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95)

23화

순종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 대가가 기쁨일지 슬픔일지는 보통 당면해야 안다. 그리고 오늘 내가 겪은 순종의 대가는 고역의 극치였다.

장장 아홉 벌에 달하는 의복과 모자, 장갑의 디자인 및 원단을 일일이 내 몸에 대보며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게 훨씬 낫네.”

또한 이 인형 놀이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루였다!

그는 내 몸을 멋대로 가지고 놀았다.

말하고 보니 야릇한 표현처럼 느껴지지만, 맹세컨대 과장이 아니었다.

긴 소파에 눕듯이 앉은 채 원단의 색, 밝기, 패턴, 레이스와의 조합 등을 일일이 지시하는 루는 고약하리만치 까다롭고 꼼꼼했다.

“이것도 괜찮고.”

“그렇죠? 요즘 유행하는 색입니다. 피부가 하얗고 투명한 편이셔서 더 잘 받네요. 아가씨처럼 눈에 띄는 미모에는 보통 선명한 단색 원단을 추천드립니다만, 이런 파스텔 톤의 청록색도 필시 어울리실 겁니다.”

심지어 디자인, 그림과는 인연이 전혀 없는 내 눈에도 그의 심미안이 뛰어난 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원단은 저걸로.”

게다가 사장이 강력하게 추천하는 원단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제 취향의 원단만 매치시키는 강단까지.

‘저 마음에 드는 원단으로 만들 거면 내 얼굴에는 왜 대본 거야?’

2시간 가까이 서 있던 탓인지 다리가 아팠다. 짜증 나는 티를 풀풀 풍기며 노려보기를 수십 분.

“이번에는 데이지 양이 마음에 드는 원단으로 정하세요.”

그가 인심이랍시고 내게 결정권을 넘겼다.

고오맙네 정말. 하지만 이거 어쩌나? 어차피 이 의복들은 내가 입을 의복들이 아닌데?

“저거랑 저거.”

나는 사방에 널브러진 각양각색의 원단과 레이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원단을 두 장 골랐다.

일명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 원단과 봄꽃 자수 레이스.

“이 원단…… 말씀이십니까?”

끄덕.

곤혹스러워할 거란 기대와 달리, 사장의 눈에는 검은 불꽃이 튀었다.

“과연. 여성분들은 종종 과감한 디자인의 속옷이 끌리기도 하죠.”

뭐야, 속옷 원단이었어?

나는 ‘이따위 조합이라니 참 저질에 촌스러운 안목’이라는 표정으로 싱긋 웃고 있는 루를 노려봤다.

저 얌체 같은 자식.

그와 반대로, 무언가 강렬한 영감을 받은 양 한참 고개를 주억이던 사장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인상적인 밤을 보내기에 제격인 조합입니다. 훌륭한 안목이세요.”

그 순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 여자, 나와 루를 서민으로 변장하고 나온 자작 부부로 보고 있구나.’

기실 놀랍지 않다.

나야 그렇다 쳐도, 루의 저 간악한 외모와 여유로운 태도는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기다렸다는 듯 제 취향대로 자작 부인의 의복을 제작하는데, 당사자인 부부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으로 디자인과 원단 체크가 모두 끝났습니다.”

해방이다!

후다닥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걸치고 나왔다. 낡고 촌스러운 내 옷이 이렇게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때가 없었다.

모자까지 푹 눌러쓴 채 도망치는 나를 돌아보며 루가 픽 웃었다.

“그렇게 끔찍했나?”

“차라리 청소가 나아.”

적어도 지루함에 몸이 덜덜 떨리지는 않을 테니까.

대금을 치른 루가 슬렁슬렁 내게로 다가올 때였다.

아까 가게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했던 직원이 바짝 긴장한 낯으로 그에게 물었다.

“저, 손님. 혹시 웨더우즈 저택에서 일하시는 분일까요?”

“그렇습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알고 싶어서요.”

대답하는 직원의 뺨이 발그레 물들어 있었다.

부드럽게 웃은 루가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의복이 완성됐을 때는 웨더우즈 저택으로 연락을 넣으시면 됩니다.”

“아, 아니요. 제가 알고 싶은 건.”

“거기 멀뚱히 서서 뭐 합니까, 데이지 양. 끔찍했다면서요?”

“손님!”

다급하게 다가선 직원이 루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루는 그 손을 자연스럽게 떼어 냈다.

우리의 정체를 의심한 사장과 달리, 직원은 루의 신분을 곧이곧대로 믿는 모양이었다.

뭐, 그쪽이 진짜이긴 하지.

나를 지나친 루가 묵직한 문을 밀어 열었다. 열린 문을 등으로 받치며 턱짓으로 거리 쪽을 가리키기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걷다가, 양장점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우뚝 멈춘 루가 외투의 소매를 툭, 툭 털었다.

