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 재수 없는 놈은 가끔 내 앞에서 선생님이라도 된 양 군다.
하녀장이 가르칠 때와 달리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날 놀리려는 의도가 선명하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배웠죠? 이제 다시 해 보는 건?”
“…….”
“개도 은혜는 갚는다는데 우리 데이지 양이 개만도 못할 것 같지는 않고.”
빠득. 이를 악문 채 노려보며 답했다.
“고마워.”
어찌 되었든 루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내 인사를 받은 루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고마워?”
“……요.”
“고마우면 대가를 치러야지.”
무슨 대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그를 흘겨봤다.
“앞으로는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그런 무식한 짓거리 하지 말고, 내일이 없다는 듯 굴지 말고, 항상 몸보다 머리를 먼저 쓰고, 만약 부득이하게 시체를 처리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내게 먼저 알리세요. 쉽죠?”
루는 혹시 정원사 겸 요리사 겸 선생님이 되고 싶은 걸까.
“대답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하고 답하려는 순간, 봉투 안의 진한 흙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머릿속으로 반나절 동안 시외를 오고 간 루의 모습이 그려졌다. 저택에 돌아가 저 싱싱한 재료로 요리를 시작할 그의 뒷모습도.
그러자 대거리할 마음이 사그라졌다.
‘역시 루는 이상해.’
이상한 데서 열성적이야. 싱싱한 재료를 구하기 위해 시외까지 다녀오다니.
조그맣게 알았다고 속삭이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루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너 귀족이야?”
“너?”
“루 씨는 귀족이야?”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가 궁금한데.”
그는 눈을 감은 채 잠꼬대라도 하듯 느릿한 목소리로 읊었다.
“물론 내가 우아하고, 품위 있고, 돈 많고, 배려 넘치고, 잘생기고, 몸 좋고, 다정하고, 이지적이고, 자의식 높기는 하지만. 그게 귀족처럼 보일 이유는 못 되니까.”
너 네가 자의식 되게 높은 건 알긴 하구나.
“반쯤은 들어맞았어.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나랑 하녀장을 도와줬잖아.”
“좋네요.”
“……뭐가? 꺼내 준 게?”
“아니, 길게 말하는 거. 앞으로도 그렇게 열심히 조잘대세요. 백치처럼 뚝뚝 끊어서 말하지 말고.”
기가 막혔다.
‘백치…….’
그래, 그렇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쳐.
한데 내가 본인 때문에 말이 길어지는 걸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모르나 보지?
물론 말한 적 없으니 모르겠지. 앞으로도 말할 생각 없지만!
“거절.”
“청개구리 같기는.”
냉정하게 고개를 젓자 루가 코웃음 쳤다.
“내가 어떻게 둘을 꺼냈는지 궁금해요?”
“응.”
“궁금하면 꽃 피우세요. 쉽죠? 이 정도면 싸게 먹히는 거지.”
그놈의 “쉽죠?”는 무슨.
“너무 오래 걸리잖아. 아직 싹도 안 자랐어!”
“씨만 흙에 박아 놓고 거들떠도 안 보는데 싹이 자라겠나.”
“관심 있어야만 싹이 자라면 길가의 잡초는 어떻게 그렇게 쑥쑥 자라는데?”
“나한테 묻지 말고 직접 실험해 보지 그럽니까. 혹시 모르지, 지나가다 알은척 좀 하면 떡잎이 솟을지.”
“풀떼기치고는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어.”
“그 풀떼기에 이름 하나 못 지어 주는 주제에. 데이지 양이? 농담이겠죠?”
다시 눈을 뜬 루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팻말 채우면.”
“…….”
“그 질문에 대답해 주겠습니다. 뭐였더라, 내가 귀족이냐고? 어려운 질문은 아니니까요.”
“…….”
“그마저도 싫다면 팻말은 물론 화분까지 죄다 치워 버리세요. 억지로 키워서 어디에 써먹겠어요? 고작 꽃 몇 송이 피우는 일에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 멍청한 일도 없겠네. 그렇죠?”
루는 뭔가 대단한 착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그렇게 싹수없이 말하면 내가 홧김에 다 포기할 줄 알고?’
웨더우즈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렸다.
요리 재료를 주방에 놓은 후, 펜을 쥐고 곧장 현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화분을 든 채 계단 위에 쭈그려 앉았다.
텅 빈 팻말이 보고 있으려니 머리도 텅 빈 기분이 들었다.
‘됐어. 이름 짓기 별거 아니야. 데이지라는 이름도 10초 만에 결정했잖아. 똑같은 방식으로 지으면 돼.’
누가 들어도 화분처럼 느껴지는 이름.
……그런 거 없다.
‘그럼 아무렇게나 짓자.’
그런데 어떻게 아무렇게나 짓지?
사실 그렇잖아. 작명은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다. 이름에는 뜻이 있고 애정이 있다.
