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짧은 갈색 머리 아래, 고단함이 쌓인 연두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장난스럽게 웃음을 흘린 안데르트가 라파엘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부를 건넸다.
[살아 있는 거 맞아, 라파엘로? <자애초>의 효과가 대단하기는 해. 웬 시체가 기어오나 했네.]
라파엘로는 그런 안데르트를 마주하며 웃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웃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테다.
어둡게 잠긴 안데르트의 눈에서 고심의 흔적을 발견한 까닭이다.
[혹시나 싶어 말해 두지.]
[뭐를?]
[헛생각 마라. 네 독단은 허용하지 않아. 나는 너의 상관이다. 넌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내 옆을 지켜야 해.]
안데르트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다렸던 긍정의 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독한 술을 들이켠 것도 아닌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라파엘로는 제 어깨에 얹힌 안데르트의 손을 부서뜨릴 기세로 쥐며 강요했다.
[대답해라, 안데르트.]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명심하지. 괜한 데 신경 쓰지 말고 회복에나 전념해.]
옆자리로 물러선 안데르트가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대군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꾸밈없는 웃음을 마주하자 심장을 짓누르던 바위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안데르트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뻔한 말 한 마디로도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후 꿈속의 시공간이 한 번 뒤틀렸다. 어느새 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허억.]
죽어 있던 청각이 서서히 회복됐다.
앞으로 닷새면 전장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거머리처럼 기어오르는 열로 사경을 헤매던 어느 순간이었다.
막사 너머, 기어코 한 목소리가 라파엘로의 심장을 후벼 팠다.
안데르트가 선언했다.
[내가 가지.]
[안 됩니다, 안데르트 경. 경이 움직이는 건 총사령관님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밖에 적임자가 없어. 가고일을 처리하고 절벽을 오를 사람도, 메피스토의 성에 진입해 본진을 혼란에 빠뜨릴 사람도, 혼란을 틈타 메피스토의 목을 노릴 사람도 나뿐이야. 의의 있나?]
[……하지만, 허락이.]
[허락은 필요 없어. 이번 일은 내가 직접 나선다. 그에게는 독단이었다고 알려라.]
황폐한 땅. 채 식지도 못한 시체. 죽을 날을 기다리는 병사들.
그를 둘러싼 세상을 묵묵히 응시하던 안데르트는 기어코 홀로 걸음을 옮길 기세였다.
최후의 목적지이자 그의 무덤이 될 존재, 대마법사 메피스토에게로.
그건 안 돼.
경련하듯 몸을 떤 라파엘로는 침대에서 떨어져 땅을 기었다. 뛰쳐나온 사령관들이 다급하게 그의 몸을 붙잡았다.
[제기랄, 이 손 놓지 못해? 기다려! 당장 멈춰, 안데르트! 네가 죽을 수는 없다! 너를 이딴 식으로 죽게 놔두지 않아!]
안데르트는 라파엘로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아, 그의 신영이 점차 멀어졌다.
안데르트의 두 다리가 검은 불꽃 안으로 뛰어든다. 한번 뛰어들면 돌아오지 못할 지옥의 불꽃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알기에, 라파엘로는 절망했다.
[당장 돌아와, 안데르트 파거어어!]
어느 순간 세상이 암전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어둠 너머에서 안데르트의 위로가 들려왔다. 미치도록 그리운 친우의 목소리다.
[네 탓이 아니야, 라파엘로.]
그럴 리 없다.
내 탓이 아닐 리 없어, 안데르트. 내가 널 죽였다. 병신 같은 내가 너를 그 사지로 몰아넣었어.
그럼에도 여전히 너는 내 검이다. 살아도 내 옆에서 살고 죽어도 내 옆에서 죽어야만 해.
그래야만 하는 네가, 죽었을 리 없어.
“……하.”
어서 돌아와. 너를 잃어서 얻는 평화 따위 무의미해.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
대답해, 안데르트.
“……전하.”
대답해, 안데르트 파거.
“……공 전하!”
안데르트 파거!
“대공 전하!”
또렷한 부름이 귀에 박힌 순간. 그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먹먹한 심해에 가라앉아 있던 정신이 아주 빠른 속도로 떠오른다. 막힌 숨통이 가쁘게 열리면서, 라파엘로의 세상도 현실로 돌아왔다.
모두 꿈이었다.
“전하,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몇 시지?”
“새벽 4시입니다.”
손등으로 눈을 덮은 라파엘로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연신 빠르게 달리는 심장 박동으로 인해 호흡을 가다듬기가 쉽지 않았다.
그가 꾼 악몽은 너무나 현실적이라, 마치 직전까지 전장을 헤맸던 기분이 들었다.
‘피곤하군.’
죽은 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네 탓이 아니야, 라파엘로.]
자신은 그에게 용서받기를 바란 걸까? 그래서 내면 깊숙이 내재된 욕망이 꿈이라는 매개로 형상화된 것일까?
‘아니.’
한때 그랬던 시기가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안데르트 파거는 죽었다.
그는 대마법사 메피스토와의 결전에서 숭고한 희생을 치렀고, 그 희생은 라파엘로에게 긴 시간 떨쳐 내지 못할 상처를 안겼다.
안데르트의 시신을 찾을 수 없었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4년.
시신을 찾기 위해 지난 4년 동안 미친 듯이 퀸 섬을 뒤졌다.
죽어도 내 곁에서 죽으라 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그가 몹시도 원망스러웠다.
눈을 감으면 안데르트의 환각이 보였고, 눈을 뜨면 안데르트의 환청이 들렸다.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어도 그만큼 고역스럽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안데르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원망하고, 죄악을 느꼈던 날은 모두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안데르트의 환영을 짓밟고 제대로 일어서야 한다는 사실을.
