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황당무계한 사건을 치른 그다음 날.
웨더우즈 자작이 정체가 <디안 케트의 유물>이었다는 사실은, 내게도 적잖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야기했다.
‘차라리 진짜 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하녀장이 애지중지 기르던 웨더우즈 자작…… 아니, 알…… 아니, 마도구가 디안 케트의 유물이었을 줄이야.
‘이렇게 되면 몰래 훔치거나 몰래 빌려 쓰는 것도 힘들어지지 않나?’
루가 펼친 마법 해석본에 의하면, 디안 케트의 유물 중 하나인 <디안 케트의 눈알>에는 명확한 목표 의식이 존재했다.
바로 웨더우즈 가문의 수호.
솔직히 말해서 이 수호가 어떤 수호를 뜻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암살자들을 보기 좋게 출입 허가해 주었으면서 대체 무엇을 지킨다는 건지.
그래도 한 가지 장점은 확실했다.
‘유물이 실존한다는 것. 그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수확이야.’
흠. 그런데 저런 걸 다섯 개 모아야, 내 부서진 영혼을 치료할 희망을 얻는 건가?
‘너무…… 난해한데?’
디안 케트의 눈알에만 해도, 다양한 광역 공격 마법이 심어져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물건으로 어떻게 죽어 가는 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일까. 아예 죽여 버리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뜻은 아니겠지?
‘천재 마법사들은 대체로 미쳐 있다던데. 디안 케트는 무려 반신이니까, 그 나름의 심오한 뜻이 있을 거야.’
최소 두 개의 유물이 모여야 한다. 그래야만 디안 케트의 유물이 어떤 식으로 작동되고 활용될지 추측할 수 있을 듯했다.
“하아.”
쭈그렸던 무릎을 펴고 옆으로 이동했다.
일렬로 찬란하게 고개를 내민 화단 루에 물을 뿌리자, 심신에 평화가 찾아온다.
작은 이파리가 물방울에 촉촉해지는 모습을 볼 때면 속세의 욕망이 사그라지며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디안 케트의 유물을 전부 못 모을 수도 있지, 뭐.’
못 모으면 죽고 말자.
오래 살아서 뭐 해.
하지만 내가 죽으면 화분 루와 화단 루는…….
“떡잎을 물에 잠가 죽일 셈인가.”
긴 그림자가 떡잎과 나를 덮었다.
톡톡, 내 정수리를 두드리는 손길에 고개를 드니, 웬일로 앞치마를 벗고 갈색 페도라를 깊게 눌러쓴 루가 보였다.
베스트 위에 어두운 재킷까지 걸친 모습을 보니 외출하는 모양이었다.
“과한 수분은 이파리를 썩게 합니다. 알아들었으면 일어나서 옷 갈아입고 나와요.”
“왜?”
“당신과 들를 곳이 있습니다. 하녀장에게도 말해 두었으니 어서.”
하녀장이 농땡이를 허락했다고?
그 여자가 그럴 리 없다. 분명 평소보다 더 귀찮은 심부름을 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심부름하는 척 더 농땡이 피워야지.’
하나뿐인 소중한 단벌로 갈아입고 나오자, 루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여성용 긴 챙 모자를 내게 건넸다.
뭐지? 심부름이 아니라 정말 외출인가?
“이건 하녀장 거야?”
“아니요. 이 저택에 유일하다시피 한 여성용 모자입니다.”
죽은 자작 부인의 물건이구나.
꽤 오래된 물건일 텐데, 관리를 잘했는지 색도 바래지 않고 여러모로 쓸 만했다.
나는 어색하게 모자를 뒤집어썼다. 여태껏 착용해 본 모자라고는 군모나 제복 모자, 그리고 밀짚모자 정도가 다인데.
‘구멍이 엄청 작은데도 머리가 다 들어가네.’
여자는 대체로 머리가 작구나! 깨어난 지 한 달 반 만에 알아챈 놀라운 사실이었다.
나는 루의 뒤를 한 발자국 멀리서 따라 걸었다.
그는 시장 정반대편의, 비슷한 번화가이지만 조금 더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상점이 늘어선 광장으로 향했다.
10분 가까이 걸을 동안 루는 고개를 돌려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색함이라고는 일말도 못 느낄 정도였다.
‘평소에도 이렇게 걷는 건가.’
흔들림 없이 앞만 보며 걷는 습관. 느긋한 걸음 속도. 구태여 먼저 입을 열어 분위기를 환기하려 들지 않는 여유까지.
걷는 모습을 보면 사람이 보인다.
루는 누군가를 떠받들기보다 떠받들어지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일단 신분이 높은 건 확실한데. 귀족은 아니고. 디안 케트와 안면이 있을 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
누가 있을까.
‘황실 마법사?’
어라. 이건 꽤 그럴싸하잖아?
황실 마법사가 되면 기사 서임을 받지만, 기사는 귀족이 아니다.
하지만 직급이 높은 황실 마법사는 시종이나 비서가 뒤따르며, 온 사방에서 청탁을 받아 귀족 못지않게 재산을 불릴 수 있었다.
