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195)

19화

씨익 웃은 그는 하녀장이 무어라 거절할 틈도 없이 소매를 걷었다.

하얀 오른쪽 팔 안쪽에는 갖가지 색의 선명한 줄이 가지런히 각인되어 있었다. 어림잡아도 열 개는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하녀장이 경악하는 눈으로 물었다.

“이게 무슨……?”

“이쪽이 가장 자리가 많아요. 몸 안쪽에도 있습니다.”

그럴 분위기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너무 궁금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다 합치면 몇 개?”

“일흔 개 이후로 안 세어 봤네요.”

일흔 개 이상의 맹세.

대륙의 사방에서 다양한 강자를 만나 오며, 산전수전 다 겪어 온 내가 들어도 어처구니없는 숫자였다. 정말 순수한 감탄사가 나왔다.

‘범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도 나는 고찰한다.

‘대체 어디서 뭐 하는 놈이야?’

루는 입을 딱 벌리고 앉은 하녀장을 위로하듯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약속을 아주 잘 지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맹세를 어기고 단 한 번이라도 입을 털었다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겁니다.”

“루 씨, 당신이 뭘 말하는 건지는 알겠지만…….”

“뭐, 필요하다면 더 강한 맹세를 걸어도 상관없습니다. 정보를 캐내려는 자가 나타나면 무조건 죽이라든지, 고문하라든지. 어떤 조건이어도 좋으니까.”

나긋하지만 거부 못 할 강제력을 지닌 목소리가 말했다.

“저도 그 알 좀 봅시다.”

아무래도 하녀장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는 듯하다.

“구경 후에는 데이지 양의 변장도 도와드리죠.”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은 싫다니까.

* * *

터벅터벅.

같은 시각, 한 남자가 고요히 가라앉은 기다란 통로를 등잔불로 밝히며 서서히 나아갔다.

마(魔)의 힘이 깃든 돌인 정제석으로 밝힌 인위적인 불은 촛불보다 배는 밝고 선명했다. 별장 안의 어둠이 모두 걷힐 것처럼.

천천히 통로를 가로지른 남자는 목적지인 침실 앞에 멈춰 섰다.

가벼이 문을 두드리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잠시간 대기해 있던 그는 20초가 지나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어두웠다.

남자는 등불을 끄고 침실 내부에 발을 디뎠다. 침대가 텅 비어 있기에 소파로 시선을 돌리니, 유독 길고 탄탄한 신형이 의자 등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상관이자 펜 로타 제국의 가장 강력한 실권을 지닌 남자, 라파엘로 제나일 펜 로타 대공이었다.

남자, 드셰로는 한시름 놨다는 양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잠에 드셨군.’

담요로 몸 위를 덮어 드리기에는 라파엘로 대공이 누리는 휴식이 너무나 귀중했다.

무려 사흘 만의 첫 수면이었다. 깎아지른 절벽처럼 위태로운 그의 옆선을 바라보다가, 드셰로는 묵묵히 문을 닫고 나왔다.

몰아치는 비바람이 창문에 부딪혀 별장의 어둠을 끌어안았다. 저 빗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린다면 좋을 텐데.

부디, 오늘만큼은 그의 영웅이 악몽을 꾸지 않기를.

* * *

그러나 드셰로의 바람은 닿지 않았다.

툭, 투둑.

그 불규칙적인 박자에 귀를 기울이던 라파엘로는, 천장 아래로 흐릿하게 일렁이는 빛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또 그 빌어먹을 꿈이로군.

격정적으로 가빠지던 숨이 점차 차분해진다. 붉었던 시야가 선명해지면서 시야 끄트머리에 걸쳐 있던 얼굴이 인지되었다.

그의 보좌관이자 뛰어난 무인이기도 한 드셰로가 피로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총사령관님, <자애초>의 효능이 올라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2시간 동안 호흡과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가사 상태가 될 겁니다.]

* 생리적 기능이 약화되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는 상태

이건 꿈이다.

또한 그가 4년 전에 겪은 지옥이기도 했다.

꿈속에서 그는 방관자에 불과해 저절로 움직이는 입을 무력하게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로는 숨을 가다듬고 제 곁에 선 드셰로에게 물었다.

[<자애초>는 몇 알 남았지?]

지독히도 낮게 쉰 음성은 그 자신도 낯설 만큼 거칠었다.

[방금 사용한 약이 마지막 약이었습니다.]

<자애초>는 강력한 환각을 유발하는 마약의 일종이다. 정제해서 진통제로 이용할 수 있기에 전장에서는 귀한 약물로 취급됐다.

그런 약이 더는 남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앞으로 2시간 안에 모든 난관을 예측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겠군.]

드셰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진을 와해하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은 그는 이틀간 생사를 오가다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마기로 인한 상처여서 그런지 회복 속도가 유독 느렸다. 뜨겁게 오른 열에 눈과 귀가 멀 정도라 지휘는커녕 침대에서 벗어나기조차 힘들었다.

