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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195)

29화

눈치라고는 없는 두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초대형 개인 비행장으로 향하는 길목이 나타났다.

우리는 그곳에 마련된 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내가 자신의 뒤통수를 계속 노려보는 게 우스웠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루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일까, 우리 자작님께서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가 너무 예쁜 게 불만이야.”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루의 한쪽 눈썹이 들썩했다.

순간, 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

모리안으로 변한 루가 아닌, 190cm의 뻔뻔하고 건방지고 성격 나쁘고 남 갈구는 게 취미인 정원사 겸 요리사 루를 상대하는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다.

예쁘니 뭐니 지껄였던 내 입술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내 불만은 명확하다. 할 말은 해야 속이 시원하겠다.

“그렇게 예쁠 필요 없었잖아.”

괜히 시선만 집중되고 말이야.

시종은 두 귀를 닫고 운전에 몰입했으나, 별 주접을 다 부린다는 눈만은 숨겨지지 않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루는 음산하게 경고했다.

“나한테 반하지 말랬지.”

“나한테 헛소리하지 말랬지.”

“날 꼬시는 건 괜찮아. 하지만 다른 여자한테는 하지 마.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줄 알아. 뾰로통하게 입술도 내밀지 말고. 도끼눈도 뜨지 말고.”

“아주 그냥 숨도 쉬지 말까?”

그사이 우리를 실은 마차는 개인 비행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고 나서는 짧게나마 감탄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또.’

야회 연회 같네.

파릇파릇한 잔디에는 테이블이 즐비했는데, 하나같이 달콤한 디저트와 샴페인이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비행정에 오르기 직전의 여유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기에 바빠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 한 폭의 그림처럼 자리한 대형 비행정.

‘블랙라갈호라고 했나?’

일단 시커멓기는 하다. 하늘에 뜨면 살찐 까마귀가 비행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두꺼운 타원형 몸체가 얼마나 비대한지, 초대형이라는 수식어가 단번에 이해됐다.

“귀족회분들은 선 입장입니다.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짐은 저희가 따로 선실까지 옮겨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런 식의 극진한 대우가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루는 아주 익숙해 보였다. 심지어는 제 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는 남자들을 향해 손까지 흔든다. 넌 정말 난놈이구나.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나 정도는 쉽게 묻힐 수 있겠어.’

루가 쓸데없이 아름답지만 않았어도 더 잘 묻힐 수 있을 텐데.

“제발, 부디, 기필코 얌전히 지내다 돌아오세요. 사고 치지만 않으면 웨더우즈 저택도 한층 더 평화로워질 겁니다. 이렇게 부탁할게요.”

나, 데이지.

존재하지도 않는 주인님을 대신해 전선에 선 용감한 병졸.

나는 두 손을 싹싹 빌 기세였던 하녀장의 당부를 되새기며, 비행장을 채운 수십 명의 유력 인사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했다.

‘음.’

누가 누구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분명 지난 며칠 동안 <기억해 두면 좋은 귀족회 일원>을 외웠던 것 같은데. 역시 그런 게 외워질 리가.

‘게다가 귀족회보다 귀족회가 아닌 자들이 더 많아.’

부유한 평민들도 여럿 보였다.

말이 귀족회지, 이 정도면 규모가 큰 상류층 친목회나 다름없었다.

비행선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은 길고 불안정했다.

나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루를 조심스럽게 보조하며 계단에 올랐다. 하늘 아래 수십 통의 머리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자는 누구지?”

“젊군. 근래 귀족회 중 새로운 가주를 맞이한 가문이 있었나?”

“그러게요. 저렇게 눈에 띄는 부부라면 우리가 모를 리 없는데 말이죠.”

입구에 도착하자, 우리를 안내하던 남성이 승무원에게 말했다.

“웨더우즈 자작 내외분이십니다.”

신분을 확인받고 선내로 진입하던 때였다.

“……웨더우즈 자작?”

우리보다 앞서 통로를 지나가고 있던 남성이 등을 돌렸다. 세월의 무게가 근사하게 깃든 낯이 내게 물었다.

“정말 웨더우즈 자작 맞나?”

나는 그 위풍당당한 풍채의 중년의 얼굴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웨더우즈 자작의 백부의 장인 되는 자.

그리고 연합군으로서 함께 전장을 누볐던 전우이자, 검의 조예를 깊게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던 스승.

그는 로즈벨 백작이었다.

당장에라도 다가가 인사하고 싶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라. 넌 안데르트가 아니야. 신나게 알은체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반가움이 이렇게나 위험하다.

나는 광대 바로 아래까지 올라간 입꼬리를 천천히 내리며 답했다.

“예, 제가 그레이 웨더우즈입니다. 로즈벨 백작님 맞으십니까?”

“설마 했는데……. 그렇소, 내가 로즈벨 백작이오.”

가까이에서 본 로즈벨 백작의 이마에는 긴 상흔이 남아 있었다. 한때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선명했던 흔적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옅어져 있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하하, 돌아가신 백모님께서 종종 백작님의 이야기를 하셨던 게 생각나네요. 제게 로즈벨 백작님은 동화 속 영웅과 같은 분이셨죠.”

