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휘이잉. 섬뜩한 모래바람이 분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 위에 홀로 서 있었다.
[살려 줘…….]
멍한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에 가득 찬 허허로운 풍경이 낯설다기보다 익숙했다.
……아, 이곳은 제국 남부 군도.
퀸 섬이었다.
무너진 나의 고향. 전우의 시체가 산처럼 쌓인 지옥.
그랬다. 내가 밟고 선 이 땅은 시체의 언덕이었다.
콱!
그 사실을 인지하기 무섭게, 바닥에서 솟아난 앙상한 손이 내 발목을 잡아챘다.
[사, 살려 줘, 안데르트…….]
모래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두개골 사이로 녹은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차마 산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안데르트…….]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였지만, 얼굴과 이름은 떠올릴 수 없다.
낯익은 목소리. 모르는 얼굴.
내게는 그런 존재가 많다. 전장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건 애도할 이가 더 많아진다는 뜻이었으므로.
[아파, 살려 줘. 살려 줘.]
[안데르트 경. 왜 나를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죽게 내버려 둔 겁니까!]
이들은 전쟁에서 생을 마감한 병사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차마 이자의 손을 떨치지 못했다.
곧이어 두 번째 팔이 뻗어 왔다. 그다음은 세 번째가, 네 번째가…… 열 번째 팔이 땅에서 뻗어 나와 내 사지를 잡아챘다.
이내 더는 저항할 힘이 없어 황무지에 쓰러지자, 앙상한 손들이 더듬더듬 내 얼굴로 다가왔다.
[아니, 아니다.]
[너는 안데르트가 아니야!]
비명을 내지른 손들이 내 몸을 저만치 밀어냈다.
그들은 나를 손가락질하며 다그쳤다.
[너는 누구냐!]
안데르트라고 대답했지만, 죽은 자들은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마. 이름을 대.]
[안데르트의 껍질을 벗어!]
[너는 누구냐!]
나는 안데르트야.
내가 진짜 안데르트 파거야. 내가 이 이름으로 너희와 함께 검과 총을 들었어! 나는 이 이름으로 10년을 지옥에서 굴렀다!
[네 진짜 이름을 말해.]
[감히 안데르트의 이름을 사용하다니!]
[너는 안데르트가 아니다! 너는 대체 누구냐!]
나는.
나는 안데르트 파거가 아니다.
안데르트는 내 동생이야.
그럼, 나는 누구지?
불에 덴 듯 어깨를 떨며 몸을 일으켰다.
다급히 숨을 들이켜자 황무지의 건조한 공기가 아닌, 산뜻하고 안온한 공기가 머릿속에 들어찼다.
이곳이 어디인지 인지하기 전에 뇌리에 남은 목소리가 내 시야를 어지러뜨렸다.
[너는 대체 누구냐!]
나야말로 궁금했다.
“……나는 누구지?”
“당신이 누구냐고요?”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자, 침대 옆에 선 하녀장이 보였다.
서늘한 눈으로 나를 흘겨본 하녀장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기꺼이 대답해 드리죠. 당신은 패기 좋게 늦잠 잔 하녀입니다, 데이지 양. 늦잠 잔 주제에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군요. 찬물을 머리에 부어서 깨우기 전에 어서 정신 차리세요.”
아, 늦잠.
‘꿈이었구나.’
꿔도 하필 그런 기분 나쁜 꿈을 꾸다니. 심지어 늦잠을 잤어?
2회 지각 시 급여가 삭감된다는 계약 조항이 떠올랐다. 악몽의 영향으로 침울했던 기분이 더 침울해졌다.
게다가 목이 너무 따갑다. 정말 사막이라도 거쳐 온 것처럼. 나는 하녀복으로 갈아입다 말고 무릎을 쭈그린 채 앉았다.
“목이 너무 말라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은 하녀장이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아. 내가 천방지축 조카를 키우는 건지, 하녀를 교육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가져다줄 테니 옷이나 갈아입고 있으세요.”
“네.”
탁. 하녀장이 방을 나가기 무섭게 창문 쪽으로 걸음을 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발견한 작은 쪽지가 창틀 사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쪽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펍. 시간대 자유.』
그 이상의 내용은 없었으나, 집사 암살자에게서 도착한 편지임이 틀림없었다.
할 말이 있으니 아무 때나 펍에 들르라는 소리였다.
‘벌써 디안 케트의 유산을 찾은 건가?’
나는 쪽지를 개인 서랍 안에 보관한 후, 일할 준비를 마저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활짝 열려 있는 현관문을 나서자 물을 떠 오겠다던 하녀장이 정문 앞에 멈춰 선 게 보였다.
그녀는 더없이 진중한 눈으로 서신을 훑고 있었다.
“협박 편지?”
하도 살벌한 얼굴이라 서신의 내용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흠칫 몸을 굳힌 채 나를 바라본 하녀장은 다급히 서신을 챙기며 대답했다.
“아, 데이지 양. 아니에요. 그냥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이만 들어가죠. 물은 마셨나요?”
“마실 예정.”
나는 하녀장이 냄비에 가득 퍼 준 물을 마신 후 오전 일과를 시작했다.
가끔 생각하는데, 하녀장은 나를 정말 일하는 소로 여기는 것 같다.
2층 통로 물걸레질이 끝난 후, 점심 식사 전에 소정원으로 나온 나는 계단 위에 가지런히 놓인 화분 루를 확인했다.
“……음, 좋아.”