직원이 잠시나마 붙잡았던 부위였다.

단순히 깔끔한 성격인 걸까, 아니면 인성의 체계가 어딘가 잘못된 걸까?

상대가 루니까 둘 모두 해당될 수도.

“말하기 연습 좀 하라고 데려왔더니. 초원을 달려도 이상하지 않을 끔찍한 취향의 속옷이나 고르고. 몸소 나와 줘도 보람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역시 둘 다인 듯하다.

‘말하기 연습을 시킬 거면 미리 언질을 주든가.’

하지만 나는 나의 편협한 화법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남성의 몸으로는 길게 줄줄 뱉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루.”

“루?”

“루 씨. 계획이 바뀌었어? 내가 자작 부인이 되고 그쪽이 자작이 되는 거야?”

“자작 부인은 나입니다.”

너무 당당해서 태어날 때부터 자작 부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왜 내 몸에 맞게 치수를 재?”

“더 효율적이니까요. 그리고 그쪽이 아니라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저택으로 돌아가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구두도 필요하고, 남성복도 필요하니까.”

“……남성복은 그쪽 신장에 맞추게?”

“그럼요?”

가볍게 반문한 루가 나를 바라봤다.

루에게 맞춘 의복이라. 그 말은 즉, 내가 최소 190cm의 군더더기 없이 길고 슬림하며 탄탄한 남성으로 변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지금 육체도 불편한데, 여기서 20cm는 더 큰 남자가 되라고?’

그거야말로 효율적이지 않지. 이왕 맞출 거면 내게 익숙한 신체로 맞추는 게 편하다.

나는 안데르트의 신장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말했다.

“다른 신장도 가능해?”

“예를 들면?”

“키는 180cm, 지금보다 가슴과 이두, 삼두가 더 발달했고 목은 살짝 더 짧아. 허리는 조금 더 얇지만 둔부는…….”

“그건 혹시 본인 취향입니까?”

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전혀 상관없는데?”

루가 의심스럽다는 시선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세세하게 지시할까. 참 신기하네.”

그야, 내 몸이 그랬으니까…….

“이왕 움직일 거면 그런 몸이 편해서 그래.”

생각해 보니 너무 변태처럼 자세하게 설명한 것 같기는 하다.

다행히 루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방향을 틀어서 타운 하우스 사이의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섰다. 화들짝 놀란 회색 쥐가 부랴부랴 숨는 게 보였다.

‘여기는 왜……. 설마 변태는 주먹으로 교육한다는 주의?’

그를 뒤따라가는 걸음이 주춤주춤해질 즈음. 루가 내 쪽으로 등을 돌렸다.

“이 정도?”

뭔가 어색하게 바뀐 느낌이다 싶더니,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야가 한참 작아져 있었다.

‘주문도 없이 변신 마법을 사용했다고?’

무언 마법.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검사가 오를 수 있는 경지의 극치라는 소드 마스터와 비교했을 때도 고작 한 단계 아래였으니까.

루의 정체가 황실 마법사라는 추측에 한층 더 무게가 실렸다.

“……어깨가 너무 넓어. 조금 더 인간적인 넓이로.”

우드득.

골격이 맞춰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루의 몸이 다시 변화했다. 요구대로 어깨 길이가 조금 더 짧아져 있었다.

“피부도 더 타야 해. 손목은 더 두껍고. 손도 두꺼워.”

그림자가 내려앉은 것처럼 루의 피부색이 어두워졌다.

“흠. 뭔가…… 아무래도 전체적인 골격이…….”

쯧, 혀를 찬 루가 다소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누굴 그렇게 상상하는데?”

잠깐 고민했다.

과거의 나라고는 답할 수 없으니, 동생이라고 대답할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동생의 골격으로 맞추는 게 더 이상하잖아?

루가 냉랭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대답해 보시죠. 국부는 더 비대해야 합니까? 아니면 작아지게?”

“국부면 어디를 말하는 건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루가 돌연 즐거워진 얼굴로 웃었다.

“어디일까요?”

그러게, 어디일까.

고개를 내리지 말자. 루의 얼굴만 바라보는 거야. 지금처럼 못 알아들은 척해.

괜한 자존심으로 ‘당연히 더 비대해져야 돼!’라고 대답하지 말자.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루가 김빠진 낯을 했다.

“말 못 하겠으면 그냥 이대로 가죠.”

“……응. 그 정도로도 충분해.”

“당연히 충분해야 할 겁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땅에 붙은 채 걸어 다니는 기분이니까요.”

180cm로 그러면 내 키는 땅에 박혀서 걸어 다니는 기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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