[지난 이틀간 상황은?]

[보급선이 차례로 난파되어 사실상 보급로가 끊긴 상태입니다. 그 밖의 큰 피해는 없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나쁘지 않습니다. 총사령관님의 명령대로 30분 전에 모든 지휘관을 불러 두었습니다.]

총사령관인 그가 쓰러진 상황에서 보급까지 끊겼다. 이보다 더 최악일 수가 없다.

그들은 현재 적의 근거지를 코앞에 둔 상태였다. 수많은 난관을 헤치고 이곳 퀸 섬에 도달한 것이다.

저 파도처럼 밀려오는 마귀(魔鬼)의 산만 넘으면, 인류의 주적이자 전범인 대마법사 메피스토에 닿을 수 있었다.

산 하나만 넘으면.

그리하면 닿을 수 있었는데.

굳은살 깊이 박인 그의 손이 천을 구길 동안, 뒤편에 연결된 간이 천막에서 지휘관들의 지친 담론이 들려왔다.

[총사령관님의 회복이 상당히 더딥니다. 마도성에서 풍겨 오는 메피스토의 마기가 사령관님의 자가 회복력을 크게 떨어뜨린 것 같습니다. 라파엘로 총사령관님께서는 최소 일주일 동안 회복에 전념하셔야 합니다.]

[일주일?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그 악마가 회복을 얌전히 두고 볼 것 같소? 일주일간 이곳의 십만 병사가 버티기에는 남은 보급도 턱없이 부족하오!]

[일주일의 유예가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그렇다면 보급은 걱정할 필요 없겠군요. 병사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앞으로 진격할 테니 말이지요. 보급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병사의 수가 더 빨리 줄어들…….]

[주둥이 닫아, 이 개자식! 지금 10만의 목숨을 그딴 식으로 희생시키겠다는 거냐?]

아군의 동요를 지켜보기만 하는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라파엘로는 드셰로의 부축을 받아 간이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안정을 취하고 움직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럴 시간 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겠지.]

10년. 무려 10년간 이어진 전쟁이었다.

끝나지 않는 전쟁은 체스 말에 불과했던 영웅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아군이 무참히 패하고 전선이 뒤로 밀려날수록, 마도 연합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도 더욱 막강해졌으니.

어느덧 그는 마도 연합의 총사령관이라 불리고 있었다.

총사령관 라파엘로.

인류의 영웅.

전장을 지휘하는 제왕.

라파엘로의 존재가 이 군대에 끼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러므로 2시간 내 빠르게 회의를 마무리 짓고 병사들에게 얼굴을 비쳐야만 했다. 사기를 북돋아서 승리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져야만 한다.

점차 가까워지는 천막 너머, 조금은 차분해진 음성이 들려왔다.

[역시 협곡의 낭떠러지를 이용할 수밖에 없겠군요.]

[메피스토의 성 지하와 이어져 있다는 절벽 말하는 거요? 사람 한 명도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길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겠소? 게다가 가고일 두어 마리가 진을 치며 감시하니 건너간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오.]

[군대가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넘어가는 거죠. 단 한 명이 말입니다.]

[허! 메피스토를 암살이라도 하자는 말인가?]

[그 악마 같은 자를 감히 누가 암살할 수 있겠습니까? 메피스토의 관심을 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마귀의 군대는 오로지 그의 명령만 따릅니다. 뒤를 친 자가 시간을 끌 동안 우리는 언덕 아래까지 진격해서 전선을…….]

라파엘로는 조용히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너른 등이었다.

상석에 선 등의 주인은 탁상 위로 오고 가는 진중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양옆에 선 두 군사가 푸르죽죽하게 가라앉은 낯으로 쉬지 않고 입을 놀렸다.

본래라면 그가 서 있어야 할 자리다. 다만 그가 자리를 지키지 못할 때는 오직 저 남자만이 라파엘로 총사령관을 대신할 수 있었다.

안데르트.

그는 라파엘로의 검이자, 유일무이한 파트너였으니까.

[시도해 봄 직하군.]

안데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웬만한 전력을 지닌 자가 아니면 절벽 위에서 죽고 말 거요. 무용지물이 될 수 있는 계책인데 너무 뛰어난 이를 보내기에는…….]

[……총사령관님?]

열두 쌍의 눈이 라파엘로에게 모아졌다.

누군가는 안도했고, 누군가는 우려했으나 라파엘로의 관심은 그들에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이어 자신의 파트너 앞에 섰다.

제왕의 검이라 불리는 남자.

마도 연합의 사령관 중 한 명이자 그와 함께 10년을 이 지옥에서 버텨 온 소중한 친우. 형제이자 가족이며, 파트너이자 반쪽인 자.

[안데르트.]

안데르트가 자신을 돌아봤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