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하늘과 가까워서 그런지 태양 빛이 유독 세다. 나는 등불 수십 개를 켠 것처럼 밝은 침실 한가운데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자고 일어났는데 이렇게 상쾌했던 게 얼마 만이더라.’
불면증이 있는 내게 이러한 감각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역시 귀족회 만찬에 불참해서 상쾌한 걸까.
‘어제저녁 만찬, 웨더우즈 자작 입장에선 꽤 중요한 자리였을 텐데.’
4년 만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주제에 보란 듯이 불참한다?
‘시작부터 망했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수정한다.
눈치도 없고 생각도 없는 망나니 가주 콘셉트로 가는 거야. 어쩌면 이쪽이야말로 웨더우즈 가문 입장에선 더 편한 경로일 수 있었다.
‘가주가 멍청하고 오만하다는 소문이 돌면 구태여 친해지려는 사람도 없을 테고. 절로 고립될 테니 적이 생기지도 않을 거고.’
조용하고 한적한 웨더우즈 저택.
오호라, 이것이야말로 하녀장이 바란 궁극의…….
“으음.”
나른했던 정신에 천둥이 쳤다.
그러고 보니 한쪽 팔이 무겁다. 보들보들한 무언가가 내 팔을 베개처럼 베고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고개를 돌리니.
“일어났어?”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가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
“아악!”
으아악!
나는 벌레 털어 내듯 팔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진 후에야 뒤를 돌았다.
바닥에 떨어진 루가 턱을 괸 채 선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있잖아, 자기야. 산통 깨지 마. 기껏 자작 부인 역할에 몰입하고 있잖아. 자꾸 방해하면 혼자 두고 가 버릴 수 있어.”
또라이에게 또라이라고 소리칠 기력도 없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답했다.
“침대는 따로!”
“신혼부부가 왜?”
“그건 위장.”
“나 참. 부끄러워?”
사라락. 몸을 일으키는 루의 가느다란 다리를 따라서 부드러운 천이 흔들렸다.
양장점에서 맞춘 잠옷까지 걸쳤어? 외출복을 걸치고 잠든 남편 옆에서 아주 제대로 잠드셨다, 그래.
사뿐거리며 다가온 루가 기상을 알리는 정제석 벨을 울리곤 싱긋 웃었다.
“우리 데이지 양은 부끄러우니까 또 머저리처럼 말하네. 사내새끼 얼굴로 그러니 짜증 나긴 하는데. 뭐, 화날 정도는 아니야.”
나는 오늘도 고찰한다.
‘루는 사람이 아니다. 루는 개다. 대화하려고 하지 말자.’
좋아, 평정심을 되찾았다.
건너편 의자에 앉은 나는 다 구겨진 타이를 천천히 풀며 물었다.
“어제 왜 안 깨웠어?”
“그렇게 잘 자는데 어떻게 깨워? 모리안은 사랑하는 자작님이 푹 쉬었으면 좋겠는걸. 자, 이거나 확인해. 블랙라갈호의 일정이야.”
나는 루가 건넨 팸플릿 비슷한 종이를 확인했다.
『블랙라갈호 탑승자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는 7일간 아래의 일정으로 항해합니다.
편안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그 아래로 이어지는 일정은 휘황찬란했다.
‘오페라, 음악회, 초청회, 박람회, 강연…….’
맨 밑에 귀족회 일원은 일정마다 따로 연락이 온다고 적혀 있다.
“다들 놀고먹느라 바쁘시군.”
어느새 도착한 따뜻한 홍차를 호호 불어 마시며, 루가 웃었다.
“친목이란 게 다 그런 거지. 시간과 공을 들여 관계를 다지는 것. 귀족들에게는 그게 일이야. 그래야 가진 걸 놓지 않고 더 가질 수 있으니까.”
노는 게 일이라고? 귀족의 삶은 대단하구나.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디안 케트든, 의뢰자든. 일단 나가서 돌아다녀야 뭐라도 소득이 있겠어.’
놀지 못해서 안달 난 귀족들이여.
기다려라, 노동의 제왕, 하녀가 간다.
“나가게?”
내가 외출을 준비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구경하던 루가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한 목적을 알렸다.
“웨더우즈 가문에 암살자를 보내는 의뢰인 말이야. 아무래도 귀족회 일원 같아서.”
지난 며칠간 나는 고심에 빠져 있었다.
‘웨더우즈 가문의 고용인 모두가 말살될 수 있다’던 집사 암살자의 경고가 무색하게, 저택도 미드윈트리도 평화로웠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평화는 이전보다 더 큰 불안감을 야기한다. 의뢰인의 심리를 추측하던 나는 꽤 그럴싸한 추측에 도달했다.
‘의뢰인이 보통 귀족이 아닌, 귀족회 일원이라면……. 근래 조용한 것도 이해가 가.’
더 정확히 말해서 웨더우즈 저택을 들쑤실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귀족회 참석 의사를 밝힌 웨더우즈 자작과 직접 대면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으흠?”
수상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썩인 루가 한창 늘어져 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아…… 그래, 그렇겠어. 우리 자기의 추리력이 꽤 좋아. 방금은 조금 놀랐는걸?”
“무슨 뜻이야?”
코앞으로 다가온 루가 내 턱에 입을 맞췄다.
“잘 다녀오라는 뜻. 하아암. 나는 좀 더 쉬어야…….”
쾅!
나는 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고 선실을 나갔다.
‘쟤 미쳤나 봐. 외간 여자의 턱에 입술을 들이밀어?’
