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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195)

24화

구두와 남성복까지 맞췄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산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노동 없는 오후를 보내는 건 하녀로 취직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묵묵히 청소하던 날보다 더 힘든 걸까. 하녀의 삶이란 알다가도 모르겠다.

“먹을래요?”

지친 몸을 이끌고 번화가 뒤쪽의 공원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루가 대뜸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트니,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 이동 상점이 보였다.

“……사 주게?”

갑자기 이런 호의를 베푼다고? 의심스러운데.

“원래 채찍과 당근은 함께 줘야 효과도 뛰어난 법이니까요. 개를 교육할 때도 중간중간 달콤한 간식을 먹이면 빨리 배웁니다.”

지금 내가 개라는 거냐?

하지만 이런 공짜 호의라면 아주 잠깐, 잠깐만 개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조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루가 공원 입구의 벤치를 턱짓했다.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세요.”

그 말에 따르자 루가 직접 아이스크림 이동 상점으로 향했다.

몇 번 먹어 본 적도 없는 음식인데. 횡재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근처에 인력 사무소가 있지 않았나.’

흠. 이 공원에서 노숙하며 지냈던 날이 벌써 옛일 같군.

공원 안쪽을 쭉 훑어보던 나는 위쪽에 자리한 너른 묘지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묘지도 있었나? 밤에만 왔던 곳이라 몰랐네.’

이런 대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묘지이니 필시 국립묘지겠지.

조경과 잔디가 말끔하게 손질된 데다, 알록달록한 꽃이 사방에 피어 있어 묘지 특유의 음산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온 정신을 집중해서 가장 가까운 묘비 위에 걸린 모자를 살폈다.

마도 연합군의 모자였다.

공원과 국립묘지를 잇는 다리 앞 석판에는 정갈한 필체로 구역명이 각인되어 있었다.

『미드윈트리 국립 평화원』

나는 홀린 듯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다리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는 수백, 수천 개의 묘비가 보였다.

블록처럼 반듯이 자리한 묘비에는 마도 전쟁에서 전사한 이들의 이름, 혹은 기록되지 못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미드윈트리에 살았었다. 그리고 죽었다.

북쪽의 도시는 전선과 멀어 전쟁의 참혹함은 모를 거라 여겨 온 오만함.

그런 내 오만함을 보란 듯이 지적하는 광경에 나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전쟁터에서 차마 통성명하지 못한 사람들의 무덤도 여기 어딘가 있을까?’

기묘한 감상에 빠진 채 다리를 건너, 국립 평화원 안으로 첫발을 디딘 순간.

[이봐!]

피유웅-

날카로운 파공음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비릿한 피 냄새. 익숙해서 더욱 끔찍한 향에, 반사적으로 등을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너른 공원도, 그 너머에 자리한 아이스크림 가게도, 그 앞에서 아이스크림 가격을 지불하고 있어야 할 루의 뒷모습도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 자리한 건 불타오르는 폐허, 시체, 흔들리는 대지, 이를 악물고 내달리는 군인들뿐이었다.

이게 뭐지?

[이봐, 어딜 보는 거야?]

누군가 다급히 내 어깨를 떠밀었다.

흔들리는 시야 안으로 웬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피딱지와 먼지로 더럽혀진 면면에는 죽음을 향한 공포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뭐 해? 정신 차려, 이 머저리야! 넋 놓고 있다간 죽어!]

아, 그래. 이곳은 전쟁터다.

우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휘저었다. 요 며칠 사이 제대로 된 잠에 못 들었던 탓일까? 선 채로 찰나의 꿈을 꿨던 것 같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어떤 꿈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다.

[동쪽에서 대마법사 메피스토의 마귀 군단이 급습했어. 이 마을은 포기한다,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어서 주민들을 대피시켜!]

“너는?”

[나는 성회전 쪽으로 갈 거야! 그곳에 거동이 힘든 노인들이 치료받고 있단 소식을 들었어.]

“앞장서. 내가 엄호하지.”

땅이 크게 흔들린다. 적군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우리는 마을 높은 지대에 자리한 성회전으로 달려갔다.

“수레를 찾아! 노인의 수가 많으면 일일이 데려가지 못해.”

[이곳의 성회전은 꽤 넓은 농지를 관리하고 있었어. 뒤편에 분명 수레가 있을…….]

그 순간, 거칠게 일어난 흙먼지가 우리의 몸을 덮쳤다.

콰아앙!

공성형 마귀의 장거리 파동 공격이었다. 무차별로 쏘아진 공격이 땅을 가격하자 사방에 먼지가 자욱했다.