‘최소 부서장 정도 되려나. 실력을 생각하면 장관이어도 손색이 없는 수…….’
앗.
나는 등에 부딪힌 이마를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봤자 루의 신장이 너무 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직접 옆으로 물러서 준 덕분에 도착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곳은 여성복을 파는 양장점 앞이었다.
“여긴 왜?”
“의복을 맞춰야 해서요. 웨더우즈 가문에는 자작 부부를 위한 제대로 된 의복이 없습니다. 제대로 된 물건이나 보석들은 죄다 처분해서 난민들을 도우는 데 기부했다네요.”
“……아, 귀족회.”
하기야 명망 있는 가문의 가주와 그 부인이 수수한 차림새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하녀장에게 듣기로, 이번 귀족회는 상류층 모임과 함께 이루어진다고 한다.
평민 재벌들과 더불어 초대형 비행선에서 호화로운 여행을 즐긴다고 하니. 귀족들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웨더우즈는 가난해.”
장원까지 팔아넘긴 가문인데. 옷 한두 벌 사려다가 우리 급여까지 삭감되는 거 아닐까?
루가 별걸 다 걱정한다는 얼굴로 양장점의 문을 밀었다.
“하지만 나는 부유합니다. 들어가죠.”
역시 루. 가진 건 얼굴과 돈밖에 없는 남자. 사실상 세계 최강.
고풍스럽게 꾸며진 내부로 발을 딛자,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직원의 친절한 미소는 내 투박한 차림을 훑은 즉시 조금 시큰둥해지다가, 루의 갸름한 턱선과 환상적인 콧대를 확인하곤 움찔 굳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하지만 그딴 반응은 내 알 바 아니었으므로 당당하게 요구했다.
“주문.”
그런데 뭘 어떻게 주문해야 하지.
슬쩍 뒤로 물러서자, 곁에 선 루가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뗐다.
“의복을 맞추려고 합니다. 무도회용 드레스, 만찬회용 드레스, 일상복 두 벌, 봄 외투, 모자와 장갑은 두 세트씩, 잠옷 두 벌, 양말과 속옷은 네 세트씩. 아, 티 파티 의복도.”
나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루를 쳐다봤다.
고작 한 번 참석하고 말 귀족회인데 그렇게 많이 맞춰도 되는 거야?
‘귀부인들에게는 이 정도가 기본 중의 기본인 건가.’
아니면 내가 몰랐던 그의 은밀한 욕망이……?
재빨리 수첩을 꺼내 주문을 기록하던 직원은 이전과 달리 몹시 깍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혼수 물품이네요. 결혼하시는 건가요? 남편분과 직접 맞추러 오시다니, 이 가게에서 일한 이래 처음 본 광경입니다.”
루를 내 남편으로 착각하다니. 우욱. 상상하니 구역질이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는 제 할 말만 했다.
“보름 안에 완성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보름이요? 죄송합니다만, 말씀해 주신 기간 내에 절대 완성이 불가한 주문입니다. 적어도 두세 달은 주셔야 합니다.”
루는 ‘그런 것도 못 하면서 양장점은 왜 차렸냐. 무능하다. 접어라.’라는 시선으로 직원을 내려다봤다.
몰래몰래 그의 몸을 훔쳐보던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며 입장을 번복했다.
“다만, 이 근방에 사장님의 사촌분이 운영하는 양장점이 한 곳 있습니다. 나눠서 제작하면 한 달 반 안쪽에 완성할 수…….”
“웨더우즈 자작 부인께서 기다려 주실지 모르겠는데.”
‘……그걸 말해도 돼?’
멈칫. 몸을 굳힌 직원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물었다.
“웨더우즈…… 자작 부인 말씀이신가요? 웨더우즈 가문의?”
“웨더우즈 가문이 그 가문 말고 또 있지는 않을 텐데. 부인의 목적지는 수도 라갈. 일정이 불가능하면 다른 양장점으로 가지.”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원은 황급히 몸을 돌려 양장점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화장의 중년 여인을 끌고 왔는데, 이 양장점의 사장인 듯했다.
사장은 루의 미모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보름 안에 완성하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루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가능하다면야. 그러죠.”
사장의 얼굴에 노골적인 기쁨과 흥분이 서렸다.
웨더우즈 자작은 긴 시간 동안 비밀에 싸여 있던 인물이다.
생존 여부도 불투명한 존재가 부인을 끌고 나타난다는데, 수도로 향하는 부인의 외출복이 본인 작품이라면 재단사로서 새로운 터닝 포인트가 될 수 있을 테다.
“그럼 바로 치수를 기록하겠습니다. 자작 부인께서는……?”
“부인께서는 바쁘십니다. 다만 치수는 제 동행인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일하고 피부색도 비슷하니, 동행인을 통해 제작해 달라는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가씨.”
하지만 가난한 하녀에게 거부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루가 돈으로 때운다면 이쪽은 몸으로라도 때워야지 어쩌겠어. 나는 사장의 뒤를 얌전히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