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95)

25화

부정적인 감정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매몰되기 쉽다.

나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고통스러운 잔상을 지우기 위해 루의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았다.

“덕분에 살았어.”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네. 나를 힐긋 바라본 루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녹은 아이스크림도 그 인사가 듣고 싶었을 텐데.”

“……버렸어?”

“국립 평화원 관리자에게 선물했지. 두 개 다.”

기절하기 전에 들렸던 또 다른 목소리가 국립 평화원 관리자의 목소리였구나.

“루 씨는 먹지.”

“그래도 좋았겠지만 누구를 집까지 옮겨야 해서.”

생색은 엄청나게 내네.

하지만 생색내도 할 말 없는 상황이라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탁, 책을 덮고 테이블에 던진 루가 눈을 맞추며 가볍게 웃었다.

“내가 분명 의자에 앉아 얌전히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그렇지?”

어둠 속에서 음산하게 그려지는 미소가 그렇게 섬뜩할 수 없었다.

미소는 루의 이목구비가 풍기는 특유의 어둡고 화려한 분위기와 완벽히 융합돼서, 금방이라도 연장을 쥐고 ‘말 안 듣는 개는 필요 없다!’라며 내 머리를 후려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래서 더 얌전히 대답했다.

“빚을 졌네.”

“내게 빚을 지는 사람은 많아. 갚는 사람은 적지만.”

“안 떼먹을 테니까 걱정 마.”

“기대를 해야 걱정도 하지.”

한 마디도 안 물러서는 자식. 기대도 안 해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해? 응?

“쓰러진 동안은 지켜볼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서 내 집으로 데려왔다. 적당한 시간에 알아서 돌아가.”

“나 때문에 계속 이 방에 있던 거야?”

“내가 아닌 시종들이.”

시종이라면…….

루의 입술이 그리는 호선이 짙어졌다.

“그래, 우리 깜찍한 데이지 양이 내게 떠넘긴 그 쓰레기들 말이지.”

못 들은 척했다.

“하녀장은 오늘 일을 모르니 괜히 말실수하지 말고.”

이번에는 못 들은 척할 수 없었다.

“뭐라 거짓말했어?”

“데이지 양이 며칠 전의 일을 반성하려 들지 않고 오늘도 한 사람을 매장하려 들어서 특별 교육 중이다, 라고?”

“루 씨. 루 씨가 말하는 꼴을 듣고 있으면 고마운 마음은 사라지고 화만 남아.”

어쩌라는 거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그가 다시 책을 집었다.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조용히 독서에 빠졌다. 예상외 태도였다.

‘내 과거에 대해서도 물을 줄 알았는데.’

그래서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대충 소년병으로 짧게 복무했었다고 대답할 준비까지 마쳤는데.

루는 그쪽으로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날 배려하는 건가?’

타인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씨의 루.

정말 안 어울린다. 정말 순수하게 관심이 없는 걸로 하자.

그가 관심 있는 건 단 하나야.

『어린이를 위한 대륙 7대 미스터리 보물 편』

나는 루가 정독하기 바쁜 책의 표지를 조용히 노려봤다.

아마도, 루는 디안 케트의 유물을 찾고 있다. 유물을 어디에 사용하려는지는 그의 개인사이니 내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루에게는 디안 케트의 유물을 구별할 능력이 있으며, 웨더우즈 저택에 숨겨져 있던 유물은 이미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루 씨가 웨더우즈 저택에 온 건 디안 케트의 유물 때문이지?”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훔쳐 갈 거야?”

루의 입가에 싸늘한 호선이 그려졌다.

“내가 분명 꽃을 다 피워야 알려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닌 척 날로 들으시겠다?”

밤이 주는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이번에도 루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인지. 나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그냥, 궁금하잖아.”

반은 이자가 내 계획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

나머지 반은 루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의문에.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까와 달리 조금은 진중해 보이는 낯이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지. 나한테 반하지 마.”

“…….”

“사랑에 빠지지도 마. 본인만 다쳐.”

“그 미친 소리는 대체 언제 그만둘래?”

루가 작게 웃었다. 아까보다 훨씬 따뜻한 웃음이었다.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오늘 같은 일은 자주 겪었나?”

절로 입술이 닫혔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훅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자주인가?’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세상은 종전을 맞이한 지 4년이라지만, 내가 눈을 뜬 지는 두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늘 겪은 환각은 두 달에 한 번 겪는 환각일 수도 있었고, 1년이나 2년, 혹은 생에 마지막으로 겪는 환각일 수도 있었다.

“이번이 처음이야.”

