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꽃? 모종이 아닌 씨앗이 필요하다고? 날이 따뜻해져서 꽃을 사 가는 사람은 많은데, 씨앗을 사 가는 사람은 오랜만이네. 자아…… 이 앨범에서 마음에 어울리는 그림으로 골라 봐요, 아가씨. 그 꽃의 씨앗을 줄 테니까.”
모르는 척 잊고 지냈던, 생애 처음으로 심은 꽃의 이름도 떠올랐다.
“이 꽃으로 골랐어? 마침 봄에 딱 맞는 꽃이네. 생긴 게 탐스럽고 예쁘죠?”
“아니, 이름이.”
“이름?”
“이름이 마음에 들어.”
“……아아, 예쁘기는 하지. ‘데이지’라는 이름.”
꽃의 이름은 데이지였다.
나는 데이지를 심었다.
데이지가 데이지를 심었으니, 화분에 어찌 의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아아,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데이지’라는 이름에 애정을 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이름이 아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건, 켜켜이 쌓여 가는 매 순간이었다.
선택하는 나도, 이중적인 나도, 후회하는 나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나이다.
순간이 쌓일수록 나는 더욱 견고해진다.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더 나답다. 그러니 오늘의 ‘나’야말로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나’였다.
‘삶의 주도권은 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는 나를 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의 주도권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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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간 영혼에 힘이 깃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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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부터 감고 있었는지 모를 눈을 떴다.
“방금…….”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숨을 가다듬을 동안, 머리 위로 커다란 온기가 닿아 왔다.
“잘했어.”
대뜸 그리 말한 루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답지 않게 자상한 눈빛이 내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나 역시 내 몸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손바닥뿐만이 아니다.
턱 아래로 방울지며 떨어진 땀이 내 두 무릎 사이에 고여 있었다. 옷가지까지 축축하니, 마치 강물에서 물장난이라도 치고 나온 듯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따로 존재했다.
‘깨질 것처럼 위태했던 영혼이…… 한층 견고해졌어.’
3년으로 예측했던 수명도 어림잡아 두 배로 늘어났다.
‘대체 어떻게?’
내가 방금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 알겠다. 검사로서 살았던 과거의 나였다면 괴성을 지르며 즐거워할 순도 높은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깨달음은 육체를 치유할지언정 영혼은 치유하지 못한다.
영혼은 깨지기 어렵고, 치유는 불가능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랬다.
루는 내 머리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혼란스러운 눈인데. 심신일체(마음과 몸이 하나가 됨)의 경지를 처음 겪나?”
“……심신일체?”
“간단히 말해서 반신에 오르는 과정이지. 너는 네 단계 중 이제 막 첫 단계에 오른 거야.”
뭐? 반신? 너무 놀라서 숨을 삼키다 목이 막힐 뻔했다.
반신.
대마법사 메피스토와 치료술사 디안 케트가 올랐다는 지고의 경지.
반신의 경지에 오른 자는 역사적으로 손에 꼽는다.
위대한 마법사인 펜 로타 제국의 건국 황제도, 영웅이라 불려 온 수많은 소드 마스터들도 차마 신이라는 이명은 갖지 못했다.
현세대의 반신은 북대륙연합교국에서 신으로 추앙받는 교주를 포함해 단둘뿐이라 들었다.
라파엘로도, 검성도 오르지 못한 그 경지에.
“내가 왜?”
반문을 들은 루의 미간이 곱게 찌그러졌다.
하지만 무어라 질타하려던 시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정심을 되찾았다.
“데이지 양. 당신의 육신은 꽤 쓸 만한 경지에 오른 것 같은데. 그 수준에 오를 동안 스승이 심신일체에 대해 알려 주지 않았나?”
꽤 쓸 만한 경지라는 표현에서 잠시 욱했지만. 중요한 정보를 넘겨줄 분위기라 곱게 넘어가기로 했다.
“나는 그런 거 없는데.”
“없다고?”
“응. 나는 스승이 없어.”
실은 없다기보다는 여기저기 널려 있다고 봐야겠지. 단 한 번의 조언이라도 건넨 자들 모두, 따지고 보면 내 스승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어이가 없군. 데이지 양은 스승도 없이 검을 단련하고, 그런 검술로 전쟁터에서 살아남았다는 건가?”
헛웃음을 뱉은 루가 천천히 턱을 쓸었다.
그는 아주 재미있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당사자인 나는 조금도 재미있지 않았다.
“……내가 검사란 걸 어떻게 알았지?”
나는 그에게 내가 검을 사용한단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경계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자, 루는 가소로운 짓 하지 말라는 듯 내 코끝을 가볍게 튕겼다.
“우리의 귀여운 데이지 양이 검사란 티를 풀풀 풍기는데, 어느 누가 모를 수 있을까?”
