 살 수도 있었다.
나는 꽤 흥미로운 전설이라도 전해 들은 것처럼, 문외한의 감상을 짧게 덧붙이며 또 다른 정보를 이끌어 냈다.
“표적? 설마…… 다섯 개를 전부 찾으면 불사신이 된다는 그 전설이 사실인 건가?”
“거기까진 몰라. 하여간 위험하니 다른 놀이를 알아봐.”
“왜 위험한데? 듣자 하니 이쪽이 더 흥미진진해지네. 안 그래, 볼크윈? 그래서 그 위험한 자들은 누구야? 황실이나 비밀 결사 뭐, 그런 건가?”
“아하하…… 그레이, 너 꽤 아이 같은 면이 있구나? 비밀 결사라니, 어릴 때나 듣던 표현이네.”
작게 웃음을 터트린 볼크윈과 달리 예거시의 표정은 묘해졌다. 볼크윈이 설마 하는 눈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왜 그래, 예거시. 정말 황실과 비밀 결사가 연관된 거야?”
잘한다, 볼크윈! 더 물어봐! 더!
“그건.”
입술을 달싹이던 예거시가 두 눈을 감곤 긴 한숨을 내뱉었다.
“……여기까지. 날 자꾸 위험에 빠뜨리려 하지 마라, 이 자식들. 죽어도 자식이 결혼하는 모습은 보고 죽어야지!”
“하하……. 결혼이나 하고 그런 말 해, 예거시.”
결혼? 마침 다음 용건을 꺼내기에 적절한 화제가 나왔네.
“진 버클리그레이튼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