“악몽은?”

“그것도 최근에 처음으로 꿨어.”

“최근 당신에게 환각과 악몽을 불러일으킬 만큼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었다든지?”

“음.”

“아니면 반대로, 환각과 악몽을 단기간 잊게 할 만큼 즐거운 사건이 있었다든가.”

“음.”

“대답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군.”

“딱히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삶의 주도권은 나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 최근에 당신에게 있었던 일을 되짚어 봐. 그 일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

“고민 없는 삶. 통찰 없는 삶. 편하고 행복할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의 영혼을 쓰레기장에 내던진 것과 다름없다. 비워지지도, 채워지지도 않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매한가지야.”

평이하게 이어진 목소리는 내 심장에 낮지 않은 파고를 일으켰다.

‘삶의 주도권은 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배움이 짧은 내겐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검을 처음 배울 때도 그랬다.

나에게는 제대로 된 검술 스승이 없다.

오직 동생의 원수인 대마법사 메피스토와 마귀를 처단한다는 일념으로 무기를 들었고, 철저히 살귀(殺鬼)가 되기 위해 검을 다졌다.

“가장 본질적인 요소부터 파고들어라. 그리하면 이루지 못할 경지가 없다.”

다행히 전장에는 수많은 영웅이 존재했고 그들이 내게 남긴 조언은 한결같았다.

배움이 없던 나는 그 진리 하나로 벽을 넘었다.

따라서 본질을 아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본질을 파고드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

‘삶의 주도권은 나를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나는 무엇일까?

나, 데이지 파거.

한때는 안데르트 파거로 불렸던 남자.

그보다 더 오래전에는 -- 파거로 불린 여자.

하지만 이름만으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데이지.’

제국에 널린 흔하디흔한 이름.

애초 특별한 뜻을 부여하고 싶지 않아 붙인 이름이었다.

사실 이름을 지을 때에는 뜻과 애정을 담기 마련이다. 그 애정은 나라는 존재에 책임감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이 무성의한 가짜 이름을 지어 놓고도 나는 한 달이 훌쩍 넘게 멀쩡했다. 어떠한 악몽도, 환각도 겪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나를 지탱해 준 걸까? 답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하녀가 되어 기뻤다.

나는 저택을 청소하는 일이 즐거웠다.

마귀를 베지 않는 일로 하루를 채우고, 사람과 만나며,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사실이 즐거웠으며 바닥을 쓸고, 커튼을 세탁하고, 심부름을 하는 것으로 내 역할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즐겁게 한 것은, 안데르트가 아닌 데이지로서 살아가는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평화는 짧았다.

웨더우즈 저택에 정착한 후 열흘이 지나서 악몽을 꿨다.

죽은 병사들의 팔이 달라붙고 안데르트라는 이름을 부정한다는 악몽이었다.

고작 열흘 사이에, 내 평온에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마, 원인은.’

펍에서 휘두른 주먹이었던 것 같다.

아니, 확실했다.

폭력을 쓸 때마다 전신에 뜨거운 피가 돌았으니까. 머릿속을 지배하는 해방감에, 어눌했던 말문까지 일시적으로 트이지 않았던가?

악이라 규정한 존재를 짓누를 때야말로, 내 자신이 온전함을 느꼈다.

지난 14년의 시간이 부정당하지 않음을 느꼈다.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지독히도 이중적인 사람이다.

안데르트가 아닌 데이지로 살길 바라면서, 안데르트로서 살아온 과거를 인정받길 바란다.

참으로 저열한 하녀가 아닐 수 없었다.

이어서 두 번째 파문은 조금 더 거칠었다.

악몽으로 모자라 환각까지 덮친 것이다.

‘분명, 원인은.’

국립 평화원.

그곳에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묘지를 본 순간.

파도처럼 밀려들어 온 후회가 나를 집어삼켰다.

이름을 묻지 않은 전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잃은 뒤 상실감을 느끼기 싫다는 이유로 묻지 않은 이름이, 이름을 묻지 않았기에 추억하지 못할 그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피어났다.

나는 왜 그들의 이름을 묻지 않았던가?

내가 그들의 이름을 물었더라면 저 묘지에도 주인의 이름이 채워질 수 있지 않았을까?

14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지독한 후회가 몰아쳤다. 죄책감은 나를 악몽에 빠뜨리고, 환각 속을 거닐게 했다.

그래서 나는.

별안간 화분에 소담히 핀 떡잎을 한 송이 떠올렸다.

그 떡잎을 보기 위해 시장을 배회하던 순간을 되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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