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95)

31화

두 후계의 결투는 처음 듣는 소식이었지만, 그 외의 사정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도 연합군에서도 검성의 가문이 지닌 의무와 권리는 원체 유명했으니까.

버클리그레이튼 공작 가문.

‘펜 로타 황실을 수호하는 제국의 가디언.’

그들의 권력은 제국을 지키는 살신성인의 의무에서 나온다.

제국 내 가장 강한 자만이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가주가 될 수 있으며, 힘을 지닌 누구에게나 가문의 문이 열려 있었다.

나이, 성별, 출신은 따지지 않았다.

무위에 특출한 재능을 지닌 자라면 그 누구든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후계위를 노릴 수 있었다.

선대 가주와 황제의 인정을 받은 후계자만이 새로운 가주에 오를 수 있었고, 때문에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은 역사 대대로 황제의 검이라 불렸다.

이는 전통과 품위를 따지는 귀족들이 그들을 존중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원이기도 했다.

‘이번 대 공작은 무려 검성씩이나 되는데. 그런 남자의 눈에 찰 후계자가 과연 존재할까?’

나는 신문사 사장 아들에게 자연스레 어깨동무하며 물었다.

“그래서. 한 명이 죽으면 결투도 끝?”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야만적인 결투를 하나? 시골에서 한 4년 틀어박혀 있다가 나왔나 보지? 은근히 대화가 안 통한단 말이야.”

두 남자의 눈에 미약한 의심의 기운이 감돈다.

나는 눈치 빠른 상류층 놈들에게 ‘아프면 죽어야지 권법’을 사용했다.

“친구가 이해해 줘. 내가 좀 오래 앓았거든. 침대에서 생사를 헤매느라 모르는 게 많아. 하하, 그냥 집에 처박혀 있을 걸 그랬나 봐. 그렇지?”

효과는 탁월했다!

“오, 이런. 그런 슬픈 사정이…….”

“하아? 나는 그쪽이 아팠었는지 몰랐지! 좋아, 기분이다.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답변해 주겠어. 참고로 내 정보는 아주 비싸다고.”

퍽 깜찍한 호의다.

‘그럼 너는 디안 케트의 유물이 현존한다고 생각해?’라고 물으려던 순간.

갑판 중앙에서 강렬한 파동이 퍼져 나와 우리의 몸을 강타했다.

“헉, 으아악!”

나는 먼지처럼 밀려 나가려는 두 남자의 팔을 붙잡고, 파동의 근원을 확인했다.

그새 결투가 시작됐었던 것 같다.

‘진이라고 했나?’

파동은 긴 은발을 휘날리는 여인의 검에서 터져 나온 게 분명했다. 미약한 기가 얇은 검날에 흩뿌려져 있었다.

검기.

‘저 나이에? 천재네, 천재야.’

다행히 갑판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투명 격벽이 장치되어 있었다.

신문사 사장 아들은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스르륵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어깨를 떨었다.

“으으. 하마터면 끔찍한 트라우마가 하나 생길 뻔했는데? 도와줘서 고마워.”

“맙소사, 방금 그게 검기라는 거구나. 피부가 아직도 저릿저릿해……. 그런데 그쪽은 어떻게 버틴 거야?”

나는 옅은 경외가 느껴지는 질문에 대충 답했다.

“근성으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구경이 싸움 구경과 불구경이라고 했다. 나는 아수라장이 된 구경꾼들의 분위기를 뒤로하고 결투에 집중했다.

사실 집중할 것도 없었다. 기세가 너무나도 일방적이었던 것이다.

일곱 수도 교환하지 않았는데, 후계 서열 5위라는 오스테르는 이미 구석에 몰려 있었다.

“허억, 허억.”

나는 진의 검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귀가 아까부터 간질간질하다 싶었는데.’

착각이 아니라면, 그녀의 검에서 어떠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다.

검이 외치고 있다.

―오면 끝낸다. 와라! 나는 봐주지 않아. 어서 와!

대관절 어떻게 검이 말을 한단 말인가?

한데 시끄럽게 떠드는 진의 검과 달리, 오스테르의 검은 조용했다.

제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어떠한 공명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어렴풋하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스테르는 자신의 의지를 검에 관철시키는 경지까지 못 오른 거야.’

두 검에서 느껴지는 격의 차이는 나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버클리그레이튼 공작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는데.’

“안데르트 경, 검에 자아를 싣지 마라. 검은 검대로 두어라. 검은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다. 검이 너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네가 검을 휘두르는 거다.”

정작 검에 자아를 실은 자가 훨씬 뛰어난 성취를 얻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에 있어 내게 중요한 건 검에 싣는 자아와 성취의 상관관계가 아니었다.

검의 감정이 읽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심신일체의 경지.’

역시 그 일이 분기점이었던 것일까?

이 놀라운 통찰력은 며칠 전, 심신일체의 첫 번째 경지를 넘으면서 얻게 된 새로운 능력인 듯했다.

덕분에 문득 궁금해졌다.

‘내 검도 공명할까?’

한다면 어떻게 공명할까.

고민하는 사이 오스테르가 넘어지고, 진의 검 끝이 그의 턱 아래를 겨누었다.

