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전쟁놀이라도 하는 건가?
아이들은 원래 전쟁을 좋아한다. 전시 때도 몇 번 맞닥뜨린 상황이라 크게 놀랍지 않았다.
“뭐? 안데르트는 싫어. 그럼 대마법사 메피스토한테 죽어야 되잖아. 내가 라파엘로야!”
그러나 내 두 팔은 떡잎을 옮겨 심다 말고 우뚝 멈췄다.
‘내가 한 번 죽기는 했다만. 내 귀로 직접 그 사실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네.’
그래, 안데르트는 죽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살아 있다.
지금의 나는 안데르트가 아니지만, 내 안의 안데르트는 여전히 죽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오는 간극이 가끔 소름 돋도록 낯설게 다가왔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아이들은 사라졌어도, 떡잎을 옮겨 심는 내내 근방이 소란스러웠다.
‘축제라도 열렸나.’
뒤뜰에서 고소한 빵 냄새가 풍겨 왔다.
일을 마치고 활짝 열린 주방 창문 쪽으로 이동한 나는 하녀장에게서 차를 건네받았다.
“바깥이 시끄러워.”
창틀에 팔을 기대고 있던 하녀장이 새삼 놀랍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데이지 양은 정말 세상 무심하네요. 오늘은 평화절이에요.”
“평화절?”
그게 뭔데?
“마도 전쟁에서의 승전을 기념하는 날이요. 오늘로 4주년이 됩니다. 상식이니 알아 두세요.”
종전의 날.
오늘이 그날이었구나.
‘그래서 아침부터 그런 찝찝한 악몽을 꾼 거였어.’
벽에 기대 차를 홀짝이던 나는 주방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일간 신문을 발견했다. 신문 첫 면 헤드라인에는 큼직한 글씨가 박혀 있었다.
『평화절 4주년 축사회, 올해 라파엘로 대공은 불참』
『올해 라파엘로 제나일 펜 로타 대공은 평화절 4주년 축사회에 불참한다. 제나일 가문 측은 대공의 국외 일정이 밀림에 따라…….』
라파엘로 대공이라.
주방으로 들어간 나는 의자에 자리 잡고 신문을 펼쳤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고, 일면에 보란 듯이 박힌 옛 친우가 눈에 들어오자 그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하고 말았다.
‘그대로네.’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억 속에 못처럼 박힌 4년 전의 모습, 그대로라서.
‘하기야 4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니까.’
라파엘로.
그의 이름을 곱씹으면 입 안이 썼다.
기실, 나는 퀸 섬에서 눈을 뜬 이래 의도적으로 옛 동료들의 소식을 피해 왔다.
일차원적으로 싫다, 좋다의 감상을 떠나 여러모로 복잡하고 부정적인 심경에 빠지는 까닭이다.
‘옷이 날개라더니. 이런 멋진 정장을 입으니까 뼛속까지 귀족 나리 같네.’
신문 속 라파엘로는 14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는 마(魔)를 운용하는 자가 특출한 경지에 올랐을 때 맞이하는 변화 중 하나다. 노화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는 것이다.
태양처럼 눈부신 금발. 빛을 발할 때마다 선홍빛으로 일렁이는 검붉은 눈동자. 언제나 빳빳하게 굳어 있던 일자 눈썹과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매, 적당히 크고 높은 코.
보기 좋게 마른 볼 한가운데는 종종 우물처럼 깊게 박힌 보조개가 드러나고는 한다.
그 보조개 때문일까? 드물게 웃음을 터트릴 때면 소년처럼 부드럽고 청아한 분위기를 풍기곤 했다.
동그랗게 올라간 광대는 또 어떻고.
정말, 늙은이처럼 진중하기만 한 말투와는 정반대의 미소였지.
“네가 아닌 누구에게도 내 등을 맡기지 못해, 안데르트. 신뢰할 수 있는 이도 너뿐이지. 우습게 들리겠지만, 종종 내게 잃어버린 형제가 있다면 너이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한바탕 마귀의 피를 뒤집어쓴 날의 밤이면 라파엘로는 그런 낯간지러운 감상에 젖기도 했다.
형제, 친우, 파트너, 가족, 반쪽.
그가 나를 부르던 애정 어린 이름은 많지만, 나는 그런 라파엘로의 애정이 때때로 버거웠다.
내가 안데르트라는 가면을 벗으면, 그의 애정도 같이 벗겨질 것 같아서.
“당장 멈춰, 안데르트! 네가 죽을 수는 없다! 너를 이딴 식으로 죽게 놔두지 않아!”
그 절규 같은 외침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차마 등을 돌리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되새겨도 끔찍한 기억이야.’
과거를 되짚자 라파엘로가 조금은 그리워졌다.
더불어 궁금했다.
내가 죽고 전쟁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네게 언질도 없이 떠난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많이 원망했다면 용서할 생각이 있는지.
너도 나처럼 그 시절의 기억이 악몽으로 남았는지. 이런 종이 따위를 통해 마주하는 것조차 식은땀이 흐를 만큼 곤욕스러울지.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무거워지는 착각이 일면서…….
탁.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모락모락 김 오르는 스튜가 신문 위에 떨어졌다.