나는 열심히 턱을 닦으며 걸음을 이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모리안 노릇을 하는 루의 행동과 말투도 오묘하게 바뀌어서 그런 걸까? 정말 시, 신, 신혼…….
짜악!
나는 뺨의 후끈거림을 마음에 되새기며 눈을 부릅떴다.
‘정신 차리자. 너 같은 애가 사이비에 끌려가서 몸도 바치고 마음도 바치는 거야.’
루를 돈 뜯어먹는 사이비 교주로 생각하니 번뇌가 사라지고 심신이 평안해졌다.
대인배의 마음가짐으로 설렁설렁 걷던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앞서 계단을 올라가던 젊은 두 남성의 목소리와 걸음에 미약한 기대심이 만발했다.
나는 계단을 서너 개씩 훌쩍 뛰어올라 가 그들 옆에 나란히 섰다.
“이봐, 친구들. 뭐 재밌는 일이라도 생겼어? 같이 좀 알자.”
이제 겨우 스물을 넘었으려나. 두 친구는 당혹감과 불편함이 서린 눈으로 내게 물었다.
“당신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흠. 누구시죠?”
“나? 그냥 별 볼 일 없는 탑승객이야. 대단하다는 귀족회에는 이번에 처음 놀러 왔거든. 그래서 그런가, 친구도 하나 없고 지루하네.”
둘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내 차림새를 훑었다.
그러다 곧 내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경계심을 풀었다.
루가 채워 준 시계인데, 아무래도 이들 기준에 부합하는 값비싼 물건이었나 보다.
“첫 참석이라고? 아아, 그럼 지루할 만도 하지. 이곳에 밥 먹듯 뒤따라오는 작자들, 아닌 척해도 저들끼리만 어울리려 들거든. 처음이면 끼어들기도 힘들 거야.”
“오. 그래?”
“미남이니 하나 경고해 둘게, 친구. 두 눈에 불을 켠 일부 부인들을 조심해. 쥐도 새도 모르게 사윗감으로 점찍힐 수 있어. 돈 좀 있다 하는 자본가들이 기를 쓰고 이 연회에 끼어들려는 게 다 인맥과 결혼 때문이라고.”
금발은 자신을 모 신문사 사장의 아들이라 소개했고, 흑발은 자신을 모 은행장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귀족회의 일원이 아니기에 더욱 다가가기 쉬웠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리고 또 익숙하게 자기를 소개하던 이들이 나에 대해 묻기 직전.
나는 둘의 말을 끊고 계단 위쪽으로 턱짓했다.
“좋아, 선배님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건데?”
선배라는 호칭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신문사 사장 아들이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귀족회는 말이야. 재수 없기는 해도 매해 재밌는 일이 일어나거든.”
은행장 아들이 뒷말을 이었다.
“응. 특히 버클리그레이튼 공작가의 후계 싸움만큼 재밌는 구경이 없어.”
“자자, 늦기 전에 어서 가 보자고.”
방금 아주 흥미로운 설명이 덧붙여진 것 같다.
우리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비행정 꼭대기의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람은 여유로웠다.
나는 알맞은 높이에 알맞은 속도, 그리고 알맞은 온도로 불어오는 천공의 바람을 맞으며 잠시간 눈을 감았다.
초대형 비행정은 이런 점이 좋다.
기체의 구조 안정성이 높아서 그런지, 해양의 유람선처럼 야외 휴식을 즐길 만한 갑판이 존재했다.
“이봐, 한눈팔지 말고 따라와. 저쪽이야.”
하지만 노는 게 일인 상류층 자제들은 바람의 여유를 즐길 생각이 없는 듯하다.
나는 조금 아쉬워진 마음으로 그들을 따랐다.
블랙라갈호의 갑판은 그 구조가 조금 특이했다. 중앙에 자리한 광장이 가장 낮고, 그 주변을 둘러싼 일대가 계단처럼 층층이 올라가는 구조였다.
“마치 콜로세움 같군.”
“그쪽은 블랙라갈호 탑승도 처음인가? 이 비행정은 버클리그레이튼 가문의 소유야. 이 공간은 수련 용도로 설계되었다는데, 워낙 독특한 분위기라 남녀노소에게 인기가 많아.”
“오죽하면 최근 수주가 확정된 대형 비행정들의 갑판이 이런 원형 콜로세움 형식을 본뜰 정도라네.”
초대형 비행정은 설계에도, 유지에도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그런 이동 수단 꼭대기에 수련장을 올려 두다니. 너무 검성답고.
설명이 주특기인 신문사 사장 아들은 무지한 나를 위해 금일 이벤트를 천천히 설명했다.
“다행히 아직 시작 안 했군. 저기, 가운데 대치하고 선 두 남녀가 보이지? 왼쪽의 여자가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 서열 2위인 진. 오른쪽이 5위인 오스테르.”
진.
익숙한 이름이다. 나는 두 눈을 얇게 뜬 채 진이라 불린 여성의 면면을 세밀히 살폈다.
“아아, 그래. 딱 봐도 사이좋아 보이지는 않네. 그래서 둘은 왜 마주 보고 서 있는 거야? 시 낭송 대결이라도 하려는 건가?”
“시? 버클리그레이튼의 후계가? 푸핫, 그거참 재미없는 농담인데?”
“둘은 결투를 하는 거야. 어젯밤 귀족회 만찬에서 공표한 결투라는데, 소식 못 들었어? 구경하다 화를 입을 시 책임지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대.”
미안.
그때 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