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95)

18화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촌스럽게 흉내 내는 녀석들을 무시하고 쪽지를 펼쳤다. 쪽지 안에는 차마 읽어 내지도 못할 기이한 문양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이건 또 뭔데?

“암호문입니다. 여기, 이 해석본을 미리 외워 두시면 편하다는 전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바텐더가 넘긴 소형 수첩을 펼쳤다.

눈앞이 어질어질할 만큼 다양한 문양이 이어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표음문자인 것 같았다.

너무 어려워. 그리고 많아. 암살자들은 전부 이런 식으로 암호문을 외우는 걸까?

의도는 이해하겠는데 번거롭다. 일단 저택에 돌아가서 암호문과 해석본을 하나씩 적용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간다.”

청소와 설거지를 하며 술잔을 닦던 간부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형님!”

“다녀오십시오, 형님!”

너희 암약 길드 맞지?

나 분실물 찾으러 왔다니까?

“야.”

문을 연 직후, 그들에게 중요 사실을 알렸다.

“나 여자야.”

하지만 간부들이 듣기 전에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음, 이건 나중에 따지자.

저택으로 돌아간 후.

나는 오후 일과(오늘은 커튼 세탁)를 진행하는 틈틈이 쪽지와 해석본을 대응했다.

해석본에 따르면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시종들에게서 의뢰인에 대한 정보를 입수.

의뢰인은 거듭된 실패로 임무를 변경했다고 함.

새로운 임무는 ‘웨더우즈 저택의 모든 고용인을 몰살하고 저택 내부를 조사해 디안 케트와 관련된 모든 물건과 정보를 훔쳐 오는’ 것.

추후 찾아갈 암살자들을 조심하라.』

시종들이라면 집사 암살자 다음으로 기어들어 온 두 명의 암살자를 가리키는 말이렷다.

그 두 놈은 정말 에슐라 저택에서 시종 노릇을 하고 있나 보다.

‘의뢰인도 디안 케트의 유산을 노리고 있는 건가. 역시 웨더우즈 가문과 디안 케트 사이에는 확실한 접점이 있어.’

나, 루, 그리고 의뢰인까지. 내가 아는 인물만 총 셋이 디안 케트의 유산을 노리고 있다.

루는 집사 암살자의 증언이 전부였으나, 거의 확신하는 상태였다. 그 같은 인물이 웨더우즈 저택에 몸소 취직할 이유는 디안 케트밖에 없었으니까.

‘웨더우즈 룸에 어서 들어가 봐야 하는데.’

문제는 열쇠의 행방을 도통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녀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의 방을 뒤져 봤으나, 열쇠 꾸러미 비스름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몸에 지니고 다니는 듯했다.

수면 약이라도 먹여야 하나?

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이틀 후, 흐릿한 회색 구름이 낀 흐린 날의 아침.

오늘은 루의 떡잎이 살짝 길게 자랐다.

정원에 옮겨 심은 떡잎들도 전과 달리 더 튼튼해졌는데, 일렬로 늘어서 있지 않고 동그랗게 모인 걸로 봐선 루가 처음부터 다시 심은 모양이었다.

‘흙으로 덮지 않은 게 어디야.’

한데 오늘은 조금 문제가 있다.

벽난로? 완벽하게 청소했다.

장보기? 요즘 간단한 요리 재료는 루가 직접 농장에서 공수해 오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내가 나갈 일이 없다.

루와의 말싸움에서 지지 않기? 이건…… 사실 반쯤 포기했다.

오늘의 문제는 바로 하녀장에게 있었다.

대단한 문제냐고 묻는다면 긍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하녀장은 이른 오전부터, 루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퇴근한 지금까지 내내 나를 뜯어 살폈다.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펍을 통해 구해 둔 <초강력 수면제>의 존재가 들킨 건가?

은밀하게 뒤좇는 하녀장의 눈빛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라,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용건.”

하녀장의 표정이 굳는다.

그녀는 뒤뜰에서 커튼을 널다가 쉬고 있는 나를 주방 안에서 10분 동안 훔쳐보고 있었다.

“데이지 양.”

“네.”

“혹시 남자로 변장할 생각 없어요?”

짧은 한마디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과 가정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갑자기 남자로 변장하라고? 설마 내 과거를 아는 건가? 내가 안데르트라는 걸 안다고? 대체 어떻게? 누가 언질해 준 거지? 아니면 본인 스스로 추리를…….’

“하아. 놀랐죠? 미안해요, 한 귀로 흘려들으세요.”

……아닌가?

‘하지만 평소와 확실히 달라.’

특히 이틀 전에 도착한 저 서신.

하녀장은 엊그제부터 저 서신을 쥔 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종이가 여러모로 고급스러운 걸 봐선 하녀장 개인이 아닌, 웨더우즈 가문에 도착한 서신인 듯했다.

“이유.”

“괜찮아요.”

“나는 맹세한 사람.”

한쪽 팔을 걷어 일직선으로 박힌 맹세의 흔적을 보여 주자, 하녀장이 표정이 살짝 진중해졌다.

