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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195)

14화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조사관은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마주치는 시선에 의심이 깊어진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일을 하다가 이 도시로 올라오게 된 거죠?”

그 질문에 나름 잘 대답한 것 같은데.

마음 같아서는 취조고 뭐고 협력할 마음이 없었지만, 하녀장을 생각해서 성실히 임했다.

하녀장은 곤란해지면 안 된다. 내 상관이고 내 돈줄이니까.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수사관의 손가락이 점차 빨라졌다.

“데이지 파거 양은 제국 남부의 항구인 블루벤 출신이며, 가족으로는 남동생이 있고, 직장을 얻기 위해 미드윈트리로 올라왔다는 겁니까?”

끄덕. 하녀로 일하기 위해서 지어낸 내 가짜 신분이었다.

“남부 해안에서 미드윈트리의 거리가 짧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이 도시로 결정한 이유가 뭡니까?”

“그냥.”

“정말 없습니까?”

“없는데.”

무언가 고심하듯, 조사관이 팔짱 낀 채 두 눈을 감았다.

원래 폭행죄로 고소당하면 이런 과정을 거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어쩐지 질문의 초점이 폭행 그 자체가 아닌, 나라는 인물에 고정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조사관. 들어오자마자 그런 말을 했었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당신의 신분에서 특이점을 발견했습니다. 불쾌하실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 부분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신분의 특이점. 역시 그건가.

‘내가 퀸 섬의 생존자라는 걸 아는 거야.’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명확히 내 신분을 알고 있다면 이런 식으로 수사를 진행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히 내게 ‘베르티 양 왜 거짓 신분을 사용하는 겁니까’라고 경고하면 될 일인데.

“하아. 파거 양? 파거 양이 아직 어린 데다 순수해 보여서 노파심에 말해 두지만.”

이자는 굳이 나를 타이르려 한다.

“이 취조에는 거짓 없이 솔직하게 임하는 게 본인에게도 좋을 겁니다. 입에 발린 말로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그게 파거 양을 위한 길이에요.”

마치 내 입으로 직접 확인받고 싶은 것처럼. 그 말은 즉.

‘내 신분에 대한 정보가 불확실하다는 뜻이겠지.’

이자는 단순히 페데가일 남작 폭행 사건을 취조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익명의 누군가가, 조사관을 통해 내 신분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군사 정보의 ‘일부’를 갈취해서.

“순순히 진짜 신분을 밝히십시오.”

대체 누구일까? 당연한 말이지만 알 길은 없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죽이자.

‘아니, 아니야. 죽이면 안 되지. 암살자도 아닌 민간인인데.’

협박하자.

그편이 좋아 보였다. 협박해서 입을 열게 하거나, 반대로 아예 다물게 하면 일도 더 수월하게 풀릴 것이다. 하녀장도 덜 곤란해지겠지.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직 어리고 가능성도 많은데 괜한 일로 발목 잡히는 수가 있어요. 괜히 더 숨기려 하다가 일이 커질 수도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될 수도 있고요.”

“…….”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눈앞의 조사관이 내 처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상인 연합회 놈들처럼 취급하기 미안한데.

‘어쩐담.’

덜 때려서 협박할까?

방식이야 어찌 되었든 확인해야 할 사안이 있었다.

“누구야.”

“음?”

“누가 나를 감시해?”

순간, 정곡이 찔린 것처럼 말문이 막힌 조사관이 표정을 굳힐 때였다.

덜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아주 시원하게 열렸다. 벽에 부딪힐 만큼 거칠게 열린 문 너머에는 거대한 존재가 우뚝 박힌 채였다. 마치 또 하나의 벽이 생긴 것처럼.

거창하게 들어선 이는 키가 아주 크고, 적당히 늘씬하지만 어쩐지 위협적인 남자였다.

눈에 띄는 신장 다음으로 인지된 것은 빳빳하게 흔들리는 밀짚모자…… 뭐? 밀짚모자? 이런 대도시의 조사실에서?

의문을 갖기 무섭게 황동색으로 번뜩이는 우울한 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상대의 이름이 입에 담겼다.

“루?”

이제 알았냐는 듯, 길고 유려한 눈썹이 위로 솟았다가 내려왔다.

“데이지 파거.”

무심하게 이름을 부른 루가 내게 턱짓했다.

“나와요.”

한 손에 채소와 유제품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안고서는 말이다.

여기는 어떻게 왔느냐고 묻기 전에, 루는 홀연히 걸음을 옮겼다.

‘따라가야 하나.’

고민은 짧았다. 수사관이 제지하기 전에 재빨리 일어서 루의 뒤를 쫓아갔다. 멍하니 앉아 있던 수사관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우리를 따라왔다.

“이봐, 잠깐! 당신 누구입니까? 여기는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당장 나가십시오!”

반듯한 셔츠와 진회색 베스트를 걸친 등이 눈앞에서 느릿하게 흔들린다.