허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지만 그뿐이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콜록, 콜록!]

그러나 나와 함께 이동하고 있던 군인은 아니었다.

“이봐, 너…….”

[으, 으아아아! 내, 내 다리가! 다리가!]

한쪽 다리는 잘려 나갔고, 나머지 다리도 성치 못하다.

“제길.”

공교롭게도 지금은 지혈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다급히 남자의 팔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 넋 놓을 시간 없어. 내 목을 붙잡아, 부축할게. 어서!”

[헉, 허억.]

두려움에 젖은 숨이 귓가로 떨어진다. 그는 덜덜 떠는 손으로 나를 밀어 내며 말했다.

[돼, 됐어……. 나를 놓고 가. 대, 대신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해 줘…….]

“개소리하지 마. 그런 말은 전쟁이 끝나면 네 입으로 직접 전해!”

[그만둬. 왼쪽 다리에도 감각이 없어. 못 움직여, 네 짐이 될 거다……. 어서, 성회전이라도……. 그리고 내 이름과 고향은…….]

“내 말 못 들었어? 전쟁이 끝나면 네 입으로 직접 전하라고!”

혼란 속에서 이질적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데이지. 전쟁은 끝났어.”

데이지라니. 이 남자의 이름인 것일까?

어울리지 않게 예쁜 이름이라 생각하며, 그의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래, 언젠가는 끝나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일어서, 친구. 어서 수레를 찾자. 일단 너는 그곳에서 대기…….”

“이곳에는 수레가 없어. 성회전도 없고, 마귀 군단도 없으며, 당신이 구해야 하는 노인들도 없지.”

무언가 이상하다.

나는 남자를 돌아봤다. 남자는 멈춰 있었다. 우리 주변을 맴돌던 흙먼지도, 흔들리던 지면도, 비명도, 울음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누군가 내게 말했다.

“전쟁은 끝났어. 이제 그만 돌아와.”

“……끝났다고?”

“그래, 더는 아무도 죽지 않아. 보여? 지금 죽어 가고 있는 건 내가 들고 있는 너의 아이스크림뿐이야.”

사방을 살폈으나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다행이야, 이제 조금 안정됐군. 자네가 말을 건 게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어려 보이는 아가씨인데. 연합군이었나?”

이번에 들린 건 상대적으로 더 지긋한 나이대의 목소리였다.

나는 내가 부축하고 있던 남자를 쳐다봤다. 그의 몸이 아주 느리게, 서서히 부서진다. 마치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이 아가씨 같은 참전군을 종종 봐 왔지. 후우, 슬픈 일일세. 돌이키지 못할 끔찍한 참사이기도 하지. 평화를 이룬 주역들이 평화를 이룬 후에도 고통받아야 한다니.”

보이지 않는 힘이 내 팔을 부드럽게 내렸다. 멍하니 서 있자, 따뜻한 온기가 머리를 토닥이는 게 느껴졌다.

“이만 돌아가자. 편히 쉬어.”

이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일까?

의문은 길지 않았다. 몸이 무거워지면서 세상이 점멸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건 낯선 풍경이었다.

바깥은 이미 어두웠다. 그러나 창밖에 뜬 달이 워낙 크고 밝아서 방 내부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전신이 피곤했다.

‘……마지막에 들린 게 루의 목소리였으니까. 이상한 곳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창 너머를 확인한 순간. 아주 익숙한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휘영청 뜬 보름달 아래로 웨더우즈 저택이 자리해 있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물은 그쪽에 있습니다.”

이곳은 에슐라 저택이구나.

그리고 길게 어둠이 진 벽 쪽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는 남자는 이 저택의 새로운 주인, 루였고.

‘저렇게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으면 안 불편한가?’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나도 꺼리는 짓을.

하지만 루가 특이한 짓을 하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일단 물부터 마셨다.

입 안에 물이 들어오고 나서야 내 몸이 바짝 타들어 가 있었단 사실을 인지했다. 머리가 맑아지면서 기절하기 직전의 일이 떠올랐다.

국립 평화원에서 겪은 끔찍하리만치 사실적인 환각이.

‘선 채 꿈을 꾼 것도 아니고. 현실과 가짜조차 구분하지 못하다니.’

나는 천천히 유리컵을 내려놓았다. 손이 잘게 떨려서 자칫하면 잔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손바닥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한기가 든다.

완연한 약자가 된 듯한 이 기분.

스스로의 육체를 통제하지 못하는 이 감각이 심히 불쾌하다.

정작 전쟁 후기에는 이런 식으로 본능적인 공포에 떠는 일이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런 일을 겪는 것일까?

“……도와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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