로즈벨 백작은 다소 불편한 눈으로 내 악수 요청을 받아들였다.

“분에 넘치는 칭찬 고맙소, 웨더우즈 자작. 한데 우리가 전에 만났던 적이 있던가? 어쩐지 익숙하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예리하네.

백전노장의 육감은 소드 마스터 부러울 것 없다더니. 옛말에 틀린 데 하나 없다.

“아니요. 만나 뵌 적은 없습니다. 갑자기 알은척해 언짢음을 느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오. 그간 연이 끊겼을 뿐, 웨더우즈와 로즈벨은 가까운 인척 관계지.”

로즈벨 백작의 언사는 딱딱했다. 안데르트로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배는 더 차갑게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딸의 재산을 홀라당 빼앗아 먹은 주제에 얼굴 한번 안 비쳤으니 고까울 만도 하지.’

마음은 이해되지만 내 알 바 아니다.

난 웨더우즈 자작이 아니거든.

“나야말로 자작과 이렇게 마주하게 되어 반갑소. 옆의 아리따운 여성분은…….”

“제 아내, 모리안 세레니예입니다.”

“결혼을 했던가? 오늘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니. 방금 말한 인척 관계란 표현이 무색해지는군.”

“죄송합니다. 그간 사정이 있었습니다.”

거, 사정이 있었다는데 싸늘한 표정 좀 풀어 주지. 후계자가 알이었다는데 어쩔 거야? 알을 넘어서 마도구 따위였다는데 어쩔 거냐고.

“로즈벨의 고트 로즈벨이오.”

다행히 로즈벨 백작은 애먼 여자까지 위협할 사내는 아니었다.

그 거친 전쟁터에서도 ‘신사의 검’이라 불린 자다. 적어도 루와 통성명할 때의 로즈벨 백작은 훨씬 부드러웠다.

그에 루는 소녀처럼 밝은 미소로 대응했다.

“모리안 세레니예입니다. 연합군의 이름난 명장을 뵈어 기쁜 마음이에요.”

“세레니예라면?”

“아스트로사 왕국 출신입니다. 친부께서 세레니예 백작 되십니다.”

“아스트로사? 북대륙연합교국 중 한 곳? 참 먼 곳에서 오셨소.”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라면 더 먼 곳으로도 갈 수 있답니다.”

슬며시 웃는 로즈벨 백작의 눈이 씁쓸하다. 죽은 딸이 떠오른 모양이다.

짧은 한숨을 뱉은 그는 곧 내 얼굴을 응시했다.

“자작, 사정은 누구에게나 생기는 법이지. 그러나 누구나 이해해 주지는 못한다네. 어찌 되었든 웨더우즈 가문의 명맥이 끊기지 않았다니 다행이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모두가 다행이라 여기지는 않을 테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충고 감사드립니다.”

로즈벨 백작은 그대로 등을 돌려 멀어졌다.

‘적의는 없어서 다행이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승무원에게 안내받은 선실은 넓고 편안했다. 침실과 응접실 그리고 집무실까지 구비되어 있어 마치 작은 별장에 놀러 온 듯했다.

이동용 비행정만 타다가 유람용 비행정을 타니 감탄이 터지는 순간의 반복이었다. 게다가…….

똑똑.

“아!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초면에 죄송합니다, 웨더우즈 자작님. 꼭 뵙고 싶었던 터라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됐습니다.”

나와 통성명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은지.

‘이게 명문 귀족 가문의 힘인가?’

웨더우즈 자작으로서 나름 최선을 다해 대꾸하고 내보냈는데.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즈음 비행정이 떠올랐다.

이 비행정은 일주일 동안 세 도시를 경유하고 다시 라갈로 돌아온다.

봄의 새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멀어지는 라갈을 구경하니 기분이 오묘했다.

어쩌다가 내가 웨더우즈 자작 노릇까지 하게 된 걸까.

‘하녀의 삶은…… 정말 종잡을 수 없구나.’

똑똑.

아홉 번째 노크다.

나는 접대용 미소를 만면에 띤 채 문을 열었다.

다행히 이번에 나를 찾아온 이는 승무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웨더우즈 자작님. 오늘 저녁에 귀족회 만찬이 열릴 예정입니다. 참석하시겠습니까?”

귀족회 만찬이라.

‘웨더우즈 자작이 공석에 나타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좋은 인상을 심어 놔서 나쁠 건 없겠어.’

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래야지.”

“4시간 후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승무원이 나간 후 길게 기지개를 켰다. 몇 시간 내내 이동만 해서 그런지 몸이 꽤 피곤했다.

잠깐만 눈을 붙여야지. 나는 침실 쪽으로 이동하며 루에게 부탁했다.

“저녁때 깨워 줘.”

묵묵히 창밖을 구경하던 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하녀의 본분을 잊고 마음 편히 낮잠 좀 자 볼까?

그렇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났을 땐.

다음 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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