고급스러운 태가 나는 멀끔한 정장 차림으로 밀짚모자를 걸치다니.

눈에 띄는 언밸런스함이 루의 또라이력을 한층 더 눈부시게 뒷받침하는 느낌이었다.

“선배!”

돌연 어디선가 튀어나온 젊은 남성이 다급히 뒤따라오던 수사관을 저지했다.

“워, 워. 일단 진정하십쇼. 화내실 필요 없어요. 조사하고 계신 사이에 일이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우리 손을 떠났다고요.”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잠시 귀를…….”

내 귀에는 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똑똑히 박혔다.

“페데가일 남작이 고소 취하했습니다.”

“뭐?”

“방금 그쪽 비서를 통해 고소취하서가 도착했지 뭡니까? 웃기죠? 당장 잡아 오지 않으면 뒤엎을 것처럼 굴던 자가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윗선은? 데이지 파거의 신분 조사는 사건과 별개로 윗선에서 내려온…….”

두 남성의 실랑이가 길어진다.

나는 못 들은 척 걸음을 이어 경찰서를 나왔다.

따사로운 봄의 노을이 반나절 만에 맞이한 자유를 축복하며 쏟아져 내렸다.

‘나를 감시하는 상부라.’

경찰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권력. 그리고 군사 정보를 몰래 빼내는 수준의 정보력까지.

이 둘을 모두 소유한 자는 드물다.

‘상부는 귀족이겠군.’

누구인지도 모르는 귀족은 내게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조사관은 내 신분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는 퀸 섬의 생존자라는 신분 때문에 나를 조사하는 게 아니라, 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퀸 섬의 생존자라는 정보가 발견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상대는 최소 내가 웨더우즈 저택에 취직한 후 나를 알게 된 자다.

이 모든 정보를 취합했을 때, 조사관이 언급한 ‘상부’로 예측되는 인물은 딱 하나였다.

‘의뢰인.’

웨더우즈 가문에 지속해서 암살자를 보내는 놈. 이제는 나까지 죽이려 드는 놈. 역시 가장 그럴싸한 건 그쪽이었다.

처음엔 루도 의심스러웠지만, 만약 루였다면 나를 직접 고문해 진실을 들었을 테다. 그편이 더 쉬운 방법일 테니.

그런데 의뢰인이 귀족이라면, 용의자가 확 좁혀지는데 말이지.

푸르륵.

상념에 빠져 있던 나는 코앞에서 들려온 투레질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경찰서 앞에 웬 더러운 짐마차가 정차해 있었다. 농지에서 비료를 옮길 때 쓸 법한 일두마차였다.

“타세요.”

짐마차에 올라 짚 위에 걸터앉은 루가 내게 턱짓했다. 놀랍게도, 짐마차를 모는 이는 집사 암살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모자를 살짝 벗어 올리며 알은체하는 모습이 우습다.

너 이제 마부 노릇도 해? 팔방미인이구나.

지나가던 꼬마 아이 한 명이 대뜸 소리쳤다.

“와! 시골 마차다! 더러워!”

“얘도, 참. 병 걸리니까 가까이 가지 마렴.”

나는 주위의 시선이 더 몰리기 전에 짐마차 위로 훌쩍 올라섰다. 비스듬히 등을 기대자 루가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죽여서 묻지 그랬습니까. 그럼 일이 귀찮아지지도 않았을 텐데.”

살벌하기 짝이 없는 짜증과 함께.

잘못을 시인한다는 의미로 종이봉투 안에 얌전히 고개를 파묻었다. 산뜻한 흙냄새와 함께 질 좋은 감자와 당근이 시야에 들어왔다.

오전 내내 안 보인다고 했더니. 설마 이 작물을 구하려고 시외를 다녀온 거야……?

살며시 고개를 들자, 눈을 감은 루의 얼굴이 보였다.

“하녀장은?”

“우리의 소중한 상사는 먼저 보냈습니다. 나온 김이 들를 곳이 있대서. 바쁘기도 하지.”

나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루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확신했다.

네가 손을 썼구나.

그가 손쓰지 않고서야 페데가일 남작이 대뜸 고소 취하할 리 없었고, 타이밍을 맞추어 루가 직접 나를 데려올 리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수를 쓴 거지?

“그렇게 쳐다보면 얼굴 뚫릴 텐데.”

무던한 헛소리를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작, 죽였어?”

눈꺼풀이 떠지면서 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속삭였다.

“묻었어?”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데이지 양. 오해받기 딱 좋은 화법이니까요.”

루는 마차에 등을 기댄 채 싱긋 웃었다.

“이런 때는 보통 ‘저를 도와주셨군요. 오늘 일은 뼈에 새겨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라거나, ‘감사의 의미로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라거나 ‘당신의 발등을 핥게 해 주세요, 주인님.’이라고 말하면 됩니다.”

그렇게 말할 것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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