어제 아침, 처음으로 싹이 텄다.
내가 심은 씨앗의 떡잎은 쌍떡잎이었다.
잎이 작지만 토실했고, 총 22개의 씨앗이 발아했다. 불규칙하게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그렇게 하찮을 수가 없었다.
‘귀엽다.’
풀도 귀여울 수가 있구나.
루야, 너는 몸이 22개나 되네. 몸이 22개나 되지만 이름은 루로 정해져 있어서 좋겠다. 누가 뭐래도 너는 루잖아.
“솎아.”
정수리 위해서 감상을 깨는 건조한 어투가 떨어졌다.
“아니면 옮겨 심든가. 하지만 옮겨 심기에는 너무 많네요. 정원에 특별히 내줄 자리도 없고. 그냥 솎아 내는 게 좋겠습니다.”
고개를 들자 유리 인형처럼 섬세한 이목구비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포가 연상되는 푸른색 머리칼 뒤로 정오의 태양이 번쩍인다. 그러나 태양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이 남자의 얼굴이 더 번쩍이니까.
“왜?”
“떡잎이 얇고, 줄기가 힘없이 투명한 놈들 위주로 뽑으세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작은 화분 안에서 영양이 분산되면 제대로 자라기 힘듭니다. 살릴 놈만 살려 두는 게 맞아요.”
그런 야만적인 논리를 적용하다니!
착잡한 기분으로 화분을 쳐다봤다. 야만적이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 작은 화분에 옹기종기 모여 봤자 서로 죽고 죽이는 참극만 벌어질 테니.
‘인생은 쓰디쓰다. 풀들도 살아남으려고 경쟁하네.’
한데 내 손으로 틔운 떡잎을 솎아 내려니 영 찝찝한 기분이 든다.
스윽 정원을 둘러보자, 루가 냉랭한 어투로 경고했다.
“정원엔 자리 없다고 했습니다.”
“없기는? 빈자리가 저렇게 많은데? 분수 옆에도 잔디만 있고, 화단 앞에도 잔디만 있는데?”
저기도, 저기도, 저기도.
입술이 아리는 것도 잊고 소정원 이곳저곳을 가리키자, 그런 내 손가락을 홱 잡아챈 루가 멍청이 가르치듯 친절하고도 한심하단 표정으로 대답했다.
“비움의 미학입니다. 비움으로써 미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거죠. 정원에 심는 꽃은 난민이 아니에요. 빈자리에 무턱대고 들일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죽어도 싫다는 거잖아.
‘억지로 땅을 파헤칠 수도 없고.’
웨더우즈 저택은 기본적으로 모든 가사를 모든 고용인이 함께 분담한다(요리 제외).
그래서 루가 바쁠 때는 내가 정원에 물을 주고, 내가 바쁠 때는 루가 벽난로를 청소하곤 했다(요리 제외).
하지만 정원의 미관만은 확실히 루의 소관이었다.
정원의 미관을 해칠 것으로 우려되는, 열 쌍 이상의 쌍떡잎을 옮겨 심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심…….”
안 돼, 천적인 루의 얼굴을 마주 보고서는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심…….”
나는 고개를 돌린 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게 해 줘.”
겨우 입에 담았는데 반응이 없다.
힐끔 눈을 뜨고 바라보니 전혀 심게 해 주고 싶지 않은 얼굴로 되묻는다.
“해 줘?”
‘내가 네 노예야?’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부, 부…….”
“부?”
“부탁할게.”
황홀한 얼굴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루는 떡잎이 바글바글 모인 화분을 턱짓했다.
“무슨 꽃인 줄 알고?”
“예쁠 거야.”
“무슨 자신감으로?”
“이름이 루니까.”
루의 눈이 더 얇아졌다.
눈꺼풀이 얇고 눈시울의 속눈썹이 첨예해서 그런지 실눈을 떠도 그림이 된다.
“아부할 줄도 알아?”
조롱보다는 헛웃음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루는 고개를 든 채 주위를 살피더니 분수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곧 담장 아래 잔디 부근을 가볍게 건드렸다.
“여기에 일렬로. 흐트러지면 흙으로 덮을 겁니다. 검사할 테니 착실히 움직이세요.”
오, 이렇게 순순히?
말을 바꾸기 전에 화분 루를 들고 잽싸게 이동했다. 삽을 가져오기 위해 등을 돌리자, 내 앞길을 가로막은 그가 턱을 치켜들며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렸다.
“감사 인사.”
“……감사합니다, 루 씨.”
씹듯이 내뱉는 내 얼굴을 즐겁게 감상한 그가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사라졌다. 깐깐한 놈.
나는 삽을 들고 단단하게 자리한 잔디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원에 옮겨 심으면 이 루들은 여전히 루인가? 루는 화분 이름인데, 이 떡잎들은 화분을 나와서 정원에 새로이 자리 잡았잖아.
‘분가한 루, 정도로 새 이름을 지어 주면 되려나.’
그렇게 떡잎 하나하나 나눠 심은 지 얼마가 흘렀을까?
담장 너머로 어린아이들의 말다툼이 들려왔다.
“내가 라파엘로 할 거야.”
“싫어, 내가 라파엘로 총사령관이야!”
“야, 이 바보야. 너는 머리가 갈색이잖아. 그러니까 안데르트 사령관이나 해. 아니면 나타샤 예하를 하든가?”
“뭐? 안데르트는 싫어. 그럼 대마법사 메피스토한테 죽어야 되잖아. 내가 라파엘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