“우스갯소리로 넘어가려 하지 마. 너 빼고 다 몰라.”
루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오랫동안 검을 잡은 자들은 생활에도 그 습관이 배어 있기 마련이지. 경계 태세를 갖출 땐 오른쪽 어깨를 뒤로 빼서 발검 자세를 한다든지.”
이어서 그는 장난스럽게 내 왼쪽 손등을 두드렸다.
“습관적으로 오른쪽 둔부를 더듬어서 검을 확인한다든지.”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루의 지적은 진실이었고, 또 내가 왼손잡이 검사란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탓이다.
“불리하면 입 닫을 때 표정.”
“…….”
“어린애 같아서 웃기네.”
“크흠. 흠.”
나는 경건하게 심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괸 채 물끄러미 쳐다보는 루의 눈동자에는 평상시엔 느낄 수 없는 희귀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자애.
그의 눈에서 자비로움이 느껴진다!
이유는 몰라도 지금의 루는 몹시 자비로운 상태였다. 이건 몇 없는 기회다. 때를 놓치지 않고 진지하게 입술을 열었다.
“루 씨, 질문이 하나 있어. 진지한 질문이니까 장난치지 말고 대답해 줬으면 해.”
“싫은데?”
“심신일체의 경지는 네 단계로 나뉜다고 했잖아.”
“내 거절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군.”
“반신이 되면 육체에도 큰 변화가 생겨서, 모든 병세와 상흔이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웬만한 무기에는 상처도 입지 않는다고 들었어.”
다행히 루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혹시 영혼도 그래?”
육체가 신의 그릇으로 재탄생한다면, 그에 맞춰 영혼 역시 신의 영혼으로 재탄생해야 옳은 이치이지 않을까?
루의 음산한 눈매가 한층 짙어졌다.
“궁금해?”
“응.”
“궁금하면 무릎 꿇고 ‘제발 알려 주세요, 주인님.’이라고 해 봐.”
못 하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나는 곧장 무릎을 꿇고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제발 알려 주세요, 주인님. 자식아.”
그는 흥이 식은 얼굴로 대답했다.
“가능하지.”
이어서 여상한 눈으로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반신이 되는 건 불가능해. 적어도 확률적으로는 말이야. 왜? 우리 데이지 양은 반신이 되고 싶나? 불량한 영혼이라도 소유한 거야?”
신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내 심장에 화살을 쏘았다.
“엉겁결에 첫 번째 벽을 넘으니 나머지 세 개의 벽도 손쉽게 느껴지나? 지금처럼 어영부영 적당히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 어쩌다 보니 반신의 경지를 선물 받고, 세계 최고로 운이 좋은 하녀가 되어 몸과 마음 모두 천수를 누릴까 싶어?”
짜증 나는 놈.
‘뭐라고 반박을 못 하겠네.’
하지만 상처 입은 자존심과 별개로, 그의 조롱은 백번 옳았다.
실제 생각지도 않게 얻은 깨달음이 너무 달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네 개의 단계를 쉽게 넘을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반신으로 넘쳐 나겠지.’
게다가 나는 수명이 짧다. 나에게 남들과는 다른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심신일체를 완성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하마터면 헛된 희망으로 눈을 돌릴 뻔했어.’
루는 언사가 사납고 고깝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재수 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나는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덕분에 많이 깨달았어, 루 씨. 나는 이만 돌아갈게. 오늘 도와줘서 고맙고, 잘 자.”
그대로 걸음을 이어 문 쪽으로 걸어가던 와중에, 루가 나를 불러 세웠다.
“데이지 양.”
나는 침실의 문을 연 채 멈추어 섰다.
너 의외로 마음이 약하구나. 말을 거칠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려는 거지? 따위의 따뜻한 생각을 하며 루를 돌아봤지만.
“해 떴어.”
“…….”
“우리는 지각한 거야. 당신 때문에.”
거짓말이지?
나는 몸을 되찾은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귀가했다.
현관 앞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끔하게 차려입은 하녀장이 살벌한 웃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지 양? 이것으로 두 번 지각이군요. 감봉입니다.”
그리고 나는 감봉당했다.
제길!
하지만 오늘의 불운은 감봉으로 끝나지 않았다.
루가 남긴 거짓말이 또 다른 지옥을 파생한 것이다.
“오늘부터 하루에 20분씩 짧은 교육에 들어갈 겁니다. 도시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서는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이 필요하죠. 데이지 양에게 결여된 사회성과 윤리 의식을 키워 주겠어요.”
나는 그렇게 정오 휴식 시간의 20분을 잃었다.
젠장!
이건 주도권 있는 삶이 아니야. 하녀장 미워요.
이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서, 수도로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