등 뒤로 길게 솟았다가 사라진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식사 시간에는 식사만.”
루의 목소리가 이렇게 기분 좋게 들렸던 때도 있었던가?
‘……고기가 들어 있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스푼을 들었다.
어느새 상석에는 하녀장이, 내 건너편에는 루가 앉아 스튜에 빵을 찍어 먹고 있었다.
“윽.”
더럽게 뜨겁다.
나는 뜨거운 스튜에 덴 입천장을 달래며 하녀장을 바라봤다.
“평화절에는 뭐 해?”
“평화절은 공휴일이에요. 가정에서는 평화절 기념 빵을 먹고, 성회전에서는 공개 축복 기도가 열리고, 광장에서는 벼룩시장이 열리죠. 수입은 모두 마도 전쟁 난민 보호소에 기부합니다. 시장 상인들도 일부 수익을 기부하고요.”
좋은 공휴일이네. 이 틈을 타 펍이나 다녀와야겠다.
식사와 설거지를 마친 후, 뒤뜰에서 담배 피우는 하녀장에게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심부름.”
“…….”
“시켜 주세요.”
“당신은 농땡이 칠 생각만 하고 있군요. 마침 재봉실이 다 떨어졌던 참이기는 해도.”
좋아. 이걸로 시장을 방문한 척 은밀하게 펍에 들를 수 있다.
시장은 평소보다 조금 한산했다.
공휴일이어서 그런지 감자 노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낸 자릿세를 잘 돌려받았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나는 잡화점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며 한참 농땡이를 피우다가 카운터 앞에 섰다.
“<하녀를 위한 가성비 좋은 재봉실 세트> 하나.”
기다렸다는 듯 물건을 스윽 꺼낸 잡화점 상인이 돈을 받으며 말했다.
“오늘은 이 물건으로 끝이야? 시간 나면 다른 가게도 미리 들러, 아가씨. 이번 주 내내 우리 시장 가게들이 전부 크게 할인하거든. 신선한 과일, 채소, 고기 전부 싸게 팔아. 사 놓는 게 이득이야.”
“평화절 할인?”
“응? 아이, 평화절 때문일 리가. 그게 말이야. 몇 년 동안 우릴 괴롭히던 녀석들이 갑자기 회개를 했거든.”
잡화점 상인과 잡담을 나누고 있던 앞 건물 양장점 주인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그래. 4년 치 자릿세를 한꺼번에 돌려줬다니까?”
“그놈들 때문에 장사 접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듣자 하니 웬 의인이 며칠 전 새벽에 <펍 피스 오브 랜드>에서 난리를 피웠다던데. 그분이 녀석들을 혼쭐내 준 모양이야. 누구일까?”
나야.
“영웅일세, 암 영웅이고말고!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 진짜 영웅은 그런 의인이지. 누굴까? 우리 동네 사람이려나?”
나라니까.
“얼굴 한번 봤으면 좋겠네. 다들 밥 한 끼 사 주려 몰려들 텐데 말이지.”
“나는 아주 근사한 맞춤 정장을 한 벌…….”
“사진관 동생은 사진도 찍어 준다던데? 아예 우리끼리 돈 모아서 신문 광고에 실어 주는 건 어때? 응?”
이러다가 진짜 신문에 실릴 꼴이라 못 들은 척 잡화점을 나왔다.
이대로 펍 쪽으로 걸어가면서 살짝 한마디 흘리고.
“아. 펍에 분실물. 깜빡.”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런데 펍은 저녁에 열지 않나?’
멀찍이 물러서려던 나는 문에 달린 안내판을 확인하고 멈칫 굳었다.
『점심 식사 가능』
‘펍이 점심을 판다고?’
집사 암살자의 방식인가.
‘하긴. 낮에도 열려 있어야 하녀가 왔다 갔다 해도 이상하지 않고, 정보도 많이 들어오겠지.’
딸랑.
펍 내부는 문에 걸린 안내판이 무색하게 한산했다.
자릿세를 요구하며 폭력을 일삼던 자들의 본진인 만큼 하루아침 만에 손님을 끌어모으기는 힘들 테다.
“분실물.”
나는 바에 몸을 기댄 채 손을 내밀었다.
술잔을 닦던 바텐더가 장식장의 초콜릿을 하나 꺼내더니, 바지춤 안에 있던 쪽지와 함께 내게 내밀었다.
“여기. 집사 대장님이 남긴 쪽지입니다, 하녀 대장님.”
속삭이는 음성이 꽤 진중하다.
집사 암살자가 철저히 교육시켰나 본데? 역시 이런 일에는 경험자가 나서는 게 최고지.
그때, 대뜸 바닥을 쓸던 간부들이 모이더니 자연스럽게 내 뒤를 지나치며 속삭였다.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근방에 애들 쫘악 깔아서 정보를 끌어모았습죠.”
“우리는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행동하는 암약 길드니 말입니다. 킬킬…….”
여기 애들 뭔가 좀 이상해진 것 같은데.
바에서 몸을 떼며 그들에게 경고했다.
“대장이라고 부르지 마.”
간부들이 고개를 숙였다.
“존명.”
“존명.”
너희 맛 들렸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