승자가 정해지기 무섭게 신문사 아들이 끌끌 혀를 찼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저 둘의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크게 벌어진 거지?”

“상대는 진 버클리그레이튼이잖아. 가능하고도 남을 거라 생각해.”

“올해 일주일 동안 치러질 결투들은 결과가 뻔하겠군. 계승 서열 1위가 불참했으니 진 버클리그레이튼의 시간이 되겠어.”

듣자 하니 귀족회 기간 내내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후계자 결투가 이어지는 모양이다.

‘일종의 연례행사 같은 건가?’

볼거리는 많고 좋겠네,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일어서려던 때였다.

쉬지 않고 떠들던 두 남자의 수다가 돌연 조용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내 앞에는 흥분이 채 식지 않은 몸을 끌고 올라온 검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초면에 실례합니다.”

진 버클리그레이튼.

“저는 진 버클리그레이튼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게 잠시만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진의 숨겨지지 않는 호승심으로 들끓는 눈을 마주하며, 나는 이틀 전 나눈 집사 암살자와의 밀회를 떠올렸다.

“올해 귀족회에 참석한다고 했나? 네게 부탁할 일이 있다.”

“뭔데?”

“비행정에 탑승하는 귀족회 일원 중 특정 인물의 처분을 부탁한다.”

집사 암살자는 자신이 챙겨 온 서류 봉투 안에서 흑백 사진 한 장과 얇은 종이 몇 장을 꺼내 보여 주었다.

“타깃은 ‘진 버클리그레이튼’. 버클리그레이튼 공작가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암살 길드 <클론>의 후원자지.”

나는 그의 손에서 빼앗듯 사진을 가져왔다.

사진 속의 여자는 기껏해야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선명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빛이 절대 쉽지 않은 인상이었다.

무려 공작가의 후계자씩이나 되는 인물.

생존이 목적인 집사 암살자가 시답잖은 이유로 건들 리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너, 혹시 이 여자 밑에서 일했어?”

집사 암살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래, 암살 길드 <클론>의 진짜 주인이 바로 이 여자다. 진 버클리그레이튼이 죽으면 <클론>은 와해돼. 나를 노리는 사신이 사라지는 셈이지.”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비행정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귀족회 일원을 암살하면 일이 귀찮아져.”

“그 점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바라는 것은 진 버클리그레이튼의 죽음이 아니니까. 나는 단지 그녀의 후계권이 박탈되기를 바란다.”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에서 후계권의 박탈이란 가문과 완전히 남남이 되는 경우를 뜻한다.

“<클론>은 정확하게 말해서 개인이 아닌 버클리그레이튼 가문 소유의 암약 길드다. 그자의 후계권이 박탈되면, 다음 주인이 정해지고 새로운 체제가 자리 잡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들겠지. 내게는 그 틈이 기회야.”

“……방법은?”

“나도 모른다.”

“장난쳐?”

“당신도 내게 이 펍의 정리를 맡기지 않았었나? 나 역시 당신을 믿을 뿐이다.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의 신뢰는 더욱 공고해지겠지. 더군다나 나는 맨입으로 부탁하려는 게 아니야.”

집사 암살자는 내가 차마 거절하기 힘든 미끼를 흔들었다.

“쓸 만한 정보를 얻었다. 성공해서 돌아오면 디안 케트 유물의 실마리와 주인의 정보를 알려 주지.”

그리하여 맞이하게 된 진과의 첫 만남.

진은, 한마디로 표현해서 의문을 품지 않고서야 배길 수 없는 존재였다.

‘이 여자가 <클론>의 주인이라고?’

진 버클리그레이튼.

특별한 신호를 보낸 적도 없는데, 그녀는 본능적으로 나를 찾아내고 탐색하려 한다.

전쟁터에서 이 여자 같은 사람을 몇 번 봐 왔다.

검귀.

진은 그야말로 검에 홀려서, 검에 살고 검에 죽는 검귀다.

더럽고 치사한 짓을 일삼는 암약 길드를 운영할 성격이 못 되었다.

‘검성도 분명 그렇게 판단하고 있을 거야. 한데 왜 하필 많고 많은 후계자 중에서 이 여자에게 <클론>을 맡긴 걸까.’

뭐, 내막이 어찌 되었든 내가 들려줄 답은 정해져 있지.

“이런, 어쩐다. 미안한데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저는 이미 결혼한 몸이라서 말이죠. 하하. 다른 좋은 인연을 찾길 기도하겠습니다, 진 버클리그레이튼 양.”

“……좋은 인연? 잠깐, 저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이고,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약속에 늦어서 저는 이만.”

나는 은행장 아들과 신문사 사장 아들에게 빠른 작별 인사를 건네고 선실로 돌아왔다.

이번 외출은 진 버클리그레이튼이 어떤 인물인지 확인한 것으로 충분한 소득이 있었다.

‘이다음은 계획을 수립한 후 만나야겠지.’

그날은 종일 선실에 틀어박혀서 루와 카드놀이를 즐겼다.

적어도 둘째 날까지는 무사히, 안온하게 흘러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