또한 애정을 가진 순간부터 책임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름의 주인이 내가 직접 심고, 키운 식물이라면 더욱이.
‘3년밖에 살지 못할 내가 책임감을 가져도 되는 걸까?’
내가 돌보지 못하면 이 식물은 죽는다.
운이 좋으면 다른 하녀가 계속 키워 가겠지만, 한낱 풀이라 해도 내가 키운 생명을 운에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아.”
작명. 정말 짜증 나는 대가다.
앉은 자세로 주저하기를 수십 번. 나는 겨우겨우 팻말을 채웠다.
『루』
‘확실히 이 이름이라면 부담이 덜할 것 같지.’
그렇게 이름을 정했을 땐 어느덧 달이 떠오른 후였다. 멍하니 일어서서 주방으로 돌아가니 후각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풍겨 왔다.
요리를 거의 끝마쳐 가는지, 불 앞에 선 루가 한쪽 손을 허리에 올린 채 스튜 속 국자를 휘휘 젓고 있었다. 신장이 커서 그런가 유독 고개를 깊게 숙인 채였다.
그제야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화분을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후,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인사해. 내 화분 루.”
힐긋 화분을 바라본 루가 가소롭다는 듯 픽 웃더니 다시 시선을 스튜로 돌렸다.
그렇다고 입까지 다물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들어요?”
나는 쓰윽쓰윽 소리 내 화분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이름? 나쁘지 않아. 루 녀석이 주인을 잘 만났지. 말도 안 듣는 루 자식. 틔우라는 새싹은 안 틔우고 감감무소식인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주인인 내가 마음 넓게 기다려 줘야지 어쩌겠어?”
아무렴, 아무렴.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사람 루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 루를 괴롭힐 땐 길게 말해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심히 괴롭히고 싶어서 혀가 근질근질했다.
탁. 국자를 턴 후 앞치마를 벗은 사람 루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말고. 루를 껴안고 키스하면 좋아요?”
……뭐?
“내가 언제?”
루는 보는 이의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방금 입술 진하게 비볐잖아. 루랑.”
“이 미친 요리…….”
안 돼.
저 언어유희에 넘어가면 안 된다.
놈은 나를 자극하고 있었다. 저 실실 웃는 낯짝을 봐선 뻔해.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길 바라는 눈이었다.
나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갑작스레 나타난 초록색 눈과 딱 마주쳤다.
주방을 지나가던 하녀장과.
그녀는 얇게 뜬 눈으로 나와 루를 번갈아 봤다.
“……사내 연애는 금지입니다, 데이지 양 그리고 루 씨.”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오해!”
“오해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겠죠. 앞으로 조심하세요, 데이지 양. 걸리면 감봉입니다.”
음산하게 경고한 하녀장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날카로운 구두 소리가 멀어진 후, 모르는 척 앞치마를 벗고 있던 사람 루가 내 곁을 지나치면서 속삭였다.
스튜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을 가로지르고 그의 서늘한 향이 훅 끼쳤다.
“루를 사랑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만. 당사자인 루는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으니 자중하는 게 좋을 겁니다, 데이지 양. 쓰다듬는 것도요. 그거 희롱이에요.”
이 미친놈이 자중을 입에 담아? 자중은 네 입이 해야 하는 거야.
“네가 루의 생각을 어떻게 아는데?”
“일단 나도 ‘루’이기는 하니까. ‘루’끼리는 통한다고 해야 하나.”
긴 손가락이 툭, 하고 ‘루’가 적힌 팻말을 건드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 제안을 개무시하지는 않았네요. 잘했어요. 꼭 이런 식으로 미끼를 던져야 무나? 청개구리라서 그런지 까다롭다니까.”
“약속이나 지켜.”
약속은 무슨 약속이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 사람 루가 뒤늦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아. 귀족인지 물었었죠? 나는 작위 같은 거 없고, 작위를 가진 친척도 없습니다. 물론 돈은 많지만. 돈 많다고 다 귀족은 아니지.”
귀족이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페데가일 남작을 저지한 건데?’
인성 개차반에 욕심이 한가득한 인물이라 해도 상대는 무려 귀족.
귀족의 자존심은 대체로 하늘을 찌른다.
그런 자가 고작 하녀 따위에게 위해를 입었으니 얼마나 속이 끓겠는가? 한두 마디 말로는 절대 회유할 수 없었다.
‘역시 협박인가. 아니면 돈으로 혼쭐을 내 줬다든가.’
주방과 이어진 통로에서 루의 조언이 들려왔다.
“이대로 5분 정도 더 끓인 후 식사하세요. 간이 안 맞으면 소금을 더 넣어도 되고.”
5분. 소금.
요리사의 주의 사항은 한 귀로 흘리면 안 된다. 나는 고찰을 멈추고 불 앞에 서서 부드럽게 끓는 스튜를 바라봤다.
‘맛있겠다.’
신선한 재료로 만든 신선한 스튜라니. 하루의 피곤함이 순식간에 씻기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