“그래요, 당신도 이제는 우리 웨더우즈 저택의 일원이니까……. 마냥 숨기고 있는 것도 우습겠네요. 이틀 전에 귀족회에서 연락이 도착했어요.”

“귀족회?”

“네. 귀족회란 펜 로타 제국 내 가장 상징적인 열일곱의 귀족 가문을 말해요. 친목과 협력을 위한, 일종의 최상류층 사교 모임인 셈이죠. 모임으로 치부하기에는 정치적인 의도도 다분하지만요.”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역사가 깊고 명망도 높은 웨더우즈 가문은 오래전부터 귀족회에 속해 있었어요. 매해 한 번씩 만남의 자리를 가져서 여러 실리적인 이야기를 나눴죠. 한데 데이지 양도 알다시피, 4년 동안 우리 웨더우즈 가문은…….”

사람이 아닌 알이 수장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아하. 알이 사람처럼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장기간 불참.”

“맞아요.”

“잘렸구나!”

“아니, 아직은 아니에요. 곧 그럴지도 모르지만.”

하아아아. 긴 한숨을 뱉은 하녀장이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규칙에 의하면 모든 귀족회 가문은 3년 연속으로 회의에 불참할 수 없어요. 마도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작년까지는 예외가 허용됐지만, 올해는 아니에요. 참석하지 않으면 귀족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오히려 좋아.”

번쩍 눈을 뜬 하녀장이 나를 노려봤다.

“좋다니요? 귀족회에서 쫓겨나면 불명예를 떠나서 웨더우즈 가문에 큰 문제가 일어날 거예요. 귀족회 일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던 자들이 아주 많으니까요.”

“그래서.”

펄럭. 나는 마지막 커튼을 빨랫줄에 널며 물었다.

“나보고 대신 참석해라?”

“아니요. 노파심에 뱉은 말이에요. 한 귀로 흘리세요.”

“나는 찬성.”

“……뭐라고요?”

팡, 팡. 몽둥이로 커튼을 여러 번 두드리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웨더우즈 자작으로 변장해서 귀족회에 참석하기.

감쪽같이 변장할 수 있다면 내게 실보다는 득이 된다.

특히 나를 감시하는 의뢰인의 정체를 약간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금력이나 군부 보안에 손을 댈 수 있을 수준의 정보력을 봤을 때…… 웨더우즈에 암살자를 보내는 의뢰인은 귀족회의 일원일 확률이 높아. 웨더우즈 자작이 직접 움직이면 분명 관심을 보이겠지.’

미끼를 문 의뢰인이나, 다른 귀족들을 잘만 이용하면 디안 케트의 다른 유물을 찾아낼 수도 있었다.

하녀라는 직업 특성상 쉽게 미드윈트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로선 아주 감사한 기회였다.

나는 엄지로 가슴을 가리키며 자신감을 어필했다.

“누구보다 남자다울 자신 있음.”

하녀장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물론 당신이 여자치고는 신장이 크고 걸음걸이도 묘하게 박력 있기는 하지만…….”

“주인을 귀족회로 보내면 웨더우즈 가문은 폭삭.”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래도 매끈하게 잘생기셨잖아요.”

“그래 봤자 알이잖아.”

“누가.”

순간, 측면으로 비집고 들어온 음성에 말문이 막혔다.

어디선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고. 나와 하녀장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웨더우즈의 얼굴 없는 주인님이?”

비소에 가까운 웃음을 띤 남자가 벽에 기댄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꽤 흥미로운데.”

그러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루가.

‘실수했다.’

애초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점을 인지한 후 뱉은 말이었는데!

하지만 루의 경지는 나와 비등하거나 높아서, 언제든지 인기척을 숨길 수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루 씨. 주인님이 어떻게 알이 되나요? 소설책을 너무 많이 읽으셨네요. 자중하세요.”

‘비밀을 함부로 발설하지 못한다’와 같은 맹세는 방금처럼 우발적인 상황에선 무력하다.

하녀장이 뻔뻔한 얼굴로 변명했으나 루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 대신 내 한쪽 팔을 턱짓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서 갑자기 그런 흔적을 새겨 왔나 했더니. 흐음. 나만 쏙 빼고 비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나?”

“……내 팔은 언제 훔쳐본 거야?”

“설거지할 때.”

설거지할 때도 이 맹세가 보일 만큼 소매를 높게 걷지는 않는데.

‘물에 젖어서 비친 거구나.’

예리한 놈.

‘알’이라는 정보 하나만으로 거기까지 파악하다니. 이렇게 되면 작정하고 속이기도 힘들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하녀장님. 내 탓이 아니야. 당신도 긴장 풀고 아무렇게나 막 뱉었잖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루가 하녀장을 바라봤다.

“저한테 할 말 없으신지?”

“……뭘 원하는 건가요?”

적의를 띠는 녹안을 응시하며, 루는 태연히 답했다.

“저도 새겨 주시죠, 맹세의 흔적. 고용인이라고는 달랑 셋뿐인 저택인데.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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