라파엘로는 이제 더 이상 안데르트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머릿속에서 내보내고 있었다. 안데르트 파거란 존재를 과거의 찰나로 묻어 두기 위하여.
“수도에서 도착한 급보를 포함해 총 세 장이 도착했습니다.”
라파엘로는 손등으로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답했다.
“미안하지만 자네가 대신 확인해 주게.”
“예.”
첫 번째 서신을 연 드셰로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수도 라갈에서 황제 폐하와 다섯 귀족이 비밀 회동을 가졌다는 서신입니다. 참석자 모두 귀족회 일원으로, 공통된 특징은…….”
“북부 정복 전쟁 지지자들이겠지.”
“그렇습니다.”
펜 로타 제국 북부에는 대륙에서 험준하기로는 내로라하는 북데우스산맥이 자리한다.
북데우스산맥에는 정제석 광산이 즐비한데, 황제는 이 광산을 빼앗기 위해 정복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라파엘로 대공을 선봉장으로 내세워서.
“폐하께서는 어째서 나를 전선으로 내몰지 못해 안달이신가.”
자문하는 투였지만 답은 훤하다.
황제파는 그를 수도에서 몰아내고 싶어했다. 가능한 아주 멀리, 또 오랫동안. 그리하면 잃어버린 황제의 실권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그렇다면 이쪽도 어찌해야 하겠는가? 그에 맞는 대응을 해 주어야지.
조금 무리해서라도 귀족회에 참석해서, 그 다섯 귀족 앞에 얼굴을 들이미는 수밖에.
“다음 서신을 읽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드셰로가 두 번째 서신을 열었다.
“한 달 하고도 보름 전, 퀸 섬에서 새로운 생존자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이름은 베르티 루샨. 나이는 서른넷, 키 170cm 내외, 마르고 피부는 흰 편이며 등을 덮는 긴 갈색 머리에…….”
라파엘로의 미간이 서서히 구겨졌다.
“한 달 하고도 보름 전이라고? 보고가 너무 늦군.”
“전하의 국외 일정과 겹친 것 같습니다. 전서가 오랜 시간 뒤쫓은 모양입니다.”
드셰로는 곧 세 번째 서신을 열었다. 내용을 확인하는 표정이 전과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런. 아니었군요. 전서가 중간에 습격받았다고 합니다. 연달아 두 명이 행방불명됐고, 이 서신을 전달한 이는 세 번째 전서입니다.”
손을 거둔 라파엘로가 천천히 눈을 떴다. 검붉은 눈동자 안에 흐릿한 이채가 서렸다.
습격.
적이 많은 라파엘로에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한데, 굳이 두 번을, 연달아? 붉게 핏발 선 눈이 드셰로가 쥔 서신을 향했다.
“그 서신을 노린 건가. 얼마나 대단한 내용이기에? 계속 읽어 봐.”
“예. ……새로운 생존자는 현재 미드윈트리에 정착한 상태라고 합니다. 하녀 일을 한다는군요. 몰래 사람을 붙일까요?”
기대와 달리 특별한 정보는 아니었다.
“아니, 내버려 둬. 퀸 섬 쪽 일은 천천히 손을 뗀다. 붙잡고 있어 봤자 더는 도움 안 돼.”
그답지 않게 머뭇대던 드셰로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하지만 전하, 퀸 섬 생존자 말입니다. 갈색 머리에 연녹색 눈동자를 가졌다고 합니다. 제 설레발일 수도 있지만 외형이 여러모로…….”
“안데르트 파거의 형제가 떠오른다고?”
갈색 머리칼. 봄의 싱그러움이 떠오르는 연녹색 눈동자.
그래, 이는 모두 안데르트 파거의 색이다. 또한 세상 그 누구에게보다 라파엘로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색일 것이다.
안데르트는 그의 하나뿐인 검이자 가족이며 친우였으니까.
“기억나는군. 그에게 손위 누이가 한 명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그 여자는 퀸 섬 사태 때 눈을 감았다. 시신도 직접 묻어 줬다더군.”
퀸 섬 사태.
퀸 섬 사태는 대마법사 메피스토가 퀸 섬을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뜨린, 역사적으로 손에 꼽게 끔찍했던 테러를 일컫는다.
이 사건으로 퀸 섬의 주민 대다수가 즉사했으며, 소수의 생존자들은 고향을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야 했다.
충격적이기 그지없는 퀸 섬 사태로 인하여 대전쟁이 발발하니. 이 전쟁이 바로 마도 전쟁이었다.
“부모는 그보다 훨씬 전에 세상을 떴고, 말로만 전해 들은 사촌들은 섬사람이 아니라고 했지. 그의 가족은 살아 있지 않아.”
퀸 섬은 제국 최남단의 작은 섬이다.
작은 섬은 대체로 고립된 사회를 형성하고, 육지와 교류가 적어서 피도 더 가깝게 섞인다.
따라서 새로이 나타난 생존자가 안데르트와 똑같은 머리색에 똑같은 눈 색을 지녔다 해도 놀랄 것 없었다. 실제 퀸 섬 난민의 상당수도 그런 외형이었으므로.
“더군다나 이미 신원이 확인된 상태라고 하지 않았나? 베르티 루샨……. 동일 인물일 수가 없겠군.”
“예, 제가 너무 깊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네. 하지만…… 이 일은 앞으로 내게 보고하지 않아도 좋아. 자네 선에서 적당히 끊어.”
“……알겠습니다.”
드셰로가 침실을 나간 후, 라파엘로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운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부디 악몽을 꾸지 않기를 바라며.
* * *
같은 시각, 미드윈트리.
웨더우즈 저택에서는